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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사의 이념과 서사전략-1900~20년대 최남선의 역사 담론 연구
근대 문화사의 이념과 서사전략-1900~20년대 최남선의 역사 담론 연구
  • 김현주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06.08.2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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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동아시아 근대지식의 형성에서 문학과 매체의 역할과 성격>( 2006년 7월 1일)

1. 문화와 문화사

이 글은 1900~20년대 최남선의 문화사 담론에 대한 연구이다. 근대 문화사는 민족(국가)·문화·역사를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결합시켜 만들어 낸 건축물이다. 한국에서 문화사 연구의 원점에 해당하는 최남선의 작업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 문화사의 이념과 서사전략을 검토한 것이 이 연구의 주요 내용이다. 분석의 초점은 ‘문화’와 역사의 서사이다.

‘문화(Culture)’는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서구에서 문화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 미학과 낭만주의 문학 비평, 고전 사회학 이론과 인류학, 해석학과 구조주의 등 다양한 지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인식범주로서 문화는 인간 정신의 일반적인 상태로 이해된다. 이러한 문화 개념에는 인간의 정신 능력의 완성이나 해방 같은 목표가 적재되어 있다. ‘문화’는 보다 구체적이고 집합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때 ‘문화’는 사회의 지적·도덕적 발달 상태를 표현하며 진화론적 문명 개념과도 연결된다. 또 문화라는 말이 記述的 범주로 쓰일 때, 그것은 한 사회의 예술 및 지적 작업의 총체로 간주된다. 한편 사회적 범주로서 문화는 한 종족의 전체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화는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모든 힘들과 그 표현,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 각종의 기술, 예술, 문학과 학문을 포괄한다. 현실에서는 이 유형들이 서로 결합함에 따라 문화에 대한 논의가 더욱 복잡해졌다.

한국에서도 1920년대에는 문화라는 말이 위와 같은 복잡한 의미를 담고 돌아다녔다. ‘Culture’의 번역어로 문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대략 1900년대 후반이었다. 이때 ‘문화’는 사회나 사회구조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사회의 발달 상태를 가리키는 ‘문명’과 동의어로도 쓰였다. 1910년대에 ‘문화’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형이상적인 것과 형이하적인 것으로 구분되었다. 이광수의 글에 자주 보이는 ‘정신적 문명’이라는 말이 드러내듯이, ‘문화’는 인간의 정신적·내적 능력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표현하면서 근대적 개인성을 정의하는 데 활용되었다. 아울러 ‘문화’는 위와 같은 능력을 구현한다고 여겨진 종교·예술·학문 같은 특수한 상징영역들을 포괄하는 상위 범주이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는, 독일에서 발원하여 일본에 받아들여진 문화(주의)철학이 유포됨에 따라 ‘문화’가 ‘형성’이나 ‘교육’ 같은 관념과 결합하면서 정치, 경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 영역으로 성립했다. 한편 조선문화, 동양문화라고 했을 때, 여기서 ‘문화’는 지역이나 집단의 생활방식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20세기 초 한국에서 ‘문화’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적재하고 있었다.

1900년대에서 1920년대에 걸친 최남선의 역사 담론은 무엇보다도 문화사의 시도라는 의의가 있다. 최남선이 역사 연구의 대상, 목표, 필요성, 범위, 자료, 연구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은「朝鮮歷史通俗講話」인데, 여기서 그는 역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문화’의 해명으로 확정했다. 그렇지만 최남선의 역사 담론에 문화라는 단어와 그 사상이 수용된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 그는「海上大韓史」에서 문화사의 아이디어를 선보였고,「稽古箚存」에서는 고대 조선 문화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려고 했다. 앞서 말한「조선역사통속강화」와 그 이후 ‘단군’과 ‘불함문화’ 연구를 거치면서 문화 이론과 문화사 연구가 심화되었고,「朝鮮歷史講話」에서 드디어 통사가 완성되었다. 1900~20년대 최남선의 작업은 문화의 역사에 대한 탐구로 수렴된다.

이 글에서 주목한 점은 위 텍스트들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각각 달랐고 아울러 역사의 서사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구에서는 이전 시대의 복잡한 사건과 과정을 ‘번역’하는 데 문화라는 개념이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화에 대한 생각이 다양했기 때문에, 문화사의 형태도 다채로웠다. 최남선은 ‘문화’에 대한 생각을 계속 수정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사를 시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정 항목에는 문화라는 말 자체의 의미뿐 아니라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구성요소들 간의 위계, 핵심 요소 등도 포함된다. ‘문화’에 대한 제반 사고가 변화함에 따라, 역사에 어떤 사건들(사실들)을 포함해야 하는가, 또 서로 다른 사건들(사실들)은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가에 대한 인식도 변화했다. 시대구분의 틀이나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할 시기도 달라졌다. 최남선의 역사 담론에서 ‘문화’의 변화는 서사의 변화와 긴밀한 상관성이 있었다.

