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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근대성, 매체 그리고 비평정신
문학의 근대성, 매체 그리고 비평정신
  • 차태근 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 승인 2006.08.2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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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지식의 형성에서 문학과 매체의 역할과 성격

근대시기 문학활동과 그것의 무대가 되었던 여러 매체들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려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근대성의 한국적 전개에 대한 최근 국문학계, 사학계의 논의는 점점 미시화, 심층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지난 7월 1일 6백주년 기념관에서 개최한 학술회의는 그 일단을 보여준다. 학술진흥재단의 대동문화연구원 중점지원연구과제 제3단계 제2과제인 <한국 근대사회의 변동에 대한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 -- 동아시아 근대지식의 형성에서 문학과 매체의 역할과 성격>이 그것이다. 아래에 제1부에서 발표된 차태근 인하대 강사의 논문과 관련기사로 류준필 성균관대 교수, 김현주 연세대 강사, 강해수 계명대 강사의 발표문을 관련기사 형태로 소개한다. / 편집자주

1. 문학의 “호출”과 그 “근대성” 위기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한 대담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그간 널리 회자되어 온 문학의 위기론의 결정판과 같은 선언이었다. 특히 최근 한국문학의 위기상황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더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는 그의 언술은 단순히 근대문학의 종언이 서구나 일본 등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정치적인 제3세계 문학을 포함한, 세계문학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말함과 동시에 “종언”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암시해 주고 있다. 역사의 종말과 혁명의 고별 등 연속적인 종언론의 릴레이 선언을 이어가는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들이 서로 모종의 공통된 토대위에 기초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그가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종언”의 성격과 본질은 그리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문학자체가 아닌 “근대”문학의 위기라면 이는 곧 문학의 “근대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직접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목소리는 역사적으로 늘 상존하는 문제였고, 이는 문학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 변화나 문학을 중심으로 한 담론의 위기에 대한 징후적 언설이었다. 가라타니의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의 근대적 관계에 대한 재조정이자 근대적 문학담론의 위기에 대한 징후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문학의 “근대성” 내지 근대적 의미의 “문학성”이라는 개념이다. 수 없는 논의를 진행해온 이 두 개념은 각 기 다른 차원에 속해 있으면서도 상호 연관되어 있다. 문제는 이 두 개념을 문학작품 그 자체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이것을 작품자체로부터 본질론적으로 추상 가능한 것으로 본다면, 현재 말하는 문학의 위기는 문학의 “근대성”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자체의 위기가 된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성이나 내재적 특성을 구성하려는 시도나 또는 그렇게 해서 구성된 개념도 역사적인 것인 만큼, 현재 문학의 위기가 문학성에 잇닿아 있다는 주장 역시 역사적 문학형태에 대한 발언이자 역사적인 발언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근대성과 그 문제에 접근해가기 위해서는 근대문학 작품내용이 아니라 문학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방식 그 자체, 즉 문학을 무엇이 어떻게 담론화하는가 하는 일종의 담론구성 과정과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문학이 근대문화,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문학 내부로부터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를 기획하던 문화-지식 구성체 내부로부터의 “호출”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근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학 관념의 재구성 과정도 고려해야겠지만, 문학이 호출되는 기제와 그것을 지속적으로 확대․유지해 가는 방식에 더더욱 주목을 요한다.

현재와 같은 문학의 지적․사회적 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02년 량치차오(梁啓超)는『新小說』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소설과 군치의 관계를 논함論小說與群治之關係」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20세기 초기의 대표적인 근대소설론이며, 근대와 소설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이는 근대와 문학, 그리고 문학과 소설, 소설과 근대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 언술이며, 그 속에서 논해지는 소설의 사회적 기능 및 문학 가운데서의 지위는 바로 새로운 문학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량치차오의 선언은 동시대 문학의 사회적․문화적 권위와 지위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문학의 부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부재성에 대한 선언은 다름 아닌 문학에 대한 “호출”이었고, 근대문학은 바로 이러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호출”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서 출현하였다. 즉 량치차오의 위의 논문이 지니는 의미는 그 내용에 있어서 소설을 사회, 정치, 국민계몽과 직접 연계시킴으로써 소설의 기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소설에 대해 호명하는 방식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 부재하는 것에 대한 “호출”이 바로 중국의 근대성이고 이 호출에 대한 다양한 응답이 바로 근대 그 자체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의 각 각의 존재를 향해 일일이 호출하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량치차오에게 있어서 문학과 그 한 장르로서의 소설은 근대 주체로서 호명될 필요가 있었고, 주체라는 점에서 그것은 그 어느 것 만큼이나 평등하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소설이 문학의 “최상승(最上乘)”이라는 것은 결국 근대이후 소설장르의 부각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량치차오의 이 언술은 일종의 수사적 표현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문학 장르에서 상대적으로 폄화되고 있던 소설이었던 만큼 문학상의 평등한 지위를 위해서는 “극단”적인 수사학적 전략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즉 최상승이란 희곡이나 시가, 산문등과 함께 소설이 누려야 할 평등한 “절대적” 지위를 지칭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절대성은 주체성의 기초이며, 근대 문학의 한 장르가 되어야 할 소설은 그 것이 지닌 역할과 가치를 “주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량치차오의 진정한 함의이다. 이러한 소설에 대한 “호출”은 상업, 입헌, 학교, 매체, 학회, 종교, 여성등 사회전반에 걸쳐 모든 근대적 기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근대에서 상업의 부재, 입헌의 부재, 학교의 부재는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것들은 하나하나 근대 주체의 “기제”들인 것이다. 문학은 20세기 초에 량치차오에 의해서 근대주체의 하나로서 이렇게 호출되었다.

