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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지구화의 완성 ―지구라는 기호의 승리
제1강 지구화의 완성 ―지구라는 기호의 승리
  • 페터 슬로터다이크
  • 승인 2006.08.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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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정대성 연세대

M. 앨브로우가 제안한 ‘지구시대’(Global Age)라는 개념은 완결되지 않은 시리즈 안에서 의미 있는 단계구분을 시도하려는 서사이론(erzählende Theorie)의 욕구를 반영한다. 그는 지구화(globalization)시대,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땅의 구형화’라는 의미에서-역자] ‘지리적인 지구화’ (terrestrische Globalisierung)시대는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정규 역사에 뒤이어 전개되는 불특정한 기간 동안의 추가시간의 시대(Nachspielzeit)로 이행했다는 테제를 내 세운다. 그러나 이 추가시간의 시대도 고유한 권한을 갖는 시대이다. 어떤 작가들은 이미 지나간 그 시대를 “유럽의 천년”으로, 혹은 심지어 “유럽의 세계사”의 시기로 표시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문제가 있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 표현들은 유럽인과 비유럽인의 행위 사이에 있는 비대칭(Asymetrie)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체계적인 관점에서 ‘비대칭’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지배’(Herrschaft)를 의미했다. ‘식민지주의’(Kolonialismus)라는 표현은 요즈음 일반적으로 비난받고 있는 “유럽의 확장” 과정이자 결과를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명칭이 그 시대의 방법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명칭은 그 시대의 산물인 구축된 세계연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내포한다. 식민주의적인 실천의 배후에는 ‘일방주의(Unilateralismus)를 그들의 타고난 권리’로 여기는 유럽의 “위대한 민족들”의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침략의 시기에 철저한 사명감으로 임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일방성이 무너지고 무수히 많은 다른 측면의 시대가 시작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칭적인 세계상에 대한 최근의 생각들은, 󰡔탈식민지 연구󰡕(Postcolonial Studies)에서 잘 정리되고 있듯이, 유럽의 식민지 권력이 내부요인에 의해 종말을 고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최근의 생각들은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 이미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대칭’(Symetrie)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노력 덕분에 이제 타자성(Alterität)이 우선권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1492년 10월에 유럽 인들이 카리브 연안의 원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진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서글픈 발견자들은 자기들이 주인인 양 행세하는 방문객이 탐구할 수 있도록 자료들을 수집해 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문서보관소는 오늘날 철저한 분석과 검토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체제(Weltsystem)의 전개와 견고한 구축은 유럽 공세시대의 결과이다. ― 우리는 이 결과를 포스트모던적인 주문(呪文 Mantra)처럼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지구상의 경기자(global players)들이 서로 관계 맺고 있음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국가들, 기업체들, 은행과 증권사들, 과학산업, 예술산업, 스포츠산업, 매춘산업, 약물산업 그리고 무기산업 등의 영역에서 전 지구적인 연결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왕성한 피드백 시스템은 ― 아직도 잠정적으로만 등장하지만 ― 수많은 판에 박힌 상투적인 일들(Routinen)의 잠정적이나마 최종적인 노동수준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투적인 일들 때문에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실재로는 가깝게 있는 상대방을 고려하는 것이 세계내 존재(In-der-Welt-Sein)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되었다. 따라서 문명이라는 개념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정의한다면, 텔레리얼리즘(Telerealismus)을 의미할 것이다.

“지리적인 지구화의 종결”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계의 관심지역에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첫 번째 사람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제 알고 있으며’, ‘세계안의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담론이 없이는 의사표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정식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견자와 앞서 말한 사람들의 흔적이 도처에 현존한다. 오늘날 형식상 ‘혁신’(Innovation)(더 정확히 말하자면, ‘혁신’의 탑에서의 꾸준한 상승)이 요청된다고는 하지만, (세상의) 관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공명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 정립된 노선들(eingerichtete Routen)은 과거의 발견여정이 상호왕래를 위한 교통체계로 발전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중요한 분야들은 착상과 새로운 가설들이 담론의 왕국에 편입되도록 만든다. 지구화 시대가 탐색과 길 닦기로 특징지어 졌다면, 지구시대(Global Age)는 운행시각표의 시대로, 점증하는 교통왕래와 담화교환의 시대로 규정된다. 모험이 지구화(Globalisierung)와 관련된다면, 예약서비스는 지구성(Globalität)과 관련된다. 지구화 시대의 발견자들이 화승총, 지도, 칼 등을 가지고 해외로 떠나는 배에 탑승했다면, 지구시대의 강연자들은 좌석표와 완성된 원고를 들고 비행기에 오른다.