최남선으로 하여금 ‘문화’에 대한 사고를 수정하고 서사를 변경하도록 추동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190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최남선이 역사 텍스트에서 역사·문화·민족을 정의하고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규정해 간 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특히 문화 관념을 수정하고 서사를 변화시킨 양상을 추적했는데, 이는 문화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최남선이 어떤 난관에 부딪혔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고대사 기술에 관심을 집중한 것은, 고대가 최남선이 주목한 시기였을 뿐 아니라 각각의 텍스트에 나타난 ‘문화’와 서사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논의 대상을 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궁극적으로 근대 문화사의 이념과 서사전략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목표로 한다.

2. 계몽주의적 문화사의 아이디어:「海上大韓史」

「해상대한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三面環海한 우리 대한의 세계적 지위”(2~5회)에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四隣(일본, 아메리카합중국, 지나, 만주 및 러시아)의 형세를 기술했다. 둘째, “반도와 인문(문화)”(6~10회)은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 문화 발달 간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는, 반도가 해륙 양 편의 문화를 소개·전파하고, 성장시키고, 집대성해왔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창조하고 개척해 왔다는 점을 상술했다. 셋째 “泰東에 처한 우리 반도의 기왕의 공적”(11~12회)은 한반도의 역사적·문화적 업적에 대한 기술이다. 세계문화와 태동문화의 발달에서 한반도가 이룩한 공적이 이 글의 “본제”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 최남선의 역사관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계몽주의적 문명사관이다. 최남선은 “세계문화사”, “세계문화발달사”를 열심히 읽었고 이를 통해 유럽에서 형성된 총체적 세계발전관, 즉 계몽주의적 역사 패러다임과 문화사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게 되었다. 문화사는 유럽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문명의 보편적 진보과정으로 해석하는 문명사 양식의 역사였다. 그가 과거로 관심을 돌린 것은, 계몽주의적 문명사가 제시한 보편적인 역사 전개 법칙에 조선을 합치시킬 자료(증거)를 찾기 위해서 였다.

보편적 역사 전개 법칙에 맞추어 조선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 활용된 것이 바로 ‘문화’였다. 우선, 이 글에서 ‘문화’는 사회 구조를 표현하는 기술적 범주이다. 최남선은 ‘문화’를 ‘인문’, ‘문명’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문화’ 아래에는 문학, 공예, 미술, 정치, 법률, 법교(종교: 인용자), 학술, 교학(윤리: 인용자), 상업, 무역, 음악, 劇戱(연극: 인용자) 같은 하위 범주가 있다. 여기서 ‘문화’는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사회제도를 총칭하는 매우 포괄적인 범주이다. ‘문화’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러 제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점에서 문화의 구조와 사회의 구조는 상동적이다. 최남선은 다종의 하위 범주로 구성된 문화라는 틀을 적용하여 조선의 과거를 이해(분석)하고 있다.

사회적 범주로서 ‘문화’의 수용은 역사학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문화를 사회구조와 연관시켜 분석하는 모델은 인류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러한 모델을 채용함으로써 역사학은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모든 사회제도를 포괄하는 전체사, 종합사적 탐구가 되었다. 과거의 제도적 전체상을 포착하기 위해서, 최남선은 그때까지 역사가들이 조명하지 않았던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문화라는 범주를 수용함으로써 역사학의 탐구 대상이 폭넓어진 것이다.

한편 ‘문화’의 발달은 단선론적이고 목적론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최남선은, 지역이나 종족의 역사에 대한 가치 평가는 그것이 “일반 문명의 발달에 대하야 (끼친: 인용자) 공적”에 의거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종교상으로 볼 때 “세계 인류 중 가장 먼저 일신교의 진리를 영각한 자”이며 정치상으로 볼 때 “세계상에서 공화제란 제도와 입헌이란 제도를 가장 먼저 썼”다. 그 외에도 외교, 상업, 공예, 문학, 학예 등 분야에서 일반문명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일신교와 입헌공화제를 강조한 것은 근대 서양의 종교와 정치형태를 가장 진보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다. 종교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정치가 전제정치에서 귀족정치를 거쳐 입헌공화제로 나아가는 것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경로로 생각되었다. ‘국민은 위대한 역사를 가져야 한다’고 했을 때, 위대한 역사는 서양에 뒤지지 않는, 적어도 동등한 정도의 문화적 진보를 이룬 역사를 의미했다.

문화 발달의 조건이나 동력에 대한 사고는 결정론적이었다. 최남선은 지리적 조건이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문화의 대부분은 반도에(서: 인용자) 일어났고 또 문화의 傳導와 조화와 집대성과 개척은 모두 반도의 천직이어서 (반도는: 인용자) 古昔으로부터 인류사회의 燈臺(光塔)”이다. 여기서 ‘반도’는 의인화되어 문화 혹은 사회적 행위의 주체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는, 지리적 조건이야말로 문화의 창조와 발달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는 지리적 결정론에 따른 것이다.

