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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논란, 지질학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인류세 논란, 지질학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 이덕환
  • 승인 2023.04.17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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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본 인류세_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교수신문이 마련한 인류세 특집의 마지막 회로 이덕환 본지 편집인이자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의 글을 게재한다. 이 교수는 지질학·지질시대가 45억 년의 지구의 역사를 최소 1만 년 단위로 구분해서 다루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류 문명이 시작된 ‘역사시대’가 분석의 한계”라며 “지질학적 구조가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지질학적 변화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지질학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거칠고 위험한 자연과의 맹목적인 조화가 답이 될 수는 없다”라며 “맬서스 식의 패배주의적 종말론도 용납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지질학의 정체성까지 거부하는 종말론적 인류세 논란은 낭비적·소모적인 것이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미래 기술의 개발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기술만능주의라고 탓해도 어쩔 수 없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가 지구의 지질 구조까지 망쳐놓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 인식을 강조하는 용어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대기화학자 폴 크루첸이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지난 200여 년 동안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 환경의 위태로운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겠다는 시도였다. 그런 인류세가 이제는 철학·문학·예술을 망라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가 됐다. 무분별한 탐욕과 방종으로 지구 환경까지 망쳐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뼈를 깎는 반성을 촉구하는 암울한 종말론적 경고의 메시지가 돼버린 것이다.

 

지구 환경은 나날이 심각해지고, 인구는 폭발하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종말론적 인류세 논란이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미래 기술 개발을 강조했다. 사진=픽사베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지구 환경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 팩트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자연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이 동나고 있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의 확보도 어려워지고,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깨끗한 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식량 생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사막화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후 환경이다. 지구의 대기가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이 0.9도나 높아졌다. 인류의 산업활동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인류가 의지하고 있는 ‘얇은 얼음판이 빠르게 녹고 있다’는 것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의 절박한 호소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기후 위기의 재앙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질서를 바꾸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 문제라고 한다.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이 분기점이었다고 한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던 인류가 산업혁명을 계기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마구 파고 들어가서 자연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산업혁명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인류세에 대한 인문학자의 유별난 관심은 그런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들러리로 전락해버린 지질학

지구 환경의 악화에 대한 우려를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불똥이 지질학으로 튀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그 출발이 지질학과 함께 ‘지구과학’(Earth Science)의 중요한 축으로 분류되는 대기과학이었던 사실도 못내 아쉽다. 네덜란드의 크루첸은 오존층 파괴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미국의 마리오 몰리나와 프랭크 롤런드와 함께 1995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 크루첸이 명백한 지질학 용어인 ‘인류세’를 들고나왔다. 대기 환경의 악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강조하기 위한 순진한 시도였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지층의 형성 과정은 인류의 오염 활동이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대기환경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렸다.

지질학의 입장이 난처하다. 지질학은 본질적으로 지구의 지층에 느린 속도로 축적된 과거 역사의 흔적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지질시대의 구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질학과 지질시대가 모두 45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를 다루는 분야다. ‘1만 년’이 최소 기본 단위이고, 인류 문명이 시작된 ‘역사시대’가 분석의 한계다.  지질구조가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지질학적 변화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지질학의 영역이 아니다. 

지질학에게 ‘인류세’는 당혹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고작 200여 년 전의 산업혁명 이후에 진행되고 있는 지질학적 변화를 엄밀하게 관찰·분석할 수 있는 대상도 없고,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매립지나 오염지역은 대부분 지질학에서 분석하는 지층(地層)이 될 수 없다. 지질시대의 일반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질학의 안타까운 현실은 현재 진행 중인 정치적 현실을 포함한 현대사와 미래 전망에 대한 평가·분석을 강요받는 역사학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이다.

옹색한 입장의 지질학자들이 인류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지난 후였다. 2009년에 처음 구성된 ‘인류세연구그룹’(AWG)의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지질시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합의에는 어렵게 성공했다. 그러나 인류세의 시작과 인류세를 대표하는 기준으로 삼을 지층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한 지질학자들의 깊은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와 자연에 대한 인식

인류의 삶이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극심한 기아(飢餓)와 신분 차별의 봉건시대가 막을 내렸고, 민주·자유·평등·공정이 일상적인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 파라다이스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경제적 차별과 다양한 갈등이 등장했고, 자연·생태·생활 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환경 파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환경 파괴가 산업혁명으로 시작됐다는 인식은 명백한 오류다. 특정 생물종의 과도한 번성은 필연적으로 환경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미물에 불과한 녹조류의 부영양화(富營養化)에 의한 녹조도 환경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초승달 지역’으로 알려졌던 중동(中東) 지역의 심각한 사막화도 인류의 과도한 농경이 그 단초였다.

산업화 기술의 발달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구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 18세기까지 4억 명을 넘지 못했던 지구상의 인구가 이제는 80억 명을 넘어섰다. 지난 한 세기 동안에만 5배나 늘어났다. 우리의 탐욕과 사치를 포기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인구의 감소를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지질학의 정체성까지 거부하는 종말론적 인류세 논란은 낭비적·소모적인 것이다. 물론 인류에게 밝은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거칠고 위험한 자연과의 맹목적인 조화가 답이 될 수는 없다. 맬서스 식의 패배주의적 종말론도 용납할 수 없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미래 기술의 개발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기술만능주의라고 탓해도 어쩔 수 없다.

 

 

 

이덕환 편집인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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