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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키우는 젠더혁신, ESG·산업혁신으로 이어져
다양성 키우는 젠더혁신, ESG·산업혁신으로 이어져
  • 이혜숙
  • 승인 2023.04.18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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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교수신문 공동기획_젠더혁신, 연구와 삶을 바꾸다④ 산업현장과 젠더혁신

최근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 편향을 줄이는 젠더혁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문화적인 젠더(gender)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생명 분야는 물론 최근에는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활용하는 과학기술·산업현장·생태계 등에서도 젠더혁신이 주목받고 있다. 교수신문은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GISTeR, 소장 이혜숙)와 공동으로 총 5회에 걸쳐 과학기술과 산업현장 등에서 젠더혁신의 중요성과 동향, 앞으로의 과제를 조명해보는 연재를 마련했다.

① 기초 뇌과학과 젠더혁신
② 임상의학과 젠더혁신
③ 인공지능(AI)와 젠더혁신
④ 산업현장과 젠더혁신
⑤ 지속가능발전과 젠더혁신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의 2019년 자동차 사고 분석 결과, 안전띠를 착용해도 치명적 부상을 입을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73%, 사망 가능성은 17% 높았다. 자동차 충돌테스트에 남성의 인체인형(dummy)만 사용해 남성보다 체격이 작고 체형이 다른 여성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결과였다. 특히 임산부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태아 사망 원인 1위가 임산부의 교통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임산부용 안전벨트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고 있다. 

성차 반영은 산업현장 다양성의 시작

화학물질과 중금속의 독성에도 성차가 있다. 카드늄 중독에 의한 이타이이타이 병은 여성에게 주로 나타나고, 오크라톡신 A라는 물질은 수컷 쥐에겐 강력한 신장 발암물질이지만 암컷 쥐에게는 영향이 없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성차를 반영한 독성 데이터베이스는 거의 없다. 성차가 반영되지 않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된 기술과 제품이 특정 성별에 불편을 야기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스웨덴 ‘국립도로 및 교통연구소’의 아스트리드 린더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여성 충돌 테스트 인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래픽=<Firstpost> 

지난해 스웨덴 ‘국립도로 및 교통연구소’의 아스트리드 린더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여성 충돌 테스트 인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인형은 여성 평균인 키 162cm, 몸무게 62kg으로 근육 강도, 몸통과 골반 모양 등 여성의 해부학적 특성이 잘 반영된 것이다.

린더 박사는 도로에서 남녀노소 모두의 안전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충돌 테스트 인형(더미)의 이점을 강조했다. 그는 성별과 연령에 따른 충돌 테스트 인형을 제도화하기 위한 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구개발 전(全) 단계에 성·젠더 분석을 도입하여 과학기술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증대시키고자 하는 젠더혁신은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DEI, 즉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및 포용성(Inclusion)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ESG 등장 이전의 산업에서 효율성이 강조됐다면, 이제는 사회적 가치와 정의가 목표다.

젠더혁신은 ESG에서 논의되는 인적 자원의 다양성을 사용자의 다양한 수요와 특성을 고려한 포용성의 개념으로 확대하고,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로 논의의 폭을 넓혀왔다. 투자자와 소비자도 기업 내부는 물론 소비자를 향한 DEI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기업의 성과지표에 투명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ESG의 다양성은 개인 선택권과 연결

“적정 실내온도로 알려진 21도로 세팅된 사무실에서 다수의 여성 직원이 가디건을 걸치고 일하는 이유는 실내 온도와 습도 등의 표준이 1960년대 네덜란드 은행에서 정복을 입고 근무하는 남성 직원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선영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성인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업무공간의 데이터 편향성을 지적했다. 60년 전 만들어진 기준에는 신진대사율이 남성의 70%에 불과하고, 근육량이 적은 여성이 쾌적함을 느끼는 온도가 남성보다 높다는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업무공간의 푸른색 조명이 남성에게는 무관하지만 여성의 우울증 발병률을 높이고, 야간시간대 인공조명이 멜라토닌의 생성을 방해해서 유방암 유병률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반대로 업무공간이 만족스러운 경우 업무성과가 22%까지 개선된다는 보고도 있다. 본인이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용자의 환경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업무 효율이 증가한 것이다. 