‘지구화시대’와 ‘지구시대’의 관계 속에 내재하는 연속과 비약의 계기들은 도시문화의 포화(Satuierung der Stadtkulturen)라는 비유에 의해서 가장 잘 해명될 수 있다. 오늘날의 대도시들이 설계되고 건설되고 사람들이 정착하기까지에는 대체로 수백 년의 과정을 거쳤다. 물론 쿠알라룸푸르, 상하이 혹은 베를린과 같은 몇몇 대도시들은 그 지역적인 상황 때문에 여전히 건설 열풍에 휩싸여 있으며, 따라서 그 결과에 따라 그 도시들의 미래의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적인 대도시들의 경우 도시형성의 건설적인 단계는 이미 얼마 전에 끝났으며, 개축, 증축, 건축 등은 오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수행되고 있다. 따라서 ‘네트워크화’,(Vernetzung) ‘심미화’(Ästhetisierung), ‘최적화’(Optimierung) 등이 전통도시들의 건설공사에서 핵심 개념이다. 새로 건설할 것이 거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것을 보다 강도 높게 활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교통정책을 문화도시 마케팅에 통합하려는 것이 현대 도시의 중요한 특징이다. 성공한 자들의 도시들은 이벤트의 소재지이고자 하며, 양질의 삶의 공급자를 자처하며, 그리고 거대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점이고자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륙의 수도들을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박람회장이나 스포츠센터, 현대예술 박물관 그리고 국제적인 호텔의 체인점 등 도시에 필수적인 집합체(Kollektor)의 건설이 그러하듯, 철저히 수정화된(auskristallisiert) 도시문화의 야망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제 세계의 모든 중심지역에 철저히 수정화된 도시문화가 있듯이, 세계체제에서도 역시 외교와 시장, 학문조직과 순회 가능한 예술품 전시 등의 영역에서 수정화된 국제성과 상호문화성이 구현되어 있다. 이와 유사하게 의료분야, 경찰 그리고 첩보업무 등의 영역에서도 국제적인 연결이 이뤄지고 있다. 복지를 누리는 영역들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이미 광범위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공간이 철저하게 식민화되었다는 인상을 던져주고 있다. ―혹은 ‘식민’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혐오스러운 말로 사용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규정에 의해 시민적 질서를 구축한 공간들이 서로 엮여 있다는, 즉 세계는 인종적인 구성요소를 넘어 국민국가적인 체제를 만들어 낸다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은 정치문화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된 이래로 지구화 시대는 내적으로 종결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지리적인 지구화 시대만이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세계사” 혹은 “역사”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 역사의 내용은 이 땅(지구, Erde)이 스스로를 지역문화의 담지자로 그리고 이 문화들을 서로 연결하고 발효시키는 하나의 세계연관으로 압축하는 담지자로 드러내는 드라마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의 이런 내용적인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1492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만 ‘역사’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데 반해, 그 이전과 그 이후에 현존하는 민족들과 문화들은 “역사적인 특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물론 이때 역사시대가 시작되는 연도와 끝나는 연도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집단들, 개인들, 제도들 그리고 실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생성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이 모든 것들은 변화하면서 반복되는 형태로 고요한 발걸음으로 그들의 시대를 통과해 가며, 또한 이 모두는 불변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도약과 파국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류의 머묾(Bleiben)과 추진함(Treiben)은 본질적인 “역사”에서 발생했던 것과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본래적인 그리고 유일한 “역사”는 다음과 같은 존재론적인 질문에 서사적(erzählend)으로 대답한다: ‘어떻게 지구시대의 관계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지구가 스스로 문화들의 연관의 담지자로 드러나는 일이 가능했는가?’ ‘어떻게 유럽인들은 그들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으며, 그들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에 그들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었는가?’