이러한 호출에 대해 문학, 혹은 소설이 어떻게 응답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정치 소설을 비롯하여 문학의 계몽성이 강조되고, 견책소설과 같은 사회소설들이 일시 붐을 형성한 이후로, 부침과 과도기를 거쳐 5․4 신문화 운동과 사회주의 문학으로 이어지는, 근대주체로서 거듭 요청된 문학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서술되어온 근현대문학사란 바로 이러한 호출과 문학적 응답에 대한 서사의 일종인 것이다. 그 가운데 보여주는 다양한 사조와 유파는 량치차오 이후 문학과 소설에 대한 끊임없는 다양한 호출방식에 대한 각기 다른 응답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문학연구들은 바로 이렇게 호출된 문학과 소설을 전제로 해서 그 다양한 변주를 서술해 왔고, 또 각기 그 내부의 편차를 통해 문학의 근대성과 그 자체의 문학성을 규정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문학이라는 양상이 존재해 온 이후로, 문학이 근대성이라는 것을 획득하는 것은 문학의 내재적 성격을 새롭게 불러내는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학이라는 양상이 호출되는 방식과 “호출”이라는 그 자체의 성격에 의해서인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문학의 근대성을 작품의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 문학이 전체 문화상황 및 그 바깥세계와 맺는 관계성으로서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문학을 새롭게 호출하는 정신과 그것을 가능케하는 지적시스템 즉 매체를 중심으로 문학의 근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현재의 문학위기가 문학의 근대성 그 자체와 불가결하게 관계되어 있는 한, 문학이 근대성을 갖추어 나가는 그 방식 속에 동시적으로 배태되었을 그 위기적 요소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2. “근대” 문학과 비평정신

호출되었다는 점에 바로 문학의 근대성이 존재한다면, 문제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속되어 온 호출 그 자체의 궁극적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의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역사의식이나 계몽의식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의식의 물질적 기초까지 고려한다면 비평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평정신은 역사의식과 계몽의식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며 새로운 언어와 지식매체에 근거한 에크리튀르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무엇이 량치차오로 하여금「소설과 군치의 관계를 논함」을 발표하게 하였으며, 그 에크리튀르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량치차오의 이 글은 당시 보편화되기 시작한, 그러나 매우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크게는 “논설(論說)”이라는 범주에 속하면서도 “소설론”과 “시론(時論)”, “정론”을 함께 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의 보편성과 서술자의 개별적 호칭(주관성)이 함께 논리를 구성해 가고 있다. 또 불교와 심리학 등을 이론적 준거로 하여 문학의 기능을 논의하면서 동시대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편성과 현실사이의 괴리를 타자와 자아에 대한 비판적 반성-실천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량치차오의 글은 전형적인 비평에 속한다. 지식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이론과 작품, 현실세계를 함께 비판적 대상으로 삼아 서술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다름 아닌 비평정신이다. 이 비평정신은 문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의미하는 만큼 무경계적․포괄적이며, 이념 지향적이면서도 경험적 사실에 근거해 있다. 특히 이 정신은 매우 논쟁적이고 실천 지향적이어서 서술전략에서 종종 보이는 보편성에 비한 주관성의 과도한 노출은 구체적 실천을 통한 화해라는 목적과 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근대성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적 태도를 그 심급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미 두드러지기 시작했지만, 언어로서 표현되는 주관성의 범위와 이론적 창신성(創新性)등에 있어서는 여전히 절제되고 있었다. 이 시기 비평정신은 주로 상소문이나 각 종 “危言”류의 개인 저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물론 왕타오(王鞱)와 같이 새로운 매체인 잡지와 신문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時評으로써, 후에 량치차오가 말한 “覺世”의 글쓰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홍콩과 상하이 조계지라는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세계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사유체계를 모색하면서도,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이론적 틀에 있어서는 전통적 자원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유를 전개하는 논리의 폭과 심도에 있어서 독자의 익숙한 사유논리와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 에크리튀르에 의해 압도되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새로운 정신적 태도로서의 비평정신은 서학의 보급에 힘쓰던 왕타오나 정관잉(鄭觀應)과 같은 논자들에 의해서 아니라, 오히려 經學이라는 전통적 학문을 중심으로 정통적 학문코스를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캉여우웨이(康有爲), 량치차오, 탄쓰퉁(譚嗣同), 탕차이창(唐才常), 쉬친(徐勤), 마이멍화(麥孟華) 등은 유교와 도교, 불교 등 전통학문에 기반하면서도, 서구과학과 제도 및 문물등과 관련된 새로운 관념과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며 현실에의 개입을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전통적 사상을 활용하면서도 이에 압도되지 않고, 금문경학과 불학의 형식을 빌러 자신의 주관성속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단지 세계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념을 창출하고자 하였으며, 19세기 말 중국의 비평정신은 바로 이렇게 사상운동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초기 캉여우웨이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비평정신은 개별적 활동이 아닌 조직적 훈련과 실천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이들의 활동은 학당과 같은 교육 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캉여우웨이가 이끈 광뚱(廣東) 萬木草堂과 량치차오, 탄쓰퉁, 황쭌센(黃遵憲) 등이 주도한 후난(湖南)의 時務學堂은 당시 사상운동과 비평정신의 요람이었다. 