우리 반도의 역사는 본토 민족의 건국적 천재와 국민적 특장을 발휘함으로부터 始初하니 단군 조선의 건설 당시로 말하면 이 세계가 거의 다 야만초매인의 소유오 겨우 한팔한발이나마 문명에 들여놓은 자는 이집트, 지나와 인도의 양 三處 뿐이라. 그런데 우리 반도에는 그때부터 혹 그 이전부터 이미 문명의 정도가 국가=제도=군장을 필요할 만큼 진보......(후략)

문화론의 또 다른 특징은 국가주의적, 정치 중심적 사고이다. 위 인용문은 단군조선의 건국이 가진 정치적 의의를 기술한 부분이다. 이어서 최남선은 ‘우리 민족은 여러 차례 消長과 이동을 거쳐 고구려와 발해를 건설했으며, 특히 고구려 건국은 우리 민족의 국민적 특장을 뚜렷하게 드러낸 예’라고 썼다. 여기서는 국가 건설이 고대문화 발전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나타난다. 이는 국민-국가 수립이 가장 시급한 목표였던 1900년대의 국가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문화는 다양한 제도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정치가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분야라는 생각 또한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역사’의 실행자이자 ‘문화’의 소유권자로 ‘민족’이 부상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황을 설명하거나 반도와 문화의 관계를 논의하는 곳에서 행위의 주체는 ‘오인’, ‘우리(들)’, ‘우리 국민’, ‘우리나라’, ‘우리 대한’, ‘우리 제국’, ‘우리 반도’, ‘우리 대한 반도’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과거를 검토하면서 ‘민족’이 주체로 등장했다. 위 인용문에는 ‘역사는 민족에 의해 개시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또 영토(‘반도’)와 문화(‘국가’)에 대한 영속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는 ‘민족’이라는 생각도 나타나 있다. ‘대한’이나 ‘제국’은 역사와 문화에 대해 영원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문화 진보의 역사를 수행하는 사회적 총체는 ‘민족’인 것이다.

「해상대한사」는 계몽주의적 문화사의 아이디어를 보여준 글이다. 최남선은 ‘세계사’, 즉 유럽사를 통해 계몽주의적 문화사의 패러다임을 수용했고, 조선이 그 일부가 되게 할 증거를 찾기 위해 과거를 탐구했다. ‘문화’는 조선의 과거를 계몽주의적 역사 패러다임 안에서 해석하는 데 필요한 분석적 범주와 확장된 시야를 제공했다. 한편 역사의 개시자로, ‘문화’의 소유권자로 ‘민족’이 등장했다. ‘보편적이면서도 조선(민족)에게 유리한 역사’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최남선은 이 글에서 민족이 문화를 발달시킨 역사적 과정을 일관된 서사로 보여주지는 못했다.「해상대한사」는, 비록 ‘史’라는 단어를 썼지만, 최남선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한 편의 史記 혹 史論으로 정돈, 완성되지는 못한’ 글이다.

3. 민족주의적 역사의 한계텍스트:「稽古箚存」

「계고차존」은 문화사의 아이디어를 서사로 구체화한, 본격적인 고대사 기술이다. ‘古’는 단군에서 부여까지, 즉 삼국시대 이전을 가리키는데, 최남선은 이 시기를 ‘上古’로 묶었다. 글은, 짧은 “緖論”, 단군시절과 부여시절로 나누어 기술된 본론, 그리고 결론인 “상고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에서 최남선은 고대에 ‘조선인(민족)’이 통일을 준비하고 문화를 발전시킨 과정을 서사화하려고 시도했다.

「계고차존」에서는 모든 사회제도를 포괄하는 범주로서의 ‘문화’가 약간 동요하고 있다. 최남선은 단군시절을 설명하면서 ‘문화’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물질적 문화에는 산업과 의복, 주거, 교통수단 등이 포함되었고, 정신적 문화에는 인민의 氣習(기풍), 신앙, 예술, 문자와 歌唱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결론인 ‘상고개관’에서는 문화를 둘로 나누지 않고, 무역, 화폐, 산업(농업 등), 풍속, 武備, 문학, 언어, 문자 등을 검토했다.「해상대한사」와 비교할 때, [계고차존]에서 문화의 하위범주들은 종합적, 체계적, 균질적이지 않다. 정치와 법률이 제외된 점에서 그러하고, 기습, 가창, 무비 같은 전통적 용어를 근대적 용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 것도 눈에 띈다. 이는 문화라는 근대적인 분석틀을 적용하여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문화에서 산업, 즉 농업이 점한 위치이다. 아래 인용문은 부여 후기 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의 근본 원인을 농업의 발달에서 찾는 대목이다.

