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3:40 (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4]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 빅토리아 우드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4]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 빅토리아 우드헐
  • 박홍규
  • 승인 2023.04.11 0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 사진=위키피디아

비록 탄핵당하고 수형생활을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2013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아직도 여성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미국보다 우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1872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성이 있었다. 당시 34세였던 빅토리아 우드헐이었다. 그녀는 대통령의 딸도, 정당의 대표도, 국회의원 출신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밑바닥 출신으로 두 번이나 결혼한 가난한 노동자 출신 여성으로, 성직자의 불륜을 우편으로 알렸다는 이유로 음란죄로 기소되어 투옥된 직후에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니 한국의 여성대통령과는 천양지차다.

우드헐은 1838년, 가난한 사기꾼이자 뱀기름 판매원인 아버지와 문맹 심령사로 경찰과 자주 부딪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처럼 심령술을 부리고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그녀는 3년의 교회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1853년, 15세에 나이가 두 배나 많은 의사 우드헐과 결혼했는데(납치 결혼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부모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남편이 주정뱅이이자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빅토리아는 결혼 후에야 알았다. 그녀는 장애아를 포함한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재봉사, 점원, 무대 배우를 했으나 외도를 일삼는 남편과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1864년, 결혼 11년 만에 이혼했다. 당시 이혼은 사회적인 추문으로 간주되고 낙인이 찍혀 배척당했으나, 그녀는 자유연애를 믿었다.

 

주간지 창간해 여성 참정권, 자유연애 알렸다

1866년 28세의 그녀는 남부 연합군 대령 출신인 블러드와 재혼하고 1870년, 여동생 테네시와 함께 최초의 여성 주식중개인이 되어 월스트리트에서 중개회사를 열어 상당한 부를 쌓았다. 동시에 그녀는 여성의 권리와 참정권을 얻기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같은 해에 스테픈 펄 앤드류스가 이끄는 개인주의 아나키스트 그룹에 들어갔다. 그 그룹은 전통적 결혼관을 거부하고 일부일처제에 근거한 자유로운 사랑과 공동생활을 옹호하는 팬타키(pantarchy)라는 이론에 근거했다. 그녀는 앤드류스와 남편의 도움으로 여동생과 함께 여성의 권리와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잡지인 <우드헐과 클라핀 주간지(Woodhull & Clafin’s Weekly)>를 발간했다. 그 후 6년 동안 간행된 잡지는 페미니즘과 함께 당시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금기인 성교육, 자유연애, 여성 참정권, 채식주의 등을 옹호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졌다.

우드헐과 클라핀 주간지(Woodhull & Clafin’s Weekly).  
성교육, 자유연애, 여성 참정권, 채식주의 등의 내용이 실렸다. 사진=위키피디아.

여성이 견딜 수 없는 결혼 생활을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그녀는 성관계를 가질 것인지 여부는 모든 경우에 여성의 선택이라고 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제목의 사회적 자유의 원칙에 관한 연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성에게는 본질적으로 성적 결정권이 있다. 그녀의 본능이 일깨워지면 상업이 뒤따를 것이다. 여성이 성노예에서 성적 자유로 나아가고, 자신의 성기를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며, 남성이 이 자유를 존중해야 할 때, 이 본능은 순수하고 거룩해질 것이다. 그러면 여성은 지금 존재하기 위해 뒹굴고 있는 죄악과 병적 상태에서 일으켜지고, 그녀의 창조 기능의 강렬함과 영광은 백배로 증가할 것이다.”

1871년 자유연애를 지지하면서 그녀는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할 수 있는 한 오래 또는 짧게 사랑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헌법적, 자연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내가 원한다면 매일 그 사랑을 바꿀 수 있고, 그 권리로 당신이나 당신이 틀을 잡을 수 있는 어떤 법도 간섭할 권리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다

같은 해, 우드헐과 여동생은 1868년 런던에서 설립되어 제1인터내셔널로 알려진 국제노동자협회(IWAM) 미국 지부의 지도자가 되어 사회주의운동을 지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영어 번역판을 최초로 실은 것은 우드헐의 잡지였다. 우드헐은 또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만든 샤를 푸리에의 자유연애에 찬동했다. 같은 해 말 그녀는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 위원회에서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다.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가 모든 시민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여성도 이미 투표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그녀의 연설은 일부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녀를 여성참정권 운동의 리더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 지부의 조직력이 약화되자 마르크스는 우드헐을 ‘부르주아 박애주의자’라고 폄하하고 그녀를 추방하는데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회주의자로서 혁명가를 자처하고 마르크스와 같은 경제학에 기반을 둔 견해를 유지했다. 1896년 그녀는 「미국의 여성 참정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참정권은 여성 해방이라는 더 큰 문제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대한 문제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모든 나머지의 기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불린다.

1872년 우드헐과 그녀의 지지자들은 전국여성권참정권협회에서 탈퇴하고 평등권당(Equal Rights Party)을 만들었다. 우드헐은 그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 전해에 입후보 의사를 밝힌 그녀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정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이듬해에 새 헌법을 개방하고 새 정부를 창성하자고 제안했다. 노예폐지론자인 흑인 프레데릭 더글러스가 런닝메이트였으나 그는 우드헐의 과격성을 이유로 캠페인을 거부했다. 흑인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은 여성 참정권 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을 재결합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그것은 도리어 흑백혼합에 대한 논란과 잘못된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기독교로 개종하며 정치적 입장 바꿔

그 무렵 우드헐과 여동생은 유명 목사인 헨리 워드 비처가 그들을 비난하자 목사가 그의 교회 신자와 불륜관계에 있음을 폭로했다. 그것으로 인해 우드헐은 우편을 통해 음란물을 보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체포되었으나 6개월 후 무죄 평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콤스톡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들을 비난하여 1877년 그들은 영국으로 갔다. 우드헐은 1875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다. 그래서 자유연애에 대한 그녀의 초기 견해를 거부하고 그녀의 글에서 순결, 모성, 결혼 및 성경을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1876년 이혼하고 부유한 기업가와 다시 결혼한 뒤 영국과 미국에서 출판과 강연을 계속했다. 우드헐은 1884년과 1892년에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우드헐의 페미니즘에 대해 당시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동조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녀는 낙태에 반대하고 우생학에 찬성했다. 그녀는 건강한 자녀를 낳고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성교육, 결혼생활, 산전관리를 옹호했으며, 만년에는 번식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강제 불임 수술을 지원했다. 이는 사회적 자유를 옹호하고 사랑과 결혼 문제에 대한 정부 간섭에 반대했던 그녀의 초기 사상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만년의 그녀는 영국의 시골에서 살다가 1927년에 사망했다.

우드헐을 확고한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벤저민 터커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처럼 우드헐도 지배적인 금융 시스템이 경제 및 노동 문제의 근원이라고 믿고 금융 및 은행업의 ‘완전한 혁명’을 주장하면서 물질적 조건의 평등이 아니라 권리의 평등과 자연적 기회에 대한 제한 없는 접근이라는 ‘완전한 평등’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사업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국가 자체 또는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