이 두 학당은 교학내용이 당시 여타 서원이나 학당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비판정신과 비평적 글쓰기의 훈련장이었다. 동서고금, 과학과 정치학, 종교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 비판적 감성과 격정,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와 학술, 시사, 국제문제에 대한 비평과 논술활동은 당시 캉여우웨이의 孔敎사상 및 민권, 자유등의 언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정규적으로 행해지는 학생들의 필기와 문제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선생의 평가와 답변(批答)은 이미 그 자체로 현대비평의 추형(雛形)이었다. 당시 이 두 학당의 학술과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 만목초당의 학생이었던 루샹후(盧湘父)와 후에 시무학당의 비판에 앞장서서『翼敎叢編』을 편찬했던 쑤위(蘇輿)의 각 각 다음과 같이 서술을 통해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캉 선생의 강연은 經․史․詞章과 제자백가 등의 학술원류가 많았지만, 긴요한 時務, 세계의 대세 등에 관한 것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당시 서원에서 강의되지 않고 과거시험과 무관한 것이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시무학당의 량치차오) 캉여우웨이의 「新學僞經考」,「孔子改制考」를 중심으로, 평등․민권, 공자기년 등의 그릇된 말을 보조로 하여, 육경 위조설을 통해 성스러운 경전을 파멸시키고, 탁고개제를 들어 헌장을 문란 시켰다. 평등을 제창하여 윤리강상을 타락시키고, 민권을 제창하여 군상(君上)을 무시하였으며, 공자 연호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청 왕조의 존재를 없애려 하였다.”

캉여우웨이의 교육방식은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지닌 유용한 인재를 배양하는데 두었다. 즉 “독서를 함에 있어 반드시 매 구절을 따져 그 근거 탐구하여 스스로 의론을 세우는 것을 위주로 하며”, “조리를 형성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하였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는 서구의 정치철학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기 전이었다. 그 결과 평등과 민권설은 공자사상에 대한 재해석 및 서구의 전기, 에테르 등의 과학지식과 결합하여 독특한 사상을 형성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적 모험은 바로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초기 비평정신을 훈련․조직하고 새로운 비평의 시대를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학회와 잡지이다. 중일전쟁 직후 强學會와『時務報』를 이어 수 많은 학회와 잡지가 우후죽순처럼 출현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 학회인 후난의 南學會는 탄쓰퉁, 탕차이창, 황쭌센, 피시루이(皮錫瑞), 시웅시링(熊希齡), 쳔바오젼(陳寶箴)등 지방 관원과 지식인(紳士)들이 함께 조직한 것으로, 자치적인 지방정부운동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매주 강좌를 진행하였다. 즉 연설형식의 강연을 통해 당시 후난의 지식인과 관료, 그리고 시무학당의 학생들까지 참여하는 학술과 시국토론장이 열렸다. 이에 앞서 만목초당에서도 캉여우웨이가 강연을 진행하였으며, 청중의 수가 많을 때는 100-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학당과 학회를 통한 강연과 필기형식의 글쓰기는 아직 지역과 집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내용은 보다 자유롭고 급진적인 것도 수용되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 영향 범위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비평 활동을 지역과 그룹차원에서 전국적이고 대중적 차원으로 공간을 확장시킨 것이 바로 신문과 잡지였다.

신문과 잡지를 통한 새로운 에크리튀르의 가능성을 이미『申報』,『萬國公報』를 통해서 발견한 후 이를 크게 확장시킨 것은『時務報』였다. 량치차오는 여기에「變法通議」를 비롯한 60편이상의 글을 발표하여 변법운동과 새로운 비평적 글쓰기를 결합시켰다. 변법의 불가피성과 학교개혁, 상업 등에 관한 변법주장은 문체와 사상의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신문체라는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국내외의 많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에크리튀르를 상징하는 부호가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무술변법 직전, 가장 급진적인 변혁을 이끌어 나갔던 신문과 잡지는 후난의『湘學報』(旬刊, 초기 명칭은『湘學新報』)와『湘報』(日刊)였다. 이들 신문․잡지는 시무학당과 남학회가 중심이되어 활발한 학술활동과 비평 활동을 전개하던 공간이었다. 남학회는 “講論會友”라는 강연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회원을 두고 7일 간격으로 강연집회를 개최하는 한편, 그 내용을 위의 신문과 잡지에 게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신문․잡지는 독자와의 문답과 100여 편에 이르는 각 종 논설을 통해 당시 비평정신을 신장시키는 한편, 다양한 분야의 학회와 잡지발간을 추동하여, 비평공간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비평의 공간이 확장되고 보편화되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경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위의 잡지에는 무술변법을 적극 지지했던 유신파와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양무파, 그리고 지방 鄕紳계층이 향신의 권한 강화와 관민(실제로는 紳士계층)의 유기적 협조를 바탕으로 국가의 위기극복이라는 목표 하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비평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사회의 개혁이 단지 이념적 차원이 아닌 실제 권력구조의 재조정이라는 차원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비평이라는 것은 단순 이념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자 동시에 수단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해 가고 있었다.

