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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대학 제도와 전통 문론의 근대적 향방 ― 경사대학당과 북경대학의 ‘중국문학’
근대 중국의 대학 제도와 전통 문론의 근대적 향방 ― 경사대학당과 북경대학의 ‘중국문학’
  • 류준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 승인 2006.08.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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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동아시아 근대지식의 형성에서 문학과 매체의 역할과 성격>( 2006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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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유신변법”의 일환으로 淸 조정은 교육제도 개혁에 나섰다. 『籌議京師大學堂』은 總理衙門이 작성한 근대적 대학 건립에 대한 규정이었다(莊吉發, 8). 康有爲를 대신해서 梁啓超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籌議』는 제 1장 “總綱”, 제 2장 “學堂功課例” 등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2장에는 교육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모든 학생들이 학습해야 하는 “溥通學”과 학생 개인이 각자 전공으로 삼는 “專門學”으로 나누어졌다. 3년 간에 걸쳐 배우는 보통학 과정은 모두 10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經學 ② 理學 ③ 中外掌故 ④ 諸子學 ⑤ 逐級算學 ⑥ 初級格致學 ⑦ 初級政治學 ⑧ 初級地理學 ⑨ 文學 ⑩ 體操學. 이 다음 과정이 專門學인데, ‘高等算學’, ‘高等格致學’ 등 10개 전공 분야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 과정으로 보건대, 양계초의 『籌議京師大學堂』의 교육 목표는 서구적 실용 지식을 익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서구 학문 가운데서도 인문학 분야는 배제하고 실용적 지식 습득을 지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 교육과정의 체계는 다소 혼란스럽다. 전문학 분야의 상대적 명확성에 비할 때, 보통학 분야가 특히 그렇다. 전통 학문의 중핵을 이루는 경학과 리학 그리고 제자학이 산학, 정치학, 지리학 등과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전통 학문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궁극적 목표가 실용적 西學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중국의 전통 학문과 지식은 서학으로 나아가기 위해 입구 혹은 교량 역할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籌議京師大學堂』에서 가장 기이한 대목은 보통학의 한 영역인 ⑨ 文學의 존재다. 그 배열 순서에서 보더라도 오늘날의 체육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체조학의 바로 앞에 놓여 있다. ⑧까지의 지식에 비해 그 의의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하겠다. 『籌議京師大學堂』에서는 직접적으로 ‘文學’의 함의가 무엇인지 규정해 놓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한 해 전인 1897년에 양계초가 작성한 두 편의 글을 통해 文學의 실질적 함의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湖南時務學堂學約>이고 다른 하나는 <萬木草堂小學學記>이다(陳國球, 7-8). <湖南時務學堂學約>에는 10개의 항목, <萬木草堂 小學學記>에는 8개의 항목이 제시되어 있어 다소간의 출입은 있지만, “立志” “養心” “讀書” “窮理” “經世” “傳敎” 등은 공통 항목이다. 거기에 “學文” 또한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文을 학습한다’는 이 항목을 통해 ‘문학’의 의미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湖南 時務學堂 學約>에서 “言之無文, 行之不遠”과 “辭達而已矣”라는 공자의 말을 제시하면서, 學文의 필요성은 그 실용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文을 익힘에는 굳이 공교로움을 추구해선 안 된다고 한다(“不必求工”). 천하의 계몽을 자신의 임무로 하는 學者에게 文은 지식 전파의 방편이라는 점에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文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學者以覺天下爲任, 則文未能舍棄也.”). 지식과 계몽에 중심을 둔 양계초에게 文은 學의 보조수단일 뿐이지, 學과 대등하게 취급될 수 없다. <萬木草堂 小學學記>에서 “詞章은 學問이 아니다”(詞章不能謂之學也)고 강하게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文=詞章의 실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文은 학문(지식)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學文은 作文 즉 실제적 글쓰기의 의미라 하겠다.