“역사”는 세계체제의 탄생의 신화이다. 이 신화는 지리적인 지구화의 영웅서사시로만, 따라서 일면성(Einseitigkeit)의 소설로만 이야기될 수 있었다. 이 영웅송가는 영웅들과 그들의 찬양자들 사이의 일상적인 동조관계를 개시한다. 이 영웅송가가 노래로 불려짐으로써 이 송가는 “인류”의 자기영역 만들기(Selbsteinkreisung)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서사(이야기)로 등장한다. 이 서사가 아무리 자주 이야기 된다고 하더라도, 사건에 대한 어떤 판본도 사건 그 자체의 높이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종 추구되는, 결코 적절하게 낭독되지 않은 이 잡종의 서사시는 우연자의 보편사(Universalgeschichte des Zufälligen)에서 탁월한 한 단락(Abschnitt)을 형성한다. 왜냐하면 이 단락은 그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내적인 목적추구에 의해 활성화 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계화 보고서는 좁은 의미에서 역사(혹은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보고서는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목적론적인 의미에서도 역사(혹은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이 보고서는 자신의 종결을 위한 기준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혹은 이야기)의 시작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세 척의 콜럼버스 범선이 1492년 8월 3일 금요일 오전 8시 정각에 팔로스에 있는 “살테스 하구”에서 카나리아 제도의 방향으로 출항한다. 그 다음 이 사건의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69일 후에 땅이 보이고, 또 다시 금요일인 70일째 되는 날에 신세계에 진입한다. 그해 가을에 마르틴 베하임(Martin Behaim)은 “땅의 사과”[감자]를 뉘른베르크의 시의회 의원들에게 소개한다. 그는 땅의 진리를 프랑켄지역의 이 상업도시로 가져온다. 그리고 이 역사(혹은 이야기)의 결론에 잘 어울리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1937년 뉘른베르크의 제국의회 주간에 히틀러는 베하임의 지구의(Behaim-Globus)를 자기가 투숙하고 있는 호텔 도이췌 호프(Deutscher Hof)로 가져오게 하는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아주 더러워진 이 구(Kugel)를 복원하기 위하여 재정지원한 그가 그 복원 과정을 때때로 직접 보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예스런 이 물건을 봄으로써, 우리는 그런 히틀러의 생각을 잘 따라갈 수 없지만 어쨌든, 제국에 대한 자신의 계획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1944년 7월 브레턴 우즈(Bretton Woods) 회의에서 달러화와 영국의 파운드화의 금패리티(Goldparität) 문제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고, 이와 더불어 최초의 구속력이 있는 지구시대의 세계통화가 정초된다.* 1969년(?)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은 떠오르는 지구 모습을 담은 최초의 사진들을 들고 달 여행에서 돌아온다. 이러한 광경들 사이에는 ‘지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벌을 내린다’는 가르침을 엄하게 각인시키는 수백만의 광경들이 놓여 있다.