이 교수는 “ESG의 다양성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권과 연결된다”라며 “사람들의 기호와 업무특성에 따라 색온도를 바꾸는 디지털 조명통합 시스템을 비롯한 자동제어장치 도입 등 ESG 측면에서 기업문화와 젠더혁신을 고려할 시점”이라고 말한다. 성차 반영은 다양성과 포용성 실현의 첫걸음으로 젠더 특성에 따른 업무환경 개선이 기업의 효율성 증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가 강력한 경쟁력을 갖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혁신, 평균의 함정을 탈피해야

1940년대 미국에서 새로 개발한 제트엔진을 장착한 전투기 사고가 잦았다. 기체와 조종술에는 뚜렷한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26년 남성 평균 신체 치수에 맞춰 설계된 조종석이 문제였다. 개발자들은 현역 조종사 4천 명을 대상으로 10개 항목의 신체 치수의 평균을 산출했다.

하지만 전 항목에서 평균에 드는 ‘평균 조종사’는 없었다. 그야말로 ‘표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결국 개인맞춤형으로 조절 가능한 시트를 개발하며 표준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젠더혁신과 함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신차 충돌시험에 여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이슈가 제기된 후 미국 상원의원 게리 피터스와 뎁 피셔가 2021년 6월 충돌 시험을 위한 선진적이고 포괄적인 연구 촉진법(FAIR Crash Tests Act)을 공동 발의했지만 아직 통과되지는 못했다.

최근 도요타·볼보·현대자동차 등이 ESG 관련 보고서를 내며 다양한 체형의 인체모형을 쓰는 젠더혁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기업의 자율에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적절한 법제도를 통해 기업이 필수로 적용하여 남녀 모두의 안전을 높일 수 있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디지털 원격 의료기 분야에서도 다양성 확보가 주요 이슈이다. 영국의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원격의료서비스는 사용자가 직접 건강을 모니터링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해 삶의 질 개선과 의료비용 절감을 이끌었다.

하지만 남녀 성차에 대한 고려 없이 인체 신호를 감지하는 기술을 개발해 정확성에 문제가 제기됐다. 이 역시 웨어러블 기기의 심박수 모니터링, 피트니스 정보 추적, 수면 분석 기술 개발 시 성과 젠더 차이를 반영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야만 정확성을 개선해 디지털헬스 산업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량생산 시대의 종식…젠더혁신은 리스크 아닌 기회 

ESG에서 추구하는 다양성은 사회 구성원 한명 한명의 특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우리나라는 평균치에 맞춘 대량생산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획일화에 익숙해졌다”라고 말한다.

지하철 손잡이 높이도,  교실 책상과 의자의 크기도 동일하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일은 우리 사회가 선진화하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창출되는 기회라는 설명이다. 기업이 성별 등 특성을 고려해 남녀 모두에게 더 좋은 기술과 제품,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새로운 시장의 기회가 열리고 미래가치를 창출해 기업의 이익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부의장은 “지금까지 공학은 철저히 남성 위주의 학문으로 몇 해 전만 해도 서울대 공대 교수 340명 중 여성은 10여 명에 불과했다”라며 “다양성과 포용성 확보가 인재 양성의 시작”임을 강조했다.

역학 교과서 속 수레를 밀거나 도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삽화에서부터 시작되는 작은 변화 등이 인식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란 기대다. 나아가 성차를 인정하는 다양성은 성차 요소와 함께 노인, 어린이, 장애인, 외국인 등 교차 요소에 대한 고려로 확장될 수 있다. 

한편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아는 약 27만 명으로 1961년 104만 명과 비교하면 1/4로 줄었다. 부족한 산업인력을 100% 활용하려면, 여성이 일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새로운 제도와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처음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민간생태계가 잘 조성되도록 정부가 다양한 장려 정책을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 

이선영 교수 역시 “공공건물의 배리어 프리가 이제 하나의 기준이 된 것처럼 기업들도 비용과 시간이 들여서라도 다양성을 반영하는 시설과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라며 “정부가 새로운 평가나 인증 기준을 제시하고, 세제 혜택 등의 동기를 부여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인들은 자신들이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과학적 증거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과학기술 젠더혁신은 성차를 인식할 때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포용성 증진을 통한 혁신의 세계적 조류는 저출산·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잠재성장력의 하락 등 우리 사회와 산업이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젠더혁신은 우리나라의 경쟁력 제고에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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