作文 곧 詞章을 학문에 미달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저급한 학문으로 규정하는 이런 인식틀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굳이 文以載道論까지 가지 않아도, 淸 중엽 이래 ‘義理, 考據, 詞章’ 학문 3분설을 통해 詞章은 末葉에 불과하다는 인식(戴震)은 학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심지어 문장가로 자처한 姚鼐 같은 인물들조차 학문의 세 영역에서 詞章의 의의가 가장 낮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余英時, 270-281). 양계초의 스승 강유위는 ‘의리’ ‘고거’ ‘경세’ ‘문자’ 등 학문 영역을 넷으로 나누어, 經世致用을 강조한 인물답게 경세학을 첨가하였고, 西學의 수용을 위해 ‘외국언어문자학’을 文字學의 하위 항목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이러한 강유위였음에도 (中國)詞章學은 버리지 않고 문자학의 또 다른 항목으로 설정했다. 『籌議京師大學堂』의 보통학 영역에 외국언어 학습이 포함된 것은 강유위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籌議京師大學堂』의 ‘문학’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인식 방법에서 그리 멀리 벗어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학문과 작문, 지식과 창작의 관계에서 학문(지식)이 늘 규범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詞章을 학문의 일종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했다는 데서 양계초의 절박성을 더 심각하게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강유위가 문자학에 함께 포함시켰던 사장학과 외국언어문자학을 다시 나누어 구분함으로써, 양계초는 스승 강유위의 발상에서 더 급진적으로 나아갔다. 학자와 문인의 사회적 위상을 이념적으로는 동일한 층위에 두었던 문화적 관습을 혁신하기 위해서, 『籌議京師大學堂』에서는 학자[學]와 문인[文]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해야만 했다. 그럴 때야만이 근대적 지식을 전수하고 근대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제도로서 경사대학당의 위상이 명확해 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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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籌議京師大學堂』을 통해 드러난 양계초 식의 교육 제도와 지식 체제 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文 즉 전통적 詞章으로 회수되지 않을 새로운 글쓰기의 규범이 확립되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전통적 詞章學의 해소를 가져다 줄 어문 질서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려면 신문화운동의 발흥까지 약 20년의 시간이 더 요구되었다. 胡適을 중심으로 ‘문학의 혁신’이 주창되었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 백화문의 발견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발견을 의미하였다. 詞章學의 전통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글쓰기 규범―근대적 문학 규범의 창출은 학자와 문인의 사회적 구별을 보장하는 문화적 제도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이 창출되기 전에 文=詞章의 전통 혁신은 힘들다. 의화단 사건 이후 경사대학당의 재건 과정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1902년 경사대학당 재건의 책임자로 임명된 張百熙는 吳汝綸을 경사대학당 총교습으로 초빙한다. 이후 일본 시찰 및 내외 사정의 검토를 거쳐 새로운 학제가『欽定京師大學堂章程』로 공포되었다. 무술변법 시기의 『籌議京師大學堂』보다는 “忠愛”에 대한 강조가 두드려졌음에도, 『欽定京師大學堂章程』의 기본 방향은 실용적 지식의 교육에 놓여 있었다. 조정 내외에서 보수파들의 반발에 직면한 장백희는 張之洞을 책임자로 추천하여 교육제도의 구상을 재정비하라고 요청한다. 1904년 얼마간의 연구를 거쳐 장지동은 『奏定大學堂章程』을 제안하였다. 이 두 章程을 통해 청말민국초 교육제도의 기본 구상이 완료되었다.

청의 대학제도 구상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바가 컸다. 『欽定京師大學堂章程』은 “일본의 사례를 본떠서”, ‘政治科, 文學科, 格致科, 農業科, 工藝科, 商務科, 醫術科’ 등 7개의 분과로 학문 영역을 구분하였다. 일본 제국대학의 학제를 모방했다고는 하지만, 文學科를 두 번째 영역에 위치시킨 점에서 그 차이 또한 적지 않다. 이 문학과는 ‘경학, 사학, 이학, 제자학, 장고학, 詞章學, 외국어언문자학’ 등 7개의 하위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文學科가 실제로는 西學(用)에 대비되는 中學(體)을 함의한다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장지동의 『奏定大學堂章程』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과의 하위 항목이었던 經學을 상위 항목으로 격상시켰다. 그 결과, ‘경학과대학, 정법과대학, 문학과대학, 의과대학, 격치과대학, 농과대학, 공과대학, 상과대학’ 등 모두 8개의 분과대학이 마련되었다. 더군다나 경학과대학은 제 1위의 자리에 해당하는 바, 서구의 실용적 지식을 지향하던 변법 시기의 발상법은 中學=中體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적잖은 절충을 겪었다.

『欽定京師大學堂章程』에서 文學科 안에 있던 경학(및 관련 영역)이 경학과대학으로 독립함으로써, 『奏定大學堂章程』의 문학과대학에는 ‘사학, 사장학, 외국어언문자학’ 세 영역이 남게 되었다. 이 영역은 약간의 출입을 거쳐 모두 9개의 하위 영역으로 재조정된다: ‘중국사학, 만국사학, 중외지리학, 중국문학, 영국문학, 法國문학, 俄國문학, 德國문학, 日本문학.’ 사학, 지리학, 문학이 문학과대학을 구성하는 학문영역이었다. 『欽定京師大學堂章程』에서는 ‘문학과’가 中學의 전통을 두루 포괄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던 반면에, 『奏定大學堂章程』에서는 ‘경학과대학’이 설정됨으로써 문학과대학은 그 함의가 흔들렸다. 다만 사학과 외국어언문자학이 사학과 외국어문학 분야로 재배열됨에 따라, ‘중국문학’은 詞章學 영역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위치가 되고 말았다.