지방의 권력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던 양무파와 향신계층은 지방정부와 지방 향신의 권력 강화라는 점에서 서학의 필요성과 개혁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 권력이 향신을 거쳐 다시 “민간”으로 계속적인 하향운동을 해 나갈 때, 그들은 민권과 평등을 주장하는 유신파와 결별을 선언하고 적극적인 담론경쟁과 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과격한” 유신파에 맞서면서도 유신파의 무기인 비평 활동 자체를 억압하거나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비평의 매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유신파가 주축이 된 무술변법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직전에 보여준『時務報』분쟁과『湘學報』를 중심으로 한 소위 “新舊”분쟁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분쟁의 결과 유신파는 완전히 배제되고 두 매체는 모두 양무파에게 귀속되었다. 그리고 이 두 분쟁의 중심에는 쟝즈뚱(張之洞)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권력을 통해 유신파의 “급진적” 주장을 견제하는가 하면, 개혁을 지지하면서도 유신파를 주요 비판대상으로 하고 있는 그의「勸學篇」을『湘學報』제 37호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 즉 중체서용설로 양무파의 입장을 체계화했다고 평가되는 장지동의「勸學篇」은 바로 당시 일종의 정론 혹은 시론(時論)으로서, 비평정신의 보편화와 비평이 새로운 시대의 에크리튀르로서 자리 잡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湖南의 南學會 활동에서 보여주듯이 민간 및 지방차원의 새로운 정치권력의 형성과 후에 국민국가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조직 원리를 지향하면서 정치․사회운동과 이념이 밀접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정치운동은 단순히 권력쟁탈이 아닌 이념성이 강한 일종의 사상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확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비평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즉 학회의 조직과 신문, 잡지의 발간은 비평정신이 보다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공간과 조건을 제공하였고, 또 이를 통해 사상운동이 전개되어 나갔지만 문제는 이 사상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사회로부터 합법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주관성은 비평정신의 기본적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담론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비평과 이념의 이론적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초기의 비평정신은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보편적 이념과 현실의 갭 사이에 개입하여 이를 메워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신념차원의 이념을 사회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보편적 이념으로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즉 이 시기 비평정신은 바로 보편적 이념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 전제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캉여우웨이의「新學僞經考」,「孔子改制考」는 바로 비평정신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시도였고, 탄쓰퉁의『仁學』역시 전통학술과 당시 중국에 소개된 과학, 수학 및 정치학설 등 서구 최신 학술을 종합하여 비평정신의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모두 저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통적 사상에 대한 재해석과 재구성을 시도하였는데, 그런 만큼 이에 대한 반발과 비판도 적지 않았다. 즉 이들의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전통학술과 새로운 제도, 문물이 표상하는 이념과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지만, 실제로는 전통학술의 근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언(危言)이었다. 특히 통치이념의 상징인 경전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위의『翼敎叢編』과 같은 공개적 비판과 정치적 공격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비난이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지자 光緖帝는 오히려 캉여우웨이 등을 지지하고 자유로운 언론을 강조하여 비평정신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저술을 통한 비평이념의 확립과는 달리 앤푸(嚴腹)는 이론저서의 번역을 통해 새로운 시대이념을 형성하려 하였다. 앤푸는『國聞報』에 시평(時評)을 발표하는 한편『天演論』을 비롯한 서구 이론저서를 번역게재 하였다.『천연론』은 막 발흥하기 시작한 비평정신에 일대 충격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그 이론자체의 논리적 합리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을 둘러싼 내외 변화의 성격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현실적용성과 경험적 합리성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이는 서구이론의 유용성과 가치를 증명해 줌과 동시에 비평정신의 서구이론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였다. 특히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캉여우웨이는 이미 서구이론의 번역 사업을 기획하고「日本書目誌」를 발간하며 일본을 통한 서학이론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번역시대는 무술변법의 실패 후 량치차오등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동시에 일본으로의 유학 붐이 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앤푸를 비롯하여『淸議報』,『譯學匯編』등의 번역활동은 비평의 이론적 토대에 대한 관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이 추구한 비평이념은 국가와 사회영역의 새로운 질서체계에 관한 것이었으며, 서구의 政論과 法學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이념의 절박성에서 비롯되었다. 정치학과 법학은 단순히 분과학문이나 기능성 학문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관한 이념을 창출하는 것이고, 이는 바로 당시 요구하던 보편적 이념의 핵심내용이기도 했다. 정치학은 바로 새로운 질서의 창출을 위한 이념이었고, 법학은 그 이념의 제도화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청정부의 관리들은 정치학을 이념이 아닌 기능적 제도에 묶어 두려했지만,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역으로 정치학과 법학(당시 이른바 정법학)이 지닌 이념적 혁명성을 거세하려는 의도를 부각시킬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학은 바로 새로운 이념의 자유로운 발양을 가능케 하는 공간의 창조와 직결되어 있었다. 특히 “治國”을 목표로 한 정치학과 사회학인 만큼, 그 학문을 단순히 이론의 차원을 넘어 사회변혁담론으로 구체화시키는 비평정신에게 있어서 격물치지는 물론이고 수신과 관계된 교육학과 심리학 등 전반적인 학문과 지식을 요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다시 말해 처음 정치학과 사회학에 근거하여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던 비평은 이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국가이념을 구현할 주체의 호출이라는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3. 매체와 비평, 그리고 문학