‘땅은 구형이며, 따라서 육지와 바다가 있는 평면적 상들로 이루어진 지구의(Erdglobus)를 통해 지구의 모습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가설은 중세가 저물고 있던 시대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신학자, 천문학자, 광적인 지도제작자 그리고 멀리 나가기를 선호하는 상인들이 몰두했던 하나의 추측에 불과했다. 16세기에서 미국 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이 가설은 구속력이 없는 사변에 불과하였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그리고 마젤란의 항해를 통해 앞의 가설이 경험적으로 입증된 이후에도 이 가설은 개인들의 삶에서 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지도가 점차로 더 정확하게 되었고, 지리부도, 지구의들, 평면구형도 등이 제후들의 도서관에 등장하고, 시민계급의 서재로 들어왔지만, 절대 다수의 유럽인들에게 지구가 실제로 내용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불확실한 크기의 어떤 것이었으며, 그 불확실 속에서 사소한 크기로 머물러 있었다. 지리부도 등이 출판된 이후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지나야 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 가설은 이미 일찍부터 자신의 생을 걸만큼이나 강력한 신앙이었었다. 콜럼버스, 마젤란 그리고 델 카노와 같은 사람에게 신앙은 지성에 대한 추구였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들의 신앙고백을 위해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돈을 벌기 위해 선장의 망상에 참여할 사람들과 대양에 어울리는 좋은 선박들뿐이었다. 1492년 항해에 함께 한 팀의 봉급명세서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명세서에 따르면 항해사 데 가마(Sancho Ruiz de Gama)는 항해에 참여한 대가로 20듀카텐[Dukaten, 옛 금화이름. 역자의 보충]을 받았고, 선원 데 몽구에르(Juan de Monguer)는 4,000마라베디스를 받았다. 초기 세계일주 항해자들이 한 신앙고백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실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고백은 그들의 행위와 유물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어머니이며 부의 원천이자 민족들의 집인 하나의 둥근 지구를 내가 믿사오며, 풍요롭고 어디든 배를 띄울 수 있는 넓은 바다를 믿사옵니다. 또한 조종사와 승객의 친구인 바람의 궁전을 내가 믿사오며, 빠르게 순항하는 돛을 움직이는 자이며 총체적인 자유의 회당인, 어디서나 호흡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기를 믿사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콜럼버스는 성자의 무덤을 이슬람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원정에 오르는 십자군을 재정 지원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금을 서쪽 땅에서 발견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서쪽을 향한 길은 곧 동쪽을 향한 길을 열고자 한 것이었다. 이 크리스토프는 새 시대(Neuzeit)를 중세에 대한 봉사로 이해하고자 했던 마지막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젤란과 델 카노 이후 그리고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경과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이후 수십 년 사이에 땅이 구형이라는 고백이 교회의 올바른 신앙의 보편성에 부합하는 교리로 전개되어 갔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요동치고, 존재하는 장소인 이 구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적인 신앙이 그러하듯, 낭송될 뿐 아니라 삶 속에서 보존되고자 했다. ‘땅은 구형이다’라는 진술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자연과학적 가설이 아니었다. 이 진술은 근대인의 삶을 인도하는 확신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신앙은 “사상(思想)의 실현”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능을 포함한다. 신앙은 표상행위를 존재로 철저하게 밀고 가는 것(das Durchgreifen vom Vorstellen auf das Sein)이다.

따라서 땅의 발견과 네트워크화에 대한 보고서는 시종일관 신앙의 역사였던 하나의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탐험가들의 신앙, 노획물이 시야에 들어 올 때까지 계속하여 수평선을 응시했던 정복자들의 신앙,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다’라는 테제를 진지하게 붙들고 놓지 않았던 항해자들의 신앙을 다룬다.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고, 노획물들이 수평선 저쪽에서 출현했다. 그리고 배들이 암초에 좌초되어 바다 속에 머물러 있지 않는 한 그 배들은 되돌아 왔다. 이러한 발견, 이러한 출현, 이러한 귀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나 하는 문제는 이 사건의 행위자들에게는 그들이 신에 의해 탐험가로, 정복자로 그리고 귀향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유럽의 지구탐험대원들의 성공은 변화된 빛 아래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오늘날 땅이 둥글다는 당시의 믿음은 상상을 참인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었다는 점을 안다. 땅이 둥글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남으로써 선원들의 신앙은 보답을 받았다. 이 신앙은 지구와 관련이 있는 가설들, 상들, 이야기들, 지각들 그리고 감각들에게 존재론적인 무게를 부여했는데, 즉 대상의 존재 자체가 자기 신자들을 자기편으로 이끌어 오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적인 무게를 부여했다. 땅을 점차 땅-존재(Erde-Sein)로 확신 해 가는 상황은 그 이후 현실의 취향을 규정하게 되었다. 실재로 추적당하는 추적망상증 환자가 있듯이, 둥근 땅을 상상하면서 실재로 그 땅을 한 바퀴 도는 선원들이 있다.