‘중국문학’이라는 학문 영역은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학 제도 속에 하나의 지식 분야로 자리잡았다. 『奏定大學堂章程』의 규정에 따르면 ‘중국문학(문)’에서는 모두 16개 과목을 이수해야만 했는데, 그 중심 과목은 모두 7개였다: ① 文學硏究法 ② 說文學 ③ 音韻學 ④ 歷代文章流別 ⑤ 古人論文要言 ⑥ 周秦至今文章名家 ⑦ 周秦傳記雜史 周秦諸子. ①이 入門이자 總綱이라면, 文章을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字에 대한 학습이 ②와 ③이다. 그 다음의 과목은 대체로 文章에 대한 학습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과목 편성을 통해 ‘중국문학’ 분야가 詞章 전통의 계승에 초점을 맞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陳平原(2002), 112-113).

근대화 운동 과정에서 詞章의 전통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대학제도의 설립 과정에서 그 영역을 분명하게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문제를 정치적 이념으로 단순하게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가피한 귀결이었기 때문이었다. 詞章은 분명 문인의 창작 차원에서 접근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규범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습득하는 일이었다. 『欽定章程』에는 대학 이전의 초중등학교의 교육 과정에 대해서도 제안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聯句成文”을 익히는 “作文”과 전통 시문을 읽는 “讀古文詞” 과정이 교육과정에 단계별로 설정되어 있다. 『奏定章程』도 마찬가지로서, ‘중국 문자’와 ‘중국문학’을 통해 “作文之法”을 배우는 과정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즉 詞章이란 독서및 작문 교육과 등치되는 것이었기에 실질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고, 이에 따라 쉽게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 사장학의 폐기나 혁신은 결국 근대적 어문 규범의 확립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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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제도의 근대적 개혁과 관련된 3개의 章程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대학 기구와 제도가 곧장 정착될 수는 없는 법이다. 『중국문학사』의 저자로 유명한 林傳甲이 1904년 엄복의 추천과 장백희의 초빙으로 경사대학당 교습에 임명되었을 때, 章程의 계획과는 달리 분과대학은 아직 설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학당에는 “예비과”와 부설 “仕學館” “師範館”이 운영되고 있었다. 임전갑은 사범관의 ‘국문’ 교습을 담당하였다. 당시 사범관은 전공 영역에 해당하는 ‘分類科’ 이전의 公共科(1년), 분류과(3년), 加習科(졸업생 가운데 희망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공과에는 8개의 분야가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문학’이었다. 공공과에서 익히는 중국문학은 “역대 문장의 원류와 의법을 강의하고, 또 각체의 문장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분류과의 3년 과정에서도 중국문학과는 “練習各體文”을 교육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요컨대 중국문학이란 곧 詞章이었다.

임전갑의 『중국문학사』는 경사대학당의 ‘국문강의’의 강의안이었다. 임전갑의 강의는 사범관의 분류과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범관의 규정을 넘어 경사대학당의 교육과정 전체를 참고하면서 이루어졌다. 임전갑의 실제 담당 강의는 분류과의 “練習各體文”이었지만, 공공과 중국문학과의 “講歷代文章源流義法”도 함께 다루었고, 문학과대학의 中國文學門의 교과목에 제시된 지침을 원용했다. 단적으로, ‘역대문장유별’ 과목 설명 ― ‘일본의 『중국문학사』를 본떠서 강의해도 된다’는 내용, 그리고 ‘문학연구법’ 과목의 강의 지침인 ‘硏究文學之要義’ 41조에 근거해서 강의안을 작성했다(陳國球, 49).

1910년 『중국문학사』라는 표제로 출간된 이 강의안은 훗날의 문학사가들에게 적잖은 비판을 당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임전갑의 강의안은 사범관 분류과의 영역을 벗어나 이질적인 교과 내용을 다 포함시키려 한 결과였다. 문학과대학의 교육과정을 지침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역대문장유별’을 참조하였고, 그 결과 『중국문학사』라는 체제를 띠고 말았다. 또 ‘문학연구법’에 대한 지침을 따름으로써, 사범관의 국문강의가 문학과대학의 ‘중국문학’ 강의와 유사해져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임전갑의 중국문학사 서술은 자신이 담당한 강의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생겨난 변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범관의 국문강의가 ‘문장의 원류와 의법’ 및 ‘각체 문장의 연습’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詞章의 전통으로 수렴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1905년 약 1년간의 경사대학당 강의를 마치고 임전갑은 경사대학당을 떠났다. 얼마간의 錯綜으로 인해 등장하였지만, ‘문학연구법’이라는 교과목의 지침 ‘硏究文學之要義’와, 일본의 『중국문학사』를 모델로 제시한 교과목 ‘역대문장유별’이 임전갑의 『중국문학사』서술에 주된 근거로 작용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결정적인 변별을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감상과 창작을 중심으로 하는 詞章의 전통이 문학사라는 지식으로 이행하는 이정표로서 임전갑의 『중국문학사』를 기억하기엔 충분해 보인다. 『奏定大學堂章程』은 詞章의 전통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대학당 안에서는 실제 시문의 창작을 훈련시켜서는 안 된다고 명문화해 놓았다. 詞章을 문인의 창작에서부터 독립시켜 지식(학자의 학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산물이 문학사 서술이었다. ‘역대문장유별’은 곧 사장 전통 내부의 문학사 지식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奏定大學堂章程』에 이미 등장할뿐더러 임전갑 스스로도 밝혀놓은 바, 『중국문학사』는 笹川種郞의 『지나문학사』의 체제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1898년에 간행된 『지나문학사』는 1904년 『歷朝文學史』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임전갑의 문학사 서술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짙다. 그렇지만 표면적 영향 관계와는 달리 두 문학사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笹川種郞의 『지나문학사』는 Taine의 『영국문학사』를 좇아 ‘지역, 인종, 환경’의 3대 요소를 가지고 중국문학의 특질을 해명하려고 한 저술이다. 동일한 문학사 인식에 근거한 최초의『일본문학사』(1890)가 등장한 이래 국민국가 수립과 더불어 ‘국어’와 ‘민족’의 독자성에 근거한 자국문학사 서술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전통 한학이 지나학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笹川種郞의 『지나문학사』가 등장하였다.