農利로 由하야 得하는 사회상 생활상의 일반적 발달을 遂하게 되매 제 團部의 세력이 隱然히 昻騰하여 가던 중 외래의 刺激을 受하야 잠재하던 민족성이 환기되고 일변으로 압록 두만 양 강을 跨據한 신국가 운동이 起來하야 침체한 북부여에 대하여 청신한 기력을 示하게 됨은 첫째 정치상의 대변상이라 할지라. 당대 하엽의 민족적 자각은 대개 애향심의 발달에 由하고 애향심의 발달은 농업적 정주에 由한 것인즉 시세와 농업의 교섭이 여하히 긴절하였음을 見할 것이며......(하략)

최남선에 따르면, 부여 후기에는 북쪽의 부여에서 남쪽의 韓地까지 조선인이 거주하는 전 지역이 농업을 근본으로 삼게 되었다. 농업은 사회상, 생활상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특히 애향심을 발달시켰고 이것이 민족의식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고조선인의 민족적 자각은 부여 조 말 漢人 세력의 요동 침점에 刺激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이는 외부의 침략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한 중대한 계기였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은 민족의식 발달의 근원을 농업에서 찾았다.

정치상의 변화(민족의식의 발달)이외에도, 농업의 발달은 민풍(도덕과 기풍, 윤리), 신앙(배천의 신앙과 의식), 무역, 기상에 대한 관념, 占卜, 音曲과 舞樂의 발달을 뒷받침했다. 최남선은 부여 후기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농업의 발달은 제반 방면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당대의 百般 문물이 모두 농업을 중심으로 생성 발육 추이 변이했다.’고 쓰고 있다.

정리하면,「계고차존」에서 최남선은 문화 발달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앞서 문화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었다고 했는데, 그는 물질적 문화를 정신적 문화의 토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산업은 문화를 구성하는 한 분야이면서 다른 분야들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의 물적 토대이다.「해상대한사」에서 문화 발달이 지리적 조건이나 본래적 자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했던 것과 대비하면, 이는 매우 달라진 인식이다.

「계고차존」의 중심 이야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신시-단군-부여를 거쳐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조선인은 비로소 민족적 통일과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발전의 과정은 ‘역사의 胚胎→落種과 發芽→移秧→結實→수확과 저장’이라는 식으로도 비유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상고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고구려의 건국, 곧 민족의 통일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하기까지 2천 년 동안은 “준비”기로 명명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공동체(국가)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좀 더 심부에 있는 공동체로서 ‘민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부여 후기의 ‘민족적 자각’을 중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계고차존」에서 고대에 조선이라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민족적’ 동일성이 입증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최남선은 고구려를 건국하기까지 조선민족이 탄생, 성장, 발전해 온 과정을 이야기하려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민족의 통일은 고구려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조선인’이 존재했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그러나「계고차존」은 이러한 지배적인 가정과 서사에 배치되거나 적어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잡음들로 꽉 차 있다. 최남선의 이야기는 다양한 이질적 목소리들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고 있다.

먼저, 최남선은 지금으로부터 5~6천 년 전 송화강을 중심으로 해서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황하에 이르는 지역에 조선인이 거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3천 년 전경에는 ‘주신’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인들이 총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어서 기술한 내용은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古傳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3천 개의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동남쪽으로 이동해갔는데, 이동 시기와 경로, 세력과 지혜에서 차이가 컸다. 先住 집단 및 다른 집단과 경쟁, 각축하는 동안 힘을 떨친 집단도 있었고 패배하여 없어진 집단도 있었다. 또 토지의 정형이 달라 집단들의 문화와 風氣도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차이 때문에 이 집단들은 部屬이 각별하고 명칭도 달랐다.

단군시대에 대해서도 종족적, 문화적 동일성이 효과적으로 증명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대해 최남선이 제시한 이야기는, 조선인의 중심 종족인 환족이 태백산 아래 신시를 열었으며, 이어 단군의 통치 시대가 1천 5백년 가량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남선은 이 시기 조선 지역에 예, 옥저, 맥, 한 등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고, 황하와 요하 사이, 발해와 황해의 연안에도 수많은 집단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漢籍에 자주 등장한 ‘九夷’라는 말이 드러내듯이, 북쪽 육지 방면에는 稷愼, 부루, 예, 맥, 현도, 양이, 고이, 兪, 발, 고죽 등이 있었고, 항산 남북에는 畎夷, 干夷, 方夷, 藍夷 등이 한족과 잡거했으며, 동해방면에는 靑丘, 周頭, 島夷, 嵎夷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집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며, 외계의 사정이나 異族과의 혼화로 인해 이들 사이에는 풍속과 언어의 차이가 매우 컸다.

이어 부여시대는 종족과 제도의 混化기로 묘사되었다. 최남선은 이 기간을 ‘부여를 중심으로 한 同族 異國의 시기’로 기술하려고 했다. 단군의 적통은 부여로 계승되었고 환족의 다른 부분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옥저, 예맥, 구려, 진번, 진국, 한국, 마한, 진한, 변한, 예 등의 국가를 형성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부여시대에 한족(은·주·진·한)으로부터 인적·문화적 유입과 영향이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부여에는 일찍부터 은·주의 문물제도가 유입되었다. 초엽에 이미 기자와 은의 유민이 귀화하였고 중엽이후로는 이들이 반도의 동남단까지 유입하여 문화의 변화를 가져왔다. 말엽에는 진·한인이 부여와 그 밖의 다른 여러 국가에 귀화·귀속하여 정치제도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부여시대는 풍속의 “일대 혼란기”였다.