우리의 논의의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의 거창한 말의 등장을 위한 막이 열리는데, 그것은 곧 ‘15세기에서 16세기로의 전환기에 땅의 탐험가(Geomanen)들의 믿음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처음에는 감춰져 있지만 그 다음에 드러나는, 처음에는 멀리 있지만 다음에는 가까워진 그런 진리이다. 구형의 땅과 그 속의 보물들이 드러나고 가까워지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기 때문에 행위(Aktion)로서의 세계사, ‘동시적 쓰기’(Mitschrift)와 ‘추후적 쓰기’(Nachschrift)로서의 세계사가 있었다. ‘드러냄’과 ‘가까이 다가옴’이라는 과제가 상대적으로 유한한 과제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혹은 이야기)는, 대충 말해서,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진행과정의 목표지향성은 암시적이며, 따라서 계몽된 독자들은 오히려 반사렌즈에 의한 기만을 실재 사건으로 믿고 싶어 한다. ‘우연한 사건들에서 처음의 의도들을 추론해도 된다’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통상적인 목적론적 끼워 넣기들 중 하나와 우리는 아무 관련이 없는가?

역사가 여기에서처럼 다뤄지면 세상의 관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놓이게 된다. 즉 ‘둥근’ 땅이라는 표상은 실제로, 스스로 실현되어 가는 예언이 그러하듯이, 500년 세월 동안 서구 인간의 의식과 그들의 매체에 둥지를 틀었다. 둥근 땅이라는 표상은 소수의 활동적인 사람들을 전례가 없는 여행길로 이끌고 갔다. 이 표상은 정복을 위한 출정, 사도행전 그리고 탐구과정 등이 실용적으로 융합된 것이다. 하지만 지구가 구형이라는 표상은 상징적인 형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물리학의 요청 그 이상이었다. 건장한 뱃사람, 인내심 있는 지도제작자, 금속 중독증에 걸린 왕들, 뱃심 좋은 향료상들 등은 참이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은 이 이념의 담지자들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모르거나 거기에 무관심한 최후의 한 사람이 눈앞에 제시된 명증성에 굴복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거들을 수집하였다. 근대에 대한 서사는 ‘이 (‘구’라는) 기호에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sc. globi) vinces’)라는 명제에 대한 하나의 긴 주석처럼 읽힌다. ‘구’라는 기호가 ‘십자가’라는 기호를 추월한다. ‘역사’(이야기)는 바로 이 명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와 구가 동등하게 놓여 있는 한 “역사”의 출구는 열려 있는 것으로 현상한다. 십자가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내는 추월훈련이 끝남으로써 “역사”라는 현상을 ‘구(球)-신앙’의 성공보고서로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든 장(場)은 닫힌다.

오늘날 인간들에게 지구-선교(Globusmission)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성공을 이룩함으로써 끝났다. 어느 정도 이성적인 동시대인들이 이미 확립된 구-신앙의 타당성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된 이후부터 새로운 [구]기호는 옛 [십자가]기호와 유사한 방식으로 퇴색되었다. 이 새로운 기호는 옛 기호처럼 자기 자신의 과잉 때문에 몰락한다. 여전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수정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할 것이다.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뱃사람들의 신앙은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지식은 통속화, 전문화되었다. 16세기의 구-신앙인은 포스트모던적 지구과학자가 되었다. 그들 중 11,000여명이 2003년 4월 유럽-아메리카 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니스에 모였다. 비행기로 여행할 때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그들의 이론적 욕망의 진기한 대상을 공중에서 짧은 순간만 응시했을 것이다.