근대의 비평정신의 발흥 자체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량치차오가 무술변법 실패 후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인『淸議報』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중국의 역사에서 권력과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운동인 淸議 활동은 드물지 않게 출현하였다. 청조와 시기적으로 멀지 않았던 명 말시기는 중국의 역사에서 비평정신이 강하게 표출되었던 시기로 손꼽힌다. 명 말의 시대분위기와 한족 왕조의 몰락은 주체의식이 강한 비평정신의 형성과 함께,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과감한 이론적 모색을 자극하였고, 이들의 사유와 사상적 자산은 바로 우리가 비평의 발흥시기라고 부르는 청 말시기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왕부지와 황종희는 가장 급진적 변혁을 주도하던 탄쓰퉁과 량치차오 등에게 강렬한 사상적 자극을 부여했고, 그들은 바로 명 말시기의 사상과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기시대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비평정신이 하나의 시대적 특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유로운 정신교류를 가능케 하는 공공영역의 존재여부이다. 19세기 말 이전 중국에는 공공영역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문인 집단내의 각 종 文社나 지방 상인그룹들이 함께 형성한 茶館과 같은 도시중심의 오락-연희공간이 존재하여, 사상과 지식의 교류와 함께 정치 및 세태에 대한 비판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공공영역은 비평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비평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담론을 구성하는 사상과 학술내용의 차이와 그것을 표현해내는 매체의 차이였다. 이시기 잡지와 신문을 중심으로 한 매체의 변화는 단순히 비평공간의 확대라는 외면적인 차원을 넘어 비평 그 자체를 변화시켰다. 신문과 잡지라는 매체는 일반 저서와 달리 변화하는 현실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만큼 매체는 시간성에 민감하고, 의미 또한 시간성에 의해 지배받는다. 량치차오가 말한 傳世가 아닌 覺世의 문장은 바로 이러한 시간성에 강하게 지배받는 문장이며, 이는 내용에 관계없이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시사비평과 같은 글들이다. 이러한 시간성에 구애되는 문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의의를 시간내에 실현시킬 수 있는 매체방식이 요구된다. 만약 이러한 매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글쓰기는 현실적으로 힘을 얻기가 어렵다.

이 시기 비평정신과 관련하여 매체가 지니는 의미는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대중적 공공공간과 더불어 새로운 지식과 담론의 생산방식 및 독특한 에크리튀르의 창출이다. 대량발행이 가능해진 신문과 잡지는 다양한 지역적 여론공간을 서로 연계시키고, 세계를 하나로 연계시켜 세계와 국가의 업무에 관심을 표명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또 단행본의 저서류에서 단독으로 묶여지기 어려운 글들은 그 저자의 사후나 후반에 문집의 형식을 통해 묶일 수 있을 뿐, 단독으로 다중을 향해 공개되기 어려웠지만, 신문과 잡지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문장들이 그 때 그 때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비평과 같이 자유로운 문체는 이러한 매체가 없이는 발표될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매체의 보급은 이 시기 비평정신이 자신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비평 정신의 핵심은 자유로움에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취향과 재능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비평정신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자는 이론의 형식으로, 혹자는 화보의 형식으로, 또 혹자는 정론이나 소설, 희곡의 형식을 통해 자유로운 정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 즉 당시 비평은 현재의 하나의 양식화되어 버린, 즉 일종의 스타일로서의 비평과는 구분되었다. 중요한 것은 비평정신에 특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되는 에크리튀르이다. 기사의 형식과 이론의 형식, 번역의 형식과 창작의 형식은 문체이기 이전에 동일한 비평정신의 발현형식이었고, 당시에는 비평이라는 범주속에 모두 아우러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문장들이 社說, 論說, 學術, 飜譯, 雜俎, 叢談등 다양하게 분류․배치되고 있지만 이들 간의 경계는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의 많은 “이론”의 비평적 성격내지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시 다양한 문채의 혼종성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그 다양한 글들을 담아내고 있던 텍스트의 배치를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론이 이론으로서 독립되지 않고, 그 문장의 전후로 시사와 문학과 비평이 함께 사회에 대해 함께 발언하고 상호 지시하고 있는 것 자체는 이미 그것이 작자나 독자 할 것 없이 모두 평론이라는 주관성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러한 비평정신의 자신의 독특한 에크리튀르에 대한 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新民叢報』가 第二十五號(1903年2月11日)부터 편집양식을 바꾸어 새롭게 등장한 “批評門”을 들 수 있다. 『新民叢報』는 전체 내용을 “論著門”, “批評門”, “叢錄門”으로 나누어, 논저와 기타 잡문과 소설 등으로부터 비평을 구분하고, 그 안에 다시 “政界時評”, “ 敎育時評”, “學界時評”, “群俗時評”, “雜評”, “評論之評論”, “紹介新書”로 세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비평은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잡지의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評論之評論”은 국내․외 신문과 잡지의 평론을 번역게재하고 있고, “紹介新書”는 국․내외(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신서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다. 이러한 비평의 글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매체의 보편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비평공간과 비평정신의 확장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지식과 언어를 자신의 대상범주로 망라하여 이들을 새롭게 재배치한다는 것이다. 비평의 시대적 보편성은 바로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의미한다. 이제 비평은 현실과 지식이 맺는 모든 방식을 일일이 점검․감시하고 이 둘 사이의 갭에 개입하여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비평은 알뛰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 국가기구와 유사한 역할을 하며 제반 지식영역을 호명하고 그들에게 사회․세계와 맺는 적절한 방식을 제기한다. 