부여인의 古風을 향하여 四方의 雜俗이 紛然히 集注하여 內外新舊가 雜糅交和하였도다. 귀신교(즉 무속)는 北野로서 從하야 점점 南下한 것이니 濊의 산천 及 猛獸崇祀, 韓地의 巫君同位의 俗이 다 此 風의 漸染으로서 起한 것이며 부여의 兄死妻嫂는 서방 흉노의 俗이 유입한 것이며 濊의 동성불혼과 진한의 嫁娶以禮 등은 다 漢土 윤리의 감화를 受한 것이며 韓의 남방에는 南島人文身의 俗도 행하였더라. 錦繡와 冠弁으로 尊卑의 公私를 表別하는 풍도 恐컨대 漢人의 전례를 效함일지며 統히 器用과 ( )飾에는 漢風의 영향이 多함은 勢의 固然한 바.......(하략)

최남선은, 북쪽의 대륙부와 남쪽의 반도부는 衣食, 거처, 儀式전례 등 근본적 습속이 동일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든 것은 祖先숭배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을 보면 그 집단들 사이에 신앙, 가족제도, 장례·혼인 풍습, 衣制, 器物 등의 동일성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그는 남·북이 계급제도, 衣制, 歛髮의 법 등에서도 차이를 보였다고 쓰고 있다. ‘부여의 고풍’은 결코 유지되지 못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언어도 매우 잡다하였다. 정리하면, 부여시절에는 “잡다한 종족이 혼입하는 동시에 혈육, 습속과 共히 외부 언어의 유입이 幾多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상고시대 조선 지역에서 ‘종족’의 단일성·동일성은 증명되기 어려웠다. 사카이 나오키가 지리적 영역으로서의 일본과 국민적 주체로서의 일본을 혼동하는 것(일본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이상 민족으로서의 일본인 또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지적한 바를 빌려 말하자면, 과거에 ‘조선’이라는 이름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것을 근거로 통일된 정치집단이나 사회집단이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일정한 지리적 범위를 가리키는 이름이 존재하는 것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집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계고차존」은 고대 조선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종족적 정체성이 불완전하고 혼성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 혹은 사회적 제도라는 의미에서 ‘문화’의 통일성을 말하기도 어렵다.「계고차존」에서 최남선에 의해 형상화된 고대는 수많은 政體가 성립되었다가 무너졌고 또 다양한 집단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비연속적이고 분할된 복수의 역사 공간이었다. 각종 제도와 관습은 혼성적·잡종적이었고, 복수의 언어가 공존한 시기였다. 최남선은「계고차존」에서 상고시대의 순수하고 동일한 문화를 증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뜻밖의’ 결과는 연구 방법의 영향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고풍스러운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계고차존」은 주로 한적과 고서에 의존하여 씌어진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의 서적은 하나도 거론되지 않은 반면, 『山海經』, 『古今注』, 『淮南子』, 『東方朔神異經』, 『後漢書』, 『風俗通』, 『說文』, 『黃海紀異五之一(出歷世眞仙體道通鑑)』, 『三國遺事』, 『魏書』, 『北史』,「北塞記略』, 『漢書 地理志』, 『逸周書』, 『孟子』, 『論語義疏』, 『三國志』, 『管子』, 『史記』 등 한적과 고서 수십 권이 거론되고 있다.「해상대한사」에서 사료의 부족에 따른 착오와 누락의 가능성을 안타까워했거니와, 그 사이 최남선은 많은 자료를 모으고 읽었다.「계고차존」에서 최남선은 방대한 사료들을 정리하고, 관련 구절을 직·간접으로 인용하며, 이를 꼼꼼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섬세한 고증적 태도는, ‘옛 일을 상세히 살펴 기록함’이라는 뜻을 가진 ‘계고차존’이라는 제목에도 드러난다. 문제는, 고증이 세밀하면 세밀할수록 사료들이 내는 잡음이 더욱 커졌고 이에 의해「계고차존」의 지배적 서사, 즉 ‘민족’을 주체로 한 문화 발전의 서사는 더욱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계고차존」은 민족주의적 역사의 ‘한계텍스트’에 해당한다. 최남선은 고구려를 건국하기까지 조선인(민족)이 통일을 준비하고 문화를 발전시킨 과정을 기술하려고 했지만 조선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종족적 동일성을 증명하지 못했고 문화의 통일성도 입증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계고차존」은 고대에 대한 민족주의적 역사 서사의 지배적 가정(단일하고 영속적인 민족적 주체)이 곤경에 처해 있음을 드러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4. 문화론의 재정립:「朝鮮歷史通俗講話」

「조선역사통속강화」는 1920년대 최남선의 역사 연구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글이다. 역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뿐 아니라 텍스트의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도,「통속강화」는「계고차존」으로부터 가히 환골탈태라 할 만큼 큰 변화를 보여준다. 따라서 근대 역사 담론의 역사에서, 그리고 더 넓게 근대 인문학 담론의 역사에서「통속강화」의 위치와 특징을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간단히 문화론만을 살피기로 한다.