『일본문학사』류의 자국문학사 서술은 기본적으로 ‘민족어’ 혹은 ‘국어’에 근거한 문학과 한문문학의 이항 대립적 구조로 구성된다. 이에 따라 정통 한문학보다는 국어와 국문 표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민족어문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 희곡, 가요 등 민족어문학의 의의가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笹川種郞의 『지나문학사』 또한 비록 중국문학사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문학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소설, 희곡 등의 문체에 주목하였다. 바로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笹川種郞의 『지나문학사』는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간행된 문학사류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戴燕, 175-6; 陳國球, 51-2). 그러나, 임전갑 스스로도 『중국문학사』에 밝혀 놓았듯이, 소설과 희곡 등은 풍속사 서술의 자료는 될지언정 문학사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저급하다는 시각이 경사대학당의 지배적 풍조였다. 그런 점에서 『지나문학사』가 『중국문학사』가 藍本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임전갑의 『중국문학사』모델은 『지나문학사』가 아니라, 『奏定大學堂章程』의 교육과정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임전갑의 『중국문학사』는 모두 1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16장의 제목은, 41개 조로 구성된 ‘硏究文學之要義’의 앞 부분 16개 조목과 그대로 부합한다. 비록 ‘硏究文學之要義’는 ‘문학연구법’이라는 과목의 강의 지침이지만, ‘문학연구법’은 中國文學門 전체의 總綱에 해당한다. 그 16개 조목을 준수하면서 작성한 내용이 그대로 『중국문학사』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중국문학사』의 기본 모델은 ‘硏究文學之要義’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要義는 일본에서의 문학사 서술과는 달리 전통 詞章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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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대학당의 강의안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임전갑의 『중국문학사』는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다소간 돌출적인 인상이다. 최초의 문학사를 해명하는 작업에서는 늘 거론되기는 하지만, 임전갑이나 『중국문학사』가 지속적인 참조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임전갑의 이직 직후인 1906년 경사대학당의 경학 및 경문과 교원으로 임용되어 1913년 물러난 林紓의 존재는 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번역가로 활동하던 임서가 경사대학당 임용과 더불어 당시 저명한 동성파 고문가 馬其昶의 찬사를 듣는다. 1907년 『중학국문독본』10권을 편집하고, 1910년에는 자신의 古文 문집 『畏廬文集』도 간행한다 (陳平原, 119-120). 이 과정에서 임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문가로서의 입지를 확립하였다. 그러다가 이른바 대학 내부의 文派 대립 와중에 강단을 떠난다.

임서는 당시 대학당 교장이었던 何燏時가 자신과 姚永槪 등 고문파를 배척하고 同鄕의 사람들을 임용하려고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바로 章太炎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장태염은 하율시가 흠모하던 학자였다. 신해혁명 이후 하율시가 장태염을 북경대학으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장태염은 자신의 제자와 후배들을 대신 추천하였다(陳以愛, 2-12). 黃侃과 劉師培가 북경대 강단에 서면서, 종국에는 동성파 계통의 마기창, 임서, 요영개, 요영박 등이 북경대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동성파 고문가들이 북경대에서 밀려나고 있을 때, 대학의 교과과정도 변화가 있었다. 1913년 교육부가 반포한 대학규정에 따르면, 중국문학 분야에서는 ‘문학연구법, 사장학, 중국문학사, 희랍로마문학사, 근세유럽문학사’ 등을 강수하게끔 되어 있었다(陳平原, 123). 동성파의 몰락과 더불어 전반적으로 사장의 전통이 쇠퇴하고 반대로 문학사류의 강의가 확대되었다. 동성파에 대립되던 이른바 ‘選派’는 황간과 유사배로 대표되었다. 이들에 의해 당송고문을 중심으로 이해되던 사장학적인 문학사 이해가 비판되었다. 황간의 『文心雕龍札記』나 유사배의 『中古文學史講義』는 북경대 강의에 기반을 둔 저술이었다.