바로 비평의 이러한 역할의 일환으로서 문학이 근대지식과 문화의 하나로서 호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시기 비평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제반 지식과 문화를 하나의 절대적 주체(이를 달리 표현하면 전문적인 독자영역과 가치)로서 호명하면서 이들 사이에 형식적인 평등성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문학의 주체화는 바로 이러한 비평정신의 산물이다. 이는 국민국가의 이론적 토대인 근대 정치사상이 개인적 주체의 확립을 지향해 갔던 것과 같은 사유의 흐름이며, 근대문학의 특징이라고 계속 강조되는 문학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자기인식이라는 것도 이러한 사유운동의 결과이다. 문제는 이러한 절대적 주체로서 등장한 문학과 소설이라는 장르의 자기인식 또한 호출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학성과 그 역할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이 호출의 동기는 오히려 “비문학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 즉 문학의 자기인식은 바로 문학을 공론화하는 장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공론화 장은 정치적 담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바로 새로운 지적담론 그 자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현실적 개입을 표방하며 진행되는 담론의 패러다임적 전환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문학담론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문학의 정치성과 사회성에 대한 강조이다. 이는 전통적인 유교적 문학관, 즉 “興, 觀 ,群, 怨”과 “文以載道”, “經世之文”등에서 보여주는 관념과 비교하여 새로울 것이 없다. 따라서 20세기 중국의 리얼리즘 문학 전통을 전통적인 유교문학관의 연속이자 변형태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문학담론의 중요한 특징은 문학의 체제와 양식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문학비평이다.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한 문학비평은 단순히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이라는 외형적 방식이 아니라 그것과 문학의 관계 자체가 문학의 새로운 시대성을 의미한다. 즉 20세기 초 문학, 특히 소설은 번역과 창작을 통해 양적인 확대가 이루어졌다. 잡지라는 공간을 통해서 문인들은 소설 창작을 여가의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졌다. 소설가의 경제적 지위도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 작품 연재를 통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었는데, 특히 원고료제도의 정착, 저작권 등 관념의 확립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 작가군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작가들을 사회에로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비평이었다는 것이다. 비평은 소설가를 정치적, 사상적 위인의 대열로 끌어 올리면서 소설가를 신지식인으로서 지칭하였다. 문명사회에서 소설가는 위대한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떠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이었다. 량치차오에 앞서 소설가를 문명개화의 사상적 전도자로 불러낸 것은『國聞報』의 실질적 편집자 앤푸와 샤청여우(夏曾佑)였다. 소설가는 새로운 지식과 가치관을 대중속에 불어넣어야 할 교사이자, 개혁이념의 전달자이어야만 했다. 물론 이는 모든 소설가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가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역할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소설가의 위상변화는 소설가를 문인의 중심위치로 끌어올리기는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소설가를 독자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문제점 또한 지니고 있다. 즉 량치차오의 정치소설「新中國未來記」는 당시 대중적이라기보다는 문인계층을 독자로 설정한 작품이었다. 언어자체의 장벽에서부터 그 신개념, 정치담론은 일반 대중들의 독서수준과 취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호출은 동시에 새로운 소설 독자층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고, 소설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함께 중요한 것은 소설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이는 작품에 대한 단순한 감상이 아닌 작품에 대한 분석적 독법이 요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의 역할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문학적 소양이 있는 독자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모든 독자대중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는 단지 몇 권의 문학이론서로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문학적 소양을 갖춘 독자란 문학에 대한 훌륭한 안목을 지닌 독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20세기 초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독서의 희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심미적 감수성과 더불어 과학에서 철학에 이르는 새로운 지식, 그리고 작품으로부터 현실에 대한 표상내지 비판을 읽어낼 수 있는 정치적 안목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교양 있는 독자를 위해서는 비평가라는 집단이 문학의 생산과 수용 전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잡다한 지식과 교양을 한데 모아 독자대중에게 제공한다는 신문․잡지의 매체는 그 자체로 문학대중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신문․잡지의 매체가 없이는 20세기의 문학과 작가와 문학대중은 불가능하였다. 논설, 기사, 기문(奇聞),과학지식, 신문물, 문학 등을 망라하는 신문․잡지가 표상하는 세계가 곧 현실이고, 문학이 표상하고자 하는 세계이며, 문학의 소스였다. 즉 소설이란 바로 이러한 세계를 압축적으로 표상해내는 서사양식이자 하나의 독특한 매체 그 자체였다. 소설은 오락성과 지식의 전파, 그리고 현실 지시와 현실 비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매체였다. 