우주 안에서의 땅의 형태와 위치에 대한 콜럼버스 이전의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모든 생각들은, 새로운 지식관계의 결과로 인해, 전근대적인(vormodern) “세계상들”로 자리매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문에 새 시대(근대 Neuzeit)를 세계상의 시대(Zeit des Weltbildes, 위 xx쪽 참조)로 해석하는 하이데거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유럽인들이 배로 이 땅을 일주할 수 있을 만큼의 명민함을 결코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고 할 경우에만 하이데거 역시 대체적으로 옳을 것이다. 이 땅은 일주되었고, 그 결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타당한 지식이 존재한다. 비록 사람들이 집에서 이 지식으로부터 창백한 지도만을 보며, 제국주의자들의 시끄러운 소리에서 그 메아리를 청취하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를 일주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 바닥에 붙박여 있는 모든 음유시인들, 그리고 모든 샤만이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풍경 속에서 말하는 세계에 대한 진술들은 “세계상들”로 설명되어도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진술들은 실제로 세계에 대한 과거의 상상, 즉 올바른 지식과 더 나은 지식이 없는 형상, 총체적인 항해의 시기 이전에 나온 지역적인 시(Poesie)가 더 이상 아니다. 세계에 대한 근대인의 지식이 확실히 어느 정도 모사(Abbildungen)에 묶여 있긴 하지만, 이 지식은 ― 하이데거는 이 지식을 오해했다 ― 최종 심급에서 어떤 상(Bild)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뱃사람들의 육체 안에 있는 대양의 소리를 서술하고 있다. 지구에 귀를 대고 듣는 사람은 그 안에서 폭풍우와 해안에 부딪혀 오는 파도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서 철학적으로 사려 깊은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인간에게 […] 분명하고 확실하게 될 사실은 그가 태양과 땅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땅을 느끼는 손을 알고 있을 뿐이며,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란 오로지 표상으로 현존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뱃사람들의 시각과 지구화에 기여한 다른 활동가들의 시각에서 우리가 덧붙여 말할 수 있는 바는, 앞으로는 지구가 오로지 느끼는 손을 위해서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젤란과 메르카토르(Merkator) 이후에 우리가 지구를 일주한 배들만을, 위대한 여행의 진리를 서술하고 있는 지도와 지구의(地球儀)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계의 또 다른 저쪽 끝의 목소리들과 상들(Bilder)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전화와 모니터도 알고 있다.

지구권선교의 성공은 그 상속자들에게 더 이상 성공으로 생각되지 않게 될 만큼이나 절대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게네사렛 호수에서 밀비쉬(Milvisch) 다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신앙의 놀라운 확장을 위해 성령에게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성령은 왕국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근대 이후(nachmodern) 시기의 인간은 ‘땅은 이미 언제나 둥글었었고, 이러한 사실은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라는 통찰에 만족한다.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이런 통속성을 저지하기 위해 성령이 출현하지도 않는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도움은 우리에게 아마도 불필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실재 세계가 마침내 지-구(terrestrische Kugel)로 되었는지’를 언제나 아주 집중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러한 서사는 ‘모든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했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모든 에피소드들은 임의로 변화되고 자의로 어떤 계열에 꿰맞춰져서 결국 실현된 구(Globalität)의 어떤 형태에 이르게 된다. 때가 무르익었을 때 뱃사람들의 삶과 항해사들의 항해일지에서 사실(TATSACHE)은 명백히 드러났다.

최근에 몇몇 “세계화 반대자들”(Globalisierungsgegner)은 인간이 지구단계(globales Stadium)에 도달하지 않았었더라면, 혹은 전승된 통찰에 따라 대양을 피하고 마을과 소도시에서 참고 견뎠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는 그들의 확신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땅은 일주가능한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다’라는 사명의 관점에서 볼 때 불신이라는 이런 때늦은 형식이 ‘인간은 현실의 구에 대한 진리와 더불어서 의미 있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불신에 의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런 주장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불신자들은 명백히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로 남아 있고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인간의 국지적이고 식물 같은 삶의 방식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사명의 비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충분한 근거를 대면서 그들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I.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은 유럽 사람들이 새로운 것의 생성을 위해 고통 받을 (그리고 또한 고통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유럽의 명예이다. 왜냐하면 16세기의 밀어붙임이 없었다면 근대세계는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가 생성되었다는 사실은 더 좋은 일이다.”