「통속강화」는 문화사 연구의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과 개념의 구체적 적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전체를 셋으로 나누면, 첫째와 둘째 부분은 서론에, 셋째 부분은 본론에 해당한다. 첫째 부분(1회)에서는 역사학을 정의하고 연구 대상과 필요성을 기술했다. 둘째 부분(2회~10회)에서는 고대사 연구의 범위, 자료, 분야를 설명했다. 최남선은 이 두 부분을 통해 문화사 연구의 기본 지식과 개념을 정리했다. 셋째 부분(11회~20회)은 고대의 언어(말과 문자)를 역사적 방법과 비교 방법에 의거하여 탐구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연원과 문화의 계통, 성질 및 영향관계를 논증한 본론에 해당한다. 최남선은 20회분까지 제목에 ‘開題’라는 용어를 붙였지만, 8회분 연재를 마치면서 ‘2, 3회 안에 개제를 마무리하고 本題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11회에서 20회까지가 본론인 셈이다. 서론과 본론은 개념(이론)과 개념(이론)의 적용의 관계이다.

「통속강화」의 의의는 ‘문화’를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확정한 데 있다. 최남선은 역사가 해명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역사학의 대상)로 민족과 문화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조선 역사의 실제적 문제는 조선 민족의 연원을 설명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민족의 연원을 밝히는 일은 “그(민족: 인용자)의 承受한 문화의 계통과 그의 做出한 문화의 성질과 그의 발전시킨 문화의 영향을 闡明하는 前提”이다. 즉 1920년대 최남선의 역사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조선의 문화”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관념”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정확한 역사’는 곧 ‘문화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 구성 요소들 간의 위계, 핵심 요소에 대한 생각은 새롭게 조정되었다.

종교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그 사회의 내부생활이오 그 人衆의 근본정신이오 따라서 그 문화의 최고표현이 된다. 인류 문명의 가장 근본적 동기는 거의 종교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고대에 있어서는 정치이고 법률이고 제도이고 의례이고 풍속이고 습관이고 학문이고 예술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總히 종교를 중심 삼아서 존재도 하고 작용도 하고 발달도 하고 변천도 하였다. 인류의 고대 생활은 종교 하나뿐이오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할 수 있다. 인생백반의 作爲가 총히 종교의 일 부문 일 지절 일 방면 일 분자로 존재하였었다......(중략)...... 이럼으로써「종교사를 잘 앎은 便是 문화사의 전체를 안 것이다」는 말까지 있다.”

「통속강화」에서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몇 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 첫째, 문화에서 민속, 관습 같은 일상적·생활적 표현들이 강조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믿음, 性情, 심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현상이었다. 둘째, 산업이나 기술 같은 경제적 요소는 문화에서 제외되었다. 위 인용문에는 고대 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이 나열되고 있는데, 여기에 경제와 관련된 제도는 없다. 다른 곳에서는 “문화적 사실”을 풀어 말하면서 “정치제도, 종교, 철학”을 들기도 했다. 문화는 사회의 상부구조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셋째, 문화의 중심에 종교를 두었다. 위 인용문에서 최남선은 고대 문화에서 종교의 규정적 힘을 강조했다. 고대의 모든 생활방식의 형성, 작용, 발달, 변화의 근저에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계고차존」에서 ‘고대의 문물은 모두 농업을 중심으로 생성·발육·추이·변이했다’고 적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 수 있다. ‘문화’가 종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의 상부구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므로 ‘문화사’의 의미도 재조정되었다.

문화에서 정신적인 것이나 내적인 것, 특히 종교를 강조하는 태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였던 것으로 보인다.「통속강화」는, 이 시기 최남선이 일본의 동양사학자인 시라토리 쿠라키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남선은 시라토리의 알타이 방언 연구, 흉노족과 조선족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직·간접으로 여러 차례 인용했다. 또 언어를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도 시라토리가 이미 시도한 것을 응용한 것이다. 종교와 단군에 대한 관심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 스테판 다나카의 연구에 따르면, 시라토리는 종교적 정신에서 국민국가를 위한 통일적인 주제를 확인했다. 그는 일본의 민족사상의 근거를 하늘 개념의 현시 혹은 천황제라는 역사적 관념 위에 둠으로써 일본의 유일성을 확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체성을 부여할 길을 찾아내었다. 시라토리와 마찬가지로, 최남선은 조선이라는 민족에게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부여하는 문화의 정수를 찾고 있었다.