그리고 훌륭한 독자는 바로 이러한 매체에 대한 정기구독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문․잡지가 만들어내는 세계와 그 속에서 제공되는 지식․정보는 날로 방대해져 일반 독자대중이 모두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날로 심해지는 현실의 복잡성과 상호 대립적인 정치적 입장간의 논쟁은 그 신문․잡지가 표상하는 세계가 투명한 현실자체가 아니라 독자가 분별하여 파악해야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독서대상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자신의 정치적 대중을 획득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교양 있는 독자를 위해서 비평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를 망라하여 각 분야별, 또는 모두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평론이 행해졌고, 문학비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즉 작품의 배경, 작가에 대한 기본 지식, 작품의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심미적 의미, 나아가 중국현실에서 지니는 의미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된 문학비평은 때로는 작자가 직접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비평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20세기 초 소설론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는 바로 소설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의 상승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와 함께 볼 것은 당시 序․跋文과 尾批, 소설론, 작품비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소설담론이 단지 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작품에 대한 비평을 통해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특히 명․청 소설에 대한 비평은 작품을 새롭게 읽는 방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비평이라는 방식을 통해 현실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俠人은 잡지『新小說』의 “小說叢話”에서, 『紅樓夢』을 음서(淫書)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황실의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 가족제도의 폐해, 인성으로서의 욕망과 인간 삶의 관계 등, 정치, 윤리, 철학적 의미를 읽어내고 있다. 또 曼殊는 대표적인 음서로 간주되던『金甁梅』에 대해서도 이 소설은 음서라기보다는 사회의 하층 부녀자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 사회소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사회의 제반 현상을 묘사하고 폭로하는 것이 문학의 한 역할이라고 볼 때,『金甁梅』는 문학의 이러한 요구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07년『新世界小說社報』(第八期)에 발표된「中國小說大家施耐庵傳」에서는 施耐庵의 창작동기를 이민족의 학정과 理學의 질곡에 있다고 보고,『水滸傳』에는 그의 민권사상. 여권사상, 그리고 상무(尙武)․의협정신이 드러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소설에 대한 비평이라는 방식을 통해 반청(反淸)사상과 근대적 정치사상을 주창하고, 또 당시 중국사회 제도와 관념 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평은 이미 단순히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비평이라는 것이 사회에 실천적으로 개입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국의 전통소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비평은 중국사회와 문화의 타락 원인이 전통 소설이 있다고 비판했던 량치차오의 주장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즉 俠人이나 曼殊에게 있어 문제는 전통소설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소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기존의 방식과 안목이었다. 사상과 심미적 취향이 저열한 사람에게 있어『金甁梅』는 노골적인 淫書에 지나지 않고,『水滸傳』은 도둑질을 가르치는(誨盜) 저급한 소설일 뿐이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문학이 제대로 역할하기 위해서는 모든 독자가 정치적, 사상적, 윤리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지 못하는 한, 비평을 통한 독서의 안내․지도가 요구된다. 특히 그 가치와 의미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운 당대소설의 경우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리하여 1907년『新世界小說社報』(第六․七期)에서는「신소설 읽는 법(讀新小說法)」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과학(格致學), 경찰학, 생리학, 음율학, 정치학, 윤리학에 관한 일정한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소설에는 문학과 과학, 상식과 철리가 함께 담겨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학과 철리가 언어의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는 근대적 지식과 함께 왕궈웨이(王國維)가 말한 심미적 교육을 통한 훈련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훈련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져 하겠지만,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식은 바로 비평이다. 즉 비평은 작품을 통한 사회비판과 사상교육이라는 실천적 측면 외에도, 근대적 독자라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하는 독서법 교육이라는 역할도 아울러 수행할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러한 비평기능의 다양화는 동일한 문학작품에서 서로 다른 가치와 의미의 유추가능성에 기초해 있다. 즉 비평가는 다양한 목적과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때로는 정치적으로, 심미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작품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비평가에게 세계와 작품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안목과 이를 다양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양을 요구하는 것이자, 비평이라는 것이 독립된 하나의 영역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왕궈웨이가 1904년『敎育世界』(第76-78, 80-81號)잡지에 연재했던「紅樓夢評論」이다. 왕궈웨이의 이 평론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비평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전체 5장 중 제 1장은 인생과 예술의 관계를 논하는 일종의 예술론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홍루몽의 정신”, “홍루몽의 미학적 가치”, “홍루몽의 윤리적 가치”는 작품에 대한 본격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비평은 이미 일반인의 감식․비평능력을 훨씬 초월하여 철학적이고 전문적인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비평은 여기서 이미 독자는 물론이고 작가로부터 독립하여 때로는 그 위에 군림하기조차 한다. 즉 비평가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앞서 말한「讀新小說法」에서는 金聖嘆을 소설 철학자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비평이 하나의 전문적 영역이자 비평가의 특수한 지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20세기 초 중국의 문학담론에서 진정 발생한 것은 소설과 문학지위의 상승이라기보다는 비평지위의 상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평정신이 주도하는 시대에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으며, 문학, 특히 소설은 이러한 비평정신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서 주목받았던 것이다.