철학도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면, 위와 같은 진술이 그런 고백일 것이다. 모든 존재자(Seiende)가 그 근본에 있어서 선하다면/좋다면 그의 선함/좋음은 생성되는 자에게로도 역시 확장된다. 이 땅이 세계로 생성되어 가는 과정이 여기서 예외일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의 논리적인 결과를 따라가자면 세계사(Weltgeschichte)라는 의미에서의 “역사”(Geschichte)개념은 1492년에서 1974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축소된다. 1492년은 콜럼버스의 제 1차 여행의 해이고, 1974년은 포르투갈의 마지막 식민지들이 (“장미혁명”의 결과로) 그 모국으로부터 독립하는 해이다. (역사의) 이러한 축소는 두 가지 덕스러운 점에서 추천될 만하다. 첫째, ‘자본주의적인 발전도정은 유럽의 모형에 따라서 이뤄져야 한다’라고 지상의 모든 민족과 문화를 강요하는 진화론이라는 규범적인 비정상성의 도그마, 즉 “서양에서처럼 땅 전체에서도” 타당하다는 도그마가 저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 (세계)역사의 장을 세계체제 형성을 위한 사건들의 복합체로 축소함으로써 “역사의 종말”(Ende der Geschichte)이라는 지금까지의 정리(Theoreme)가 지니고 있는 의미 있는 내용들이 보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말”은 ‘지-구’(Erdglobus)라는 근대적인 지리적인 상이 대부분의 지상의 거주자들에게 그들의 위치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는 특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역사의 종말”은 거의 동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즉 땅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상이 전개되어 가는 역사가 어느 정도 끝났다면 “세계”(Welt)의 역사는 종말에 도달했다. 이 상을 처음에 누가 그렸었는가 하는 사실은 이 상이 일단 확립된 이후에는 더 이상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결정적인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을 지리적인 문맥에서 서술할 때 그 상을 철회할 수 없이 타당한 묘사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지구시대의 특징은 수정화된 세계체제의 테두리 내에서 [세계체제로 무차별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러나 문명에 맞게 길들여질 수 있는) 문화다양성이 공세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있다. 지구시대로의 이행과 더불어 근대라는 정규시간에 이은 추가시간(Nachspielzeit)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확장주체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힘이 소진되었다는 사실은 1945년 이후 확고해졌다. 옛 세계는 그들의 첫 번째 타격 능력을 이 행성을 열어젖히는데 소비했으며, 그 나머지 에너지를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소진해 버렸다(그 두 전쟁 가운데 두 번째 전쟁은 피할 수도 있었을 첫 번째 전쟁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역사적 판도의 주체들은 그들의 상호작용을 위해 탈유럽에 무게를 둔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이 시나리오들은 세계의 세계생성(Weltwerden der Welt)이 이미 다 알려져 있는 방식으로 거행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는 보다 중요한 것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나리오이다. 유럽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세계의 미래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로 “역사”가 삶을 위해 갖는 유용성과 단점의 본질은 무엇보다 ‘역사는 손해산정(Schadenserhebungen)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료들을 수집한다’는 사실이다. 역사(Historie)는 희생자들이 사건발생 장소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주소를 알려 준다. 희생자들은 범죄자들 역시 동화에서만 범죄의 광장으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장소에서 그들처럼 되돌아온 범죄자들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사실을 제외하면 “역사”란 어제 내린 눈이다. 1945년 이후의 탈식민화와 냉전시대의 군사적 무승부는 이 눈이 얼마나 빨리 녹는지를 보여준다. 1949년 인도가 영연방 제국에서 이탈했다. 1974년에 포르투갈 세계제국의 잔유물이 증발했다. 1990년에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공격적으로 세계를 넘보던 특징을 지녔던 옛 유럽의 마지막 이데올로기가 무대를 떠났다. 중국이라는 고립된 국가공산주의는 세계계획(Weltprojekt)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중국이 큰 범위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분리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중국은 아직 의미 있게 남아 있다. 중국 공산주의는 오늘날 이미 그 윤곽이 드러난 ‘세계체제의 권위적인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21세기의 기본노선을 위한 범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철학회 홈페이지(http://www.hanch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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