유사배의 문론과 문학사 인식은 북경대 시절 이전부터 널리 알려진 터였다. 阮元의 문론을 계승하는 방식으로 동성파의 고문론을 비판하였고, 그 견해가 문학사 강의를 통해 훨씬 정밀해 졌다. 황간 또한 비슷한 입장으로, 1914-1919년 사이에 진행된 『문심조룡』 관련 강의는 동성파 고문론에 대한 논쟁적 성격이 뚜렷하였다. ‘文以載道論’을 비판하고 위진남북조 시대를 모르는 고문가의 협소한 시각을 비난하였다(陳平原(2002), 126-7). 1917년 姚永樸이 떠나고 周作人, 호적, 吳梅, 劉半農 등이 북경대로 부임하기까지, 동성파의 당송고문 정통론에 맞서서 황간과 유사배는 위진시대 중심의 문학사 이해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이 단계는 이전 시기 詞章 전통 중심의 문학 이해로부터 근대적 문학연구가 본격적으로 발흥하기 시작하는 신문화운동 시기를 이어주는 과도기로 보인다. 황간과 유사배로 대표되듯, 이 시기 북경대의 중국문학연구는 동성파의 문론과 선파의 문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여기다가 이런 구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는 장태염까지 포함한다면, 이 시기의 핵심적 논란은 전통 문론이 근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논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10년 장태염은 당대 왕성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嚴復과 임서의 문장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엄복과 임서는 번역가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그 번역 문체를 고문적 전통을 통해 획득하였다. 이에 대해 장태염은 엄복과 임서의 문장이 저급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청대 戴震 이래 漢學家들의 사장학(동성파 고문) 폄하는 지속되었던바, 청대 학술 전통의 계승자로 자처한 ‘국학대사’ 장태염에게 동성파류의 문론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1906년 『국수학보』를 통해 발표한 <文學論略>을 통해 자신의 문론을 천명할 때에조차 당송고문파의 문론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터였다. <文學論略>을 수정하여 1910년에 간행된 『國故論衡』에 포함시킨 <文學總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장태염의 문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의의가 크다. 무엇보다 詞章의 전통 속에서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달리, 전통 학술의 입장에서 문학을 파악하는 시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인이 아니라 학자의 입장에서 문(학)의 함의를 해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아울러, 근대적 문학 관념과의 대결 의식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美’ ‘藝’ ‘情’ 등의 용어로 상징되는 근대적 문예론과 전통 문론의 관련성을 문제시했다. 끝으로 전통 문론 내부의 논쟁적 경향을 포착하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황간과 유사배를 장태염이 비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둘의 문(학)론이 장태염과 동질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유사배와 장태염 사이에는 文의 함의를 둘러싼 논쟁도 있었던 터였다.

장태염이 자신의 문론을 전개하면서 비판의 대상으로 선택한 대표적 경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文選 序』의 소명태자―<文言說>의 완원―유사배’로 이어지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學說[學問]과 文辭[藝術]를 분리하려는’ 경향이었다. 전자가 전통 문론 내부의 논쟁적 대상이라면 후자는 전통 문론 외부의 논쟁 상대 ―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적 문예론이었다.

전자의 논리에 맞서서 장태염은, 그 입론의 근거로 활용하는 󰡔文心雕龍․總術󰡕의 “無韻者筆也, 有韻者文也”―문과 필의 구분법 및 蕭統의 「文選․序」의 “沈思翰藻”론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阮元의 <文言說>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고 반박하였다. 장태염이 반박하는 이 입장은 文의 함의를 韻 혹은 偶로서 이해하는 것이었고, 騈文을 문장의 正宗으로 인정하는 논리와 연결되었다. 후자의 논리에 대해서, 장태염은 “학설은 사람의 思想을 계발하고 文辭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인다”(學說在開人之思想, 文辭在動人之感情)는 주장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견해는 전근대적 전통에서 ‘문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여 자립하지 못하고 여타의 학술․학문 체계에 포함되었다는 비판을 내포한다. 그렇지만, 장태염에게 이런 시각은 전통 文 관념이 어떤 체계를 이루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한 무지의 소산일 뿐이었다.