4. 비평의 위기와 정치적 상상력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20세기 초 문학담론의 대두, 특히 소설과 시대의 새로운 관계는 바로 비평정신에 의해 근대주체의 한 기제로서 호명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비평정신은 “先知覺後知”, “先覺覺後覺”에 따른, 당시 지식인과 대중에 대한 계몽이라는 목적 하에서 진행되었다. 중국에서 계몽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治國平天下”에 있으며, 이는 19세기 말에 등장한 일군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治國과 平天下는 연속적인 논리의 확장이 아니라 상호 대립되는 양상을 보여주면서 평천하에 앞서 치국이 비평담론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서구와 일본으로부터의 신지식도 이와 관련된 정치학과 법학, 사회학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치국이 단순히 국가라는 정치 제도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점으로 하는 전체 통치체제인 만큼, 지식에 있어서도 유기적인 체계를 형성하는 모든 지식 요구하였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는 모든 지식분야와 영역에서 호출되었고, 문학, 특히 소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국가란 바로 이러한 주체들의 형성과 관계에 대한 정치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이 처음 호명된 것은 소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부재로부터의 재생(“新”)이었다. 이는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고, 소설가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처음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정치소설”이다. 정치소설은 내용만 정치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계초가 주장했듯이 사회의 명망가나 정치가처럼 소설가 자신이 정치적인 안목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정치가적 소설가와 정치소설론은 소설의 기능과 의미를 협소화시킨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 소설을 보다 광범한 사회라는 영역속에 위치 지우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소설과 사회, 소설과 풍속, 소설과 도덕, 소설과 과학, 소설과 정치 등은 소설을 종합적인 계몽수단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소설가의 창작 폭과 주제, 스타일상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보다 자유로워진 소설가의 창작공간은 비평이라는 감독기제에 대한 승인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권은 바로 비평가의 몫이었고, 작가는 비평가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기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결과 작가는 序․跋文과 동료작가나 비평가의 尾批등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려는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女娲石』의 저자 海天獨嘯子는 직접 “凡例”를 통해 당시 議論性이 강한 소설 창작 경향을 비판하고 자신의 작품 사상과 주요 취지를 자신이 부탁한 卧虎浪士의 서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이는 번역소설에도 마찬가지였다. Uncle Tom's Cabin을「黑奴吁天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린쉬(林紓)는 흑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을 외국에서의 중국인의 비참한 처우와 황인종의 미래 운명이라는 민족적, 인종적 알레고리로 읽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분석 등 다양한 비평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독립적인 해석을 낳았고, 이는 독자에게는 작품 해설이라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작가에는 창작지도라는 기능도 하였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더더욱 자신의 전문성을 위해 문학과 소설에 대한 이론에 천착하였고, 이러한 방식을 통해 20세기 문학과 소설에 대해 끊임없는 호출을 해 올 수 있었다. 게다가 비평은 모든 교육의 기초로서의 문학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 문학과 사회(정치)에 대한 지위를 강화시켰다. 물론 여기서 소설가와 비평가를 완전히 다른 그룹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많은 비평가들은 직접 소설 창작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평가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소설담론을 형성하는 비평의 전체 차원에서 본다면, 소설(문학)과 비평의 관계는 여전히 후자가 전자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문학) 비평가는 문학이라는 독특한 매개를 통해 문학이라는 고유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비평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근대주체와 기제들을 호명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근대의 시대는 문학의 시대이고 비평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한 문자와 활자의 대중화 및 그 기능의 강화, 문학교육이라는 학제와 전체 교육에서의 독보적인 위치, 그리고 이를 통한 모든 비판적 담론의 중심에 문학비평의 개입, 바로 이것이 문학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지점이다. 즉 모든 문자 교육을 지배하는 문학과 그에 대한 감독․지도 역할을 하는 비평,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문자중심의 매체가 형성하는 지적시스템에 대해, 정치중심의 사상담론은 문학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특수성을 부여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현재 제기되는 문학의 위기는 문학자체의 위기가 아니라 바로 이 관계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매체의 변화와 비평정신의 약화이다. 이는 또 과학과 정치와 문학(비평)의 관계이기도 하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캉여우웨이와 탄쓰퉁과 같은(량치차오를 포함하여) 사상가들로부터 매체를 포함한 새로운 과학과 정치사상이 어떻게 비평정신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바로 그 시기는 현재 못지않게 과학이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이며, 바로 발명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학의 발명이 가져다 준 상상력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추동하였고, 비평정신에게는 성장제와 같은 것이었다. 즉 과학은 인간사회에 새로운 구성방식을 제공하였다. 특히 교통과 정보관련 매체의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정치적 원리를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고, 문학을 포함한 비평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위한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와 비교해 본다면 현재 문학의 위기는 다름 아닌 비평의 위기이며, 이는 또 과학과 정치, 문학(비평)의 상관관계가 변화하는 가운데, 정치와 문학(비평)의 상상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 없지 않다. 따라서 새롭게 변화하는 인간사회질서를 이념적으로 새롭게 구성해낼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과 문학(비평)의 상상력이 요구되며, 여기에는 정치와 문학, 비평의 관계에 있어서도 20세기 초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설정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비평정신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재조정하는 이중적 노력이 요구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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