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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무단 출석처럼 무단 작문?
챗GPT, 무단 출석처럼 무단 작문?
  • 김소영
  • 승인 2023.04.17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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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지구 공기를 마신 지 반백 년이 넘은지라 나이 드는 징조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새로 생긴 게 하나 있다. 나름 바빠서 일정을 까먹고 무단 결석하지 않으려 애쓰다가 엉뚱하게 무단 출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한번은 코로나19 조치가 풀리면서 개최된 조찬모임을 위해 새벽 추운 공기를 뚫고 첫 기차를 타고 갔더니 예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프라인 모임이라는 사실을 잊은 탓이었다. 다행히 주최 측의 배려로 비싼 호텔 조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중요한 위원회에 연달아 무단으로 출석했다. 두 번째 무단 출석 때에는 직원이 환한 얼굴로 또 연락 없이 나타날까 봐 명패를 미리 준비해놓았다고 했다.

바쁘다 보니 일정이 엉킨 탓이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일정 중 어쩌다 무단 출석한 경우에는 의외로 일관된 유형이 있었다. 첫째는 다른 일정이 애매해 못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몹시 가고 싶은 자리였다. 둘째는 역시 일정이 애매했지만 중요한 논의를 하는 회의여서 가급적 참석해야 했던 자리였다. 요컨대 재미있거나 의미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최근 챗GPT 열풍을 보면서 혹시 무단 출석처럼 재미있거나 의미 있는 글을 무단 작문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정보검색의 대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기술을 정보·데이터 바다에서 필요한 걸 찾고 정리하는 그 이상으로, 글을 쓰는 데 활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사람은 자라면서 끊임없이 글을 씀으로써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학교 숙제든 직장 과제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글은 산더미다. 외부 평가와 인정을 받기 위해 쓰는 수많은 글들에 챗GPT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한편 진짜 사람이 쓴 글을 찾느라 또 챗GPT를 동원해야 하는 수고로움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런 글에는 실컷 챗GPT를 쓰라 하자. 그 과정에서 저작권이나 표절 같은 문제들이 진통을 겪으며 논쟁되고 해결책이든 타협점이든 찾아갈 것이다. 

근데 정말 쓰고 싶은 글은 그냥 쓰게 된다. 억지로 시간에 쫓겨 칼럼을 써야 할 때는 여기저기 남이 쓴 걸 기웃거릴 것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굳이 허락받거나 데드라인을 정하지 않아도 무단으로 쓰게 될 것이다.

사실 글쓰기는 단순히 작문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육체적으로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지구에서 지배적 위치를 얻게 된 데에는 협업 공동체를 이루어 그 어떤 동물보다 더 뛰어난 동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이 소통이고, 글쓰기가 바로 가장 혁명적인 소통의 기술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필요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의 기술은 수학과 과학의 시초이기도 했다.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0이라는 개념도 결국 글자이고, 수학과 과학의 많은 과정이 결국 글쓰기다. 
챗GPT는 훌륭한 글쓰기의 도우미가 될 수 있다. 억지로 써야 하는 글일수록 그렇다. 쓰고 싶은 글은 그 과정이 재미있어서 챗GPT에게 별로 양보할 생각이 안 들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담은 글쓰기는 그 과정 자체가 결의를 다지고 원칙을 확인하는 중요한 시간이기에 챗GPT에게 맡길 이유가 없다. 

좀 있으면 가르치는 일도 20년이 되는데, 과연 학생만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언제 쓰고 싶은 글, 외쳐야 하는 글을 무단으로 작문해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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