<文學論略>에서 장태염은, 文을 ‘有句讀文/無句讀文’으로 대별한 다음에, 有句讀文을 다시 ‘有韻文/無韻文’으로, 無韻文을 ‘學說․歷史․公牘․典章․雜文․小說’의 여섯 항목으로 구분하였다. 물론 각각의 항목에는 또 다양한 세부 항목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각 항목별 관계이다. 이런 시각에서 장태염이 제시한 핵심 요지는, ‘典章의 書志’와 ‘學說의 疏證’은 有句讀文․無句讀文의 구별 없이 모든 부문에 관여하는 성격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즉 “각종 正史에 기록된 志나 󰡔通典󰡕․󰡔通考󰡕의 부류”(正史各志及󰡔通典󰡕․󰡔通考󰡕之屬)인 典章의 書志와, “글의 진행을 따라 그 뜻을 풀이하거나 옛것을 고증하는 부류”(凡隨文解義及著書考古)인 學說의 疏證은 다른 부류의 文辭에서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성향으로 규정된다.

학술과 文辭를 구분하려는 당시의 시도에 대응해서, 장태염은 “雜文과 小說”은 다른 영역에 관여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그것만을 기준으로 모든 文의 성격을 규정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文의 전체 질서나 체계를 알고 그 항목별․영역별 관계를 인식해야 올바르다는 뜻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장태염이 제시한 文의 분류 체계와 전체 구도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이 바로 書志와 疏證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다른 항목들과는 달리 書志와 疏證은 文 전체에 관여하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小說은 小說에만 해당될 뿐 다른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에 小說만 알아서는 다른 영역과 구별되는 小說적 글쓰기의 본래 면목에 육박할 수 없지만, 書志와 疏證을 알아 그것이 관여하는 여러 영역들을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文의 경계이자 전체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태염에게 書志와 疏證은 文의 실질성을 증명하는 근거이자 文의 체계를 이해하는 관건인 것이다.

學說과 文辭를 思想과 感情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논리에 장태염이 반발한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장태염의 문론은 결국 學術과 文辭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장태염이 주장하는 요지란, 文이란 文字를 기준으로 이해해야 하고, 文의 전체적 체계를 인식하고 그 각 분류 항목간 관계를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거니와, 이를 위해 필요한 최소 자질 혹은 방편이 書志와 疏證 ― 학술적 능력이라는 말이다. 장태염 자신의 文 체계가 정립되자, ‘어떻게 쓸 것인가’ 혹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장태염은 무엇보다 文의 체재와 軌則을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답하였다. 그것은 文의 전체 질서와 체계를 안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書志와 疏證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결국 장태염에게는, 무슨 글을 어떻게 쓰든지 규범이 앞서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이 당시 장태염 문(학)론의 요체는, “文字가 대나무나 비단에 새겨졌기에 그것을 일러 文이라 하고, 그 법식을 논하는 것을 문학이라 한다.”(以有文字, 著於竹帛, 故謂之文, 論其法式, 謂之文學)는 진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장태염에게 ‘문학’이란 文의 법식을 고구하는 학문이다. 그 법식이란 文의 체제와 규범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경사대학당에서 詞章(學)의 전통이 作文의 본래적 기능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지식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고 했던 혼란과는 달리, 장태염은 漢學의 전통에 서서 당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학술(지식)이 문장을 규제하는 방식이었다. 실제 작문과 창작은 법식의 틀 내에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근대적 의미의 문학 또한 전통적 ‘잡문’과 ‘소설’의 틀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전통 문론의 근대적 대응 방식에 관한 유력한 참조 사례를 제출하였다.

5

장태염의 문론이 지닌 선구적 의의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설, 희곡, 가요 등 비정통의 문학에 정통성을 부여하면서 재편된 근대적 문학연구의 흐름 속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새롭게 대거 등장한 중국문학 연구자들은 전통적인 詞章學과 漢學과는 스스로를 구별짓고자 하였다. 백화문학을 위시한 신문화운동의 전개 과정 속에서, 전통적 문학론은 입지를 차츰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요영박의 『문학연구법』, 임서의 『春覺齋論文』, 황간의 『문심조룡찰기』, 유사배의『중고문학사강의』등의 성과에 이어,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그 뒤를 이었다.

문파지쟁을 거치면서 북경대학 ‘중국문학문’의 교원들이 대폭 교체되었다. 특히 蔡元培가 북경대 총장으로 부임한 시기를 전후하여, 주작인, 호적, 희곡연구로 유명한 오매, 속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유반농 등이 강단에 섰다. 이후로 북경대학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선도적으로 진행하였다. 1918년 당시 중국문학과에는 유사배, 황간, 朱希祖, 錢玄同, 주작인, 오매, 黃節 등이 강의를 담당하고 있었고, 새로운 대상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주작인의 『歐洲文學史』와 魯迅의 『중국소설사략』, 호적의 『백화문학사』, 오매의 『중국희곡개론』등이 간행되었다(진평원(2002), 131; 陳以愛, 5-7).