문화론의 재정립은 고대를 민족주의적으로 재해석(재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한 단계였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계고차존」에서 최남선은 고대에 조선이라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단일하고 영속적인 역사의 주체, 즉 ‘민족’으로 정의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난관에 부딪혔다. ‘문화’라는 말을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사회제도를 포괄하는 사회적 범주로 사용할 때, 고대 조선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명백했다. 고대는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들’의 저장소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족’을 안정되고 통일된 실재(reality)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내는 잡음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최남선은 문화에서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특히 종교를 핵심 요소로 선정함으로써 귀찮은 디테일들을 역사의 여백으로 돌리려 했다.

종교를 문화의 핵심 요소를 설정한 것은 비단 과거의 해석에만 유효한 일이 아니었다. 최남선은, 지나 문화, 인도 문화에 의해 그 原義가 소실되고 眞面이 암장되었지만 조선에는 “전 민족을 결합하는 정신적 연쇄로 누천년을 일사관철한” 종교가 있으며, 그 종교는 ‘굳은 세력과 넓은 범위로 현대 우리들의 일상생활상에 활동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용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문화의 최고 표현은 종교인 것이다. 국가를 상실했을 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문화적 통일, 즉 정신적이고 내적인 통일이며 그 핵심에 종교가 있었다. 최남선은 현재의 조선민족을 통합할 원리를 종교정신에서 찾았다.

5. 민족주의 서사의 완성:『朝鮮歷史講話』

1920년대에는 민족의 이야기를 공식적이고 권위 있게 정교화한 통사의 저술이 활발했다. 『조선역사강화』는 최남선의 최초의 통사로서, 그의 역사 연구가 ‘민족사의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발전 단계를 구획하여 평가를 내리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사실의 쓰레기통이 아니며, 년대의 실꾸리가 아니며, 물론 煩碎한 고증과 碎雜한 언행록이 아니다. 일국의 역사는 그 민족·사회·문화의 발전 성립한 내력을 가장 端的하게 요령 있게 인과적으로 표현한 자라야 할 것이다. 각개의 사실에 정당한 위치를 줘서 그것의 整齊한 連鎖가 곧 그 국가·민족·생활·문화의 합리적 전개상이라야 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최남선은, 역사가는 민족(국가)·사회(생활)·문화가 성립하고 발전한 과정을 목표에 맞게, 요구에 맞게, 인과 관계에 맞게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을 무차별하게 모아놓거나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다. 또 사료를 섬세하게 고증하거나 언행을 잡다하게 기록한다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개개의 사건들과 과정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순서를 규정하고, 서열을 결정하여 그것들을 가지런하게 하나의 인과적 사슬로 만들어 보여줘야 하는데, 이는 역사가가 역사의 목적과 전개법칙을 정확히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통사의 기술에서는 역사의 목적과 전개법칙에 대한 역사가의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컨대 안확은 『조선문명사』에서 조선의 정치사는 ‘태고부락시대-상고소분립시대-중고대분립시대-근고귀족정치시대-근세군주독재시대’라는 다섯 시대로 구분된다고 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사회조직, 경제, 문화 及 지리상의 제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평가에 기반한 것인데, 그 인식과 평가는 역사 전개의 “範”에 의거한다. 즉 안확은 서양의 정치형태의 전개를 역사의 규범(範)으로 전제하고 이에 의거해 조선의 정치 발전의 과정을 인식하고 단계를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최중요한 것은 시대구별”이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였다.

『조선역사강화』에서 최남선은 조선사를 상고-중고-근세-최근세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상고는 단군조선에서 후삼국시대까지, 중고는 고려 건국에서 멸망까지, 근세는 조선 건국에서 철종까지, 최근세는 대원군 집권에서 한일합병까지이다. 각 시대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단군에서 통일신라까지는 민족과 문화의 창조기였고, 고려시대는 내부적 병폐와 외부의 이민족에 의해 민족과 문화의 순수성이 파괴된 “국민정신의 쇠퇴”기였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병폐를 이어받아 정치적으로 쇠퇴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립성과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여 국민문화를 발전시킨 시기였다. 『조선역사강화』는 ‘계몽의 역사’의 일반적 플롯을 채용하고 있다.

고대에 대한 기술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군조선에서 통일신라까지를 한 시기로 묶어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단군-부여-고구려를 적통으로 한 서술이 지양되었고 통일신라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조선 사람이 민족으로 하나가 되어서 동일한 국토를 지니고 동일한 언어와 습속을 물려나오기는 통일신라에서 비롯한 것이니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초와 문화의 핵심은 그 끝이 대개 신라에 가서 줄이 닿음을 본다.” 최남선은 통일신라에 “민족통일”이라는 의의를 부여했다.

민족의 ‘자각’이나 ‘통일’은「해상대한사」에서「조선역사강화」까지 상고시대를 구획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는데, 그 시기는 계속 다르게 서술되었다.「해상대한사」에서는 민족이 스스로를 표창한 사건으로 고조선의 건국을 들었다. 그런데「계고차존」에서는 민족적 자각과 국가적 운동은 부여 말에 시작되어 고구려의 건국으로 완성되었다고 했다. “국토와 종족이 자아를 확인”한 것, 즉 “조선의 역사가 비로소 민족적 활동과 국가적 발전을 기재하게” 된 것은 고구려에 의해서이다. 『조선역사강화』에 와서는 통일신라에 의해 비로소 민족·국토·언어·습속의 동일성이 확립되었다고 했다.「계고차존」에서 고구려의 건국에 의해 이룩되었다고 말한 ‘민족통일’의 업적이 시기가 늦춰져 통일신라의 것이 된 것이다.