이 가운데 특히 호적의 『백화문학사』는 ‘문학적 근대’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논리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적의 문학연구는 기본적으로 백화문운동에서 제기한 백화문학론에 의해 규정된다. 백화문학론이란, 백화문학과 진화론을 두 축으로 삼아, 중국문학은 死文學(古文傳統)과 活文學(白話傳統)의 “雙線” 구조로 전개되어온 바 백화문학에 의해 일원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문학사관에 입각하여 미완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문학사로 서술한 결과물이 『백화문학사』였다. 1928년에 간행된 호적의 『백화문학사』는 이전 10년간 자신이 제기한 백화문학론의 정리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민문학을 이념형으로 삼아 실증주의적 방법론과 진화론적 역사인식이 혼재된 저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백화문학사』는 분명 신문화운동의 뚜렷한 결실이다(陳平原(1998), 193-202; 徐雁平, 160-162).

191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신문화운동의 주된 세력은, 북경대학을 근거지로 삼고 잡지 『신청년』을 중심 매체로 하였다. 이들 집단의 성향은 복잡다기하지만 크게 보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호적과 전현동을 중심으로 진독수, 유반농, 傅斯年 등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客員”으로서 주변을 형성한 노신과 주작인으로 대표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호적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호적에 따르면, 그 당시 중심 이론은 “活的文學”과 “人的文學”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다.
“活的文學”은 기본적으로 언문일치를 지향하면서 문언과 백화의 대립 구도를 방법적 전략으로 선택했다. 아울러 동성파와 장태염, 유사배와 황간 등의 選派를 굳이 구별하지 않고 동질적으로 이해했다. 전현동의 유명한 말, “桐城謬種, 選學妖孼”이 그러한 사정을 잘 표현하였다. “人的文學”은 주작인이 주장한 논리였고, 1920년대 성립된 ‘文學硏究會’의 설립 취지로 이어졌다. 백화문학론적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도 않았다.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공리적 발상에 반대하는 노선에 가까웠다. 이 입장은 文言의 전통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1932년 간행한 『中國新文學的源流』에서 주작인은 백화문학을 목적지로 설정한 『백화문학사』와는 달리, 중국문학사를 ‘載道/言志’의 순환적 교체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동성파 고문이나 팔고문은 載道의 문학으로, 백화에 근거한 문학혁명은 명대 公安派를 잇는 言志의 문학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서 문언/백화의 대립구도는 찾을 수 없다.

이후에 주작인은 명말 소품문보다 六朝文을 言志의 본령으로 더 존숭한다. 그런 점에서 ‘완원―유사배’로 이어지는 選學의 계통이 주작인에게서 부활한다는 견해도 그럴 듯해 보인다(陳平原(1998), 375-393; 王風, 30-31). 그렇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자체에 주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계승 관계를 구도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완원―유사배’의 문론의 실질적 의미를 음미해 보자면, 주작인이 그 맥락을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주작인은 주로 산문 글쓰기에 주안점을 두고 六朝文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완원―유사배’ 문론의 핵심적 내포는 ‘文에 대한 자의식’ 혹은 ‘文에 대한 자각’에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작인이 아니라 노신의 문제의식이 ‘완원―유사배’ 문론과 가깝다고 판단된다.

󰡔國粹學報󰡕 1호에 발표한 글 가운데 「文章源始」(1905)에서 劉師培는 文 관념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하였다. 그 기본 입장은 阮元의 「文言說」을 따르는 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유사배는 「文言說」을 근거로 삼아, 文이란 말 속에 있기도 하고 글 속에 있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유사배가 말하는 文이란 언어 내부의 자질이나 속성이 된다. 이것을 劉師培는 “飾”이라 하였다. 유사배는 修飾을 근거로 文의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물론 그 수식이란 韻과 偶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유사배에 의해 계승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 문제는 소명―완원―유사배의 전통 내부에서 발견된다. 유사배는 완원의 「文言說」을 계승하는 한편 수정도 가하면서, 완원의 논리를 儷詞․韻語로 한정하고 彣彰이라는 개념으로 귀결시켰다. 그렇지만, 阮元의 「文言說」에는 劉師培의 논리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문제성이 포함되어 있다. 「文言說」의 한 대목: “① 반드시 말(詞)은 적게 하고 그 음을 음률에 맞추어 말에 꾸밈을 가함으로써 사람들이 기억․암송하기 쉽게 하여 ② 내용을 더하거나 고침이 없게 하고자 한 것이다. ③ 또한 사투리나 속어가 그 사이에 뒤섞이지 않게 하여 ④ 의미를 전달하고 행해짐이 멀리 이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⑤ 이것이 孔子께서 󰡔易󰡕에 「文言傳」이라는 편을 지은 까닭이다.” 阮元은 ①과 ③의 언어체적 특성은 각각 ②와 ④라는 의도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고 하였다. 유사배가 ①과 ③의 의미를 계승한 것은 분명하지만 ②와 ④의 함의까지도 적극 수용하지는 못했다.
‘文(學)에 대한 자각’이라는 노신의 말로 바꾸어 보자면, ②와 ④로 인해 ①과 ③이 내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文의 의미라는 뜻이다. ②와 ④가 ①과 ③처럼 언어의 내적 특성으로 내재화되기 위해서는, 文에 대한 자각 혹은 文에 대한 자의식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문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阮元의 「文言傳」에서 제시되는 공자란 文人이다. 공자가 「文言傳」을 儷詞와 韻을 활용하여 쓴 것은 곧 文에 대한 자각과 자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완원 문론에 대한 관심은 노신의 문학사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1920년대 중반 厦門大와 中山大에서 진행한 ‘중국문학사’ 강의의 강의안인 『한문학사강요』는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自文字至文章”에서 文의 함의를 다루었다. 거기서 노신이 인용한 텍스트는, 완원의 <문언설>을 포함해서 위진남북조 시대 文 개념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텍스트를 주로 원용하는 맥락은 韻의 유무에 따른 ‘文筆之辨’에 있다. 문필의 구분에서 중요한 점은 文과 筆의 실질적 함의가 무엇인가에 있다기보다는, 언어 표현 내부에 이질성이 발생한다는 역사적 맥락이다. ‘자각’의 함의는 이러한 내적 변별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해된다.

1920년 북경대 ‘중국소설사’ 강의의 강의안인 『중국소설사략』에서 ‘唐의 傳奇’를 다루는 대목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당 전기에 대한 노신의 평가는 “의식적인 창작”에 있었다. 당 전기의 역사적 의미를 “作意”에서 찾을 때, 그 의의는 史로부터의 분리에 있었다. 송대에 『新唐書』가 편찬될 때, 그 이전까지는 ‘史部 雜傳類’에 속해 있어서 여타의 傳記와 같은 범주에 포함되던 ‘志神怪者’가 小說로 격하되어 마침내 史部에는 귀신이나 선인의 이야기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 전기의 ‘의식적 창작’이란 史傳의 일부로 존재하던 志怪가 자각적 변모를 거쳤다는 뜻이다. 그 의식성은 史實에서 幻設로의 전환 과정이기도 하였다.

史로부터 벗어난 傳奇의 츨현은 다른 한편으로 한유와 유종원의 고상한 고문 문장과도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들의 寓言 문장이 幻設[허구]의 기법을 원용하는 경우에조차도 傳奇와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그 핵심은 ‘修辭’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의 전기 또한 ‘문(학)의 자각’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필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사실과 환설’ 혹은 ‘역사와 전기’의 자각적 구분이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史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역대로 문예를 논단하는 것 역시 본래부터 사관의 소임이었기 때문”인데, 『중국소설사략』의 첫 장이 ‘史家의 소설에 대한 기록과 논술’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傳奇라는 새로운 文(體)이 등장하기 전에는 志怪類(소설)라는 명칭으로 史部의 傳記에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史部의 傳은 史家와 小說家가 공유하는 문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자면, 새로운 문학의 등장은 기존의 제도화된 틀로부터 이탈하는 방식으로 출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신은, 巫에 유래한 史官은 신과 인간의 일을 기록하는 업무를 그 직분으로 삼았으니 사관과 문자의 관계는 긴밀하다고 전제한 다음, 후대의 ‘文學家’들이 사관의 문자를 그대로 활용하기엔 부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자를 창조하지 않는 한, 史官의 문자를 활용하되 내재적으로 변용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필지변’이 발생하고 史傳에서 분리된 ‘傳奇文’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진시대의 문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계승한 이는 주작인이 아니라 노신이라 하겠다. 이러한 발상법에 따른다면, 노신에게 文學 혹은 文人이란 제도화된 현실적 조건 속에 있으면서 새로운 언어적 형상을 창출하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문학(문인)의 자리는 현실적 조건을 벗어나서는 마련될 수 없다. “문학의 자각”이 “의식적 창작”인 한, 외재적이거나 초월적이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제도적 조건에 내재하면서 그 조건 자체를 변형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형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문학사에 투영하면, 문학사를 진화론적으로 구성하거나 실증적 자료의 나열로 대신할 수는 없다. 문학사적인 맥락에서 ‘문학’이란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자각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각이 생겨난 역사적 지점이나 예외적 사례들이 핵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백화문학사』의 방법을 좇아 서술한 정진탁의 『중국문학사』에 대해, 그것은 “文學史資料長篇”일 뿐이지 “史”가 아니라고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문언/백화의 대립 구도 자체가 문(학)의 문(학)다움을 보장해 준다는 인식도 거부한다. 노신에 내포된 가능성은 문론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지식으로 회수되지 않는 문학의 영역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과 정치의 대립적 구도 또한 부적절한 것이다. 주작인의 六朝文 계승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문론을 정당하게 계승한 인물은 노신이라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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