통일신라까지를 상고시대로 묶은 것은 고대를 민족과 문화의 창조기로 상징화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계고차존」에서는 단군에서 부여시대까지가 상고였다. 문제는, 이 시기에 조선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종족적, 문화적 동일성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계고차존」에서 고대는 정치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 예컨대 의식주, 신앙, 언어, 문학, 풍속 등이 잡종적이고 혼종적인 시기로 나타났다. 최남선은 『조선역사강화』에서 통일신라까지를 상고시기로 묶어버림으로써 과거가 내는 이러한 잡음들을 억압하고 고대의 순수성을 상징화하려 했다. 시대를 다시 구획함으로써, 고대를 조선인이 내부에서 경쟁한 시기,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물리치고 민족을 완성한 시기로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서사를 뒷받침한 것은 문화론이었다.「계고차존」에서 민족통일의 증거로 제시된 것은 국토·종족의 동일성이었는데, 『조선역사강화』에서 민족통일의 증거로 제시된 것은 민족·국토·언어·습속의 동일성이었다. 시대구분의 기준이 좀 더 섬세하게 되었는데, 특히 언어와 습속이 추가된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민족을 정의하는 데 ‘문화’의 동일성이 중요한 조건으로 등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역사강화』에서 문화라는 말은 보통 정치·경제·사회와는 구분되는, 정신적(정서적·지적), 심리적 상징영역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는 물론「조선역사통속강화」와 그 이후 심화된 문화 이론과 문화사 연구의 결과였다.

6. 민족주의적 문화사의 아포리아

1920년대에 최남선은 고대에 이미 ‘민족’이 안정되고 통일된 실재로 성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까지 ‘민족적 자각’ 혹은 ‘민족’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진단하고 있었다. 최남선은「조선역사통속강화」에서 ‘민족적 자각을 유발하고 진실한 자조심을 조장하고 확실한 자주력을 수립하기 위해’ 역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동명』의 발행사에서는 ‘조선인은 최근에야 민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민족적 자각, 민족적 의식”은 “반만년 역사의 전체적 收結”이며 “양천만 민중의 天啓的 混一”에 의해 얻은 것이다. “현하 조선인의 직무”는 “최근에 이르러 새삼스럽게「발견된 민족」을「일심일치」로「완성」하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최남선은 조선민족이 이미 충분히 각성되어 있는지 아니면 민족의식이 더욱 각성되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지에 대해 입장이 불분명했다. 최남선은 조선 민족에게는 여전히 민족의식이 부족하다고 진단하는 한편, 조선인은 고대에 이미 민족으로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최남선에게 민족은 역사의 기원이자 목표였다. 즉 민족은 다른 모든 것들의 기원으로, 그 의미들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의미들이 꾸준히 행진하고 있거나 행진해야할 목표였다. 최남선은 판단의 기로에서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서사의 균열은, 두아라의 분석에 따르면, 민족의 영속적 성격과 민족의 목적인(因)인 근대성 사이의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몽의 역사’는 근대성의 추구가 지니는 역동적 성격을 읽어내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원초적 주체의 회복과 본질화 전략을 통해 현재를 과거와 재결합시키는 역방향의 프로젝트와도 관련이 있다. 한편에서, 근대적으로 진화해가는 민족적 주체를 창조하려는 프로젝트는 낡은 족쇄의 분쇄, 새로운 것의 찬양, 역동적 성격,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에서, 역방향의 프로젝트는 고래로부터 존재했던 민족의 격세유전과 영속성을 찬양한다. 두아라는, ‘민족’을 통해 과거와 현재 간의 아포리아를 해결하려는 ‘역사’의 노력은 민족주의 정치학에 연루된 서사 내에 균열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있다.

최남선이 1900년대에서 1920년대에 걸쳐 전개한 역사 담론에서 ‘문화’와 서사를 변화시킨 것은 민족주의적 역사의 균열과 틈을 봉합하기 위해서였다. 최남선은 고대사를 계속 다시 쓰면서 고대를 부여까지에서 통일신라까지로 연장했다. 또 그는 ‘문화’를 인간의 정신적·물질적 생활과 관련된 모든 사회제도를 포괄하는 범주에서 종교에 중심을 둔, 정신생활의 표현 양식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문화사는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종합사적, 보편사적 연구에서 점차 그 범위가 좁혀졌다. 시대구분을 변경한 일은 단순히 기준을 섬세하게 하거나 자료들을 타당하게 조직화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다. 또 ‘문화’의 갱신도 문화에 대한 이론을 심화해 간 과정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장치들은 고대를 민족주의적으로 전유하는(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억압과 모순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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