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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87년생 정재훈
나, 87년생 정재훈
  • 정재훈
  • 승인 2023.04.11 08: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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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정재훈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정재훈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극중 동훈이 지안에게 건네는 대사다. 건축구조기술사인 동훈은 인생을 내력과 외력의 싸움으로 정의한다. 외력보다 내력이 강하면 삶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삶을 지탱한다고 믿어 왔던 나라는 건물의 기둥이, 사실은 나의 내력의 근간이 아니라면?

요즘 나는 세종에 산다. 세종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부산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내가 소속된 곳은 학교와 회사 둘 다다. 나는 전업 회사원임과 동시에 전업 학생이다. 이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 공부와 경제활동 둘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 내가 결정한 일이다. 부산과 세종을 오가는 기차 안의 내 모습, 그 모습이 나의 현재 상태를 말해준다.

논문 작성은 대학원 진학의 주요 목적 중 하나다. 지식을 생산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려면 생계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동안 나에게 생계의 유지와 지속적인 연구라는 두 요소는 한쪽에서의 필요가 충족되면 다른 한쪽의 필요도 함께 충족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쪽의 필요가 충족되면 다른 한쪽의 필요가 충족되기 힘든 관계 속에 있었다. 너무 무턱대고 살아왔나? 어쨌든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과감하게 해소해야 한다. 이른바 균형점을 잘 찾거나, 한쪽 요소를 다른 한쪽 요소에 비해 극단적으로 강화시켜야 한다.

나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내가 써먹었던 방법보다 더 전략적이고 스마트한 방법은 없을까? 아마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인 듯 싶다. 내 연구를 지원해 줄 수 있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내가 만들 상품/연구의 차별성을 잘 드러내야 한다. 

내가 국가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이 있다면 사회의 입장, 공동체라는 것이 있다면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생활하고는 싶다. 사업계획서/연구계획서에 써야 하는 마지막 항목, ‘기대효과’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말장난인 것 같기도 하고, 고착화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 같기도 해서다. 그러나 나는 쓸 것이다. 작은 틈새로 삐져나갈 기대치 못한 효과를 기대하면서. 

금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들의 파도다. 돈의 흐름은 세계의 중심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이 땅에서 그 흐름이 집중되는 곳은 서울이고, 서울은 상품화된 그리고 상품화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나는 세종이라는 남한 국토의 중간쯤에 위치한 도시에 살면서 서울로 가는 상행선이 아닌 부산으로 가는 하행선을 탄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면 좀 더 나은 생활을 계획할 수 있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생, 인문분야 학문후속세대. 이 이름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거나, 무엇을 쟁취해내기 위한 투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순응하고 싶지도 않다. 철학과 박사과정생이 그 고유성을 인정받고 사회의 진지한 구성원으로 등록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 우리 시대 철학의 기능을 고민해야 할 테고, 박사과정생으로서 이 국가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며, 성과를 들이밀며 지향하는 바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켜주었는데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또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나는 87년생 정재훈으로서 그리고 중‘간’에서 온몸으로 타협없이 살고 있다. 나의 마음속에는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으며 나의 미래의 끝까지 기필코 지켜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의 내력이 철학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력과 외력을 구분하고 외력을 버텨내는 삶은 너무 힘들지 않을까. 그 대신 외력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와중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시대 속에서의 나의 계급과 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정재훈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부산대 철학과에서 「체념과 행동: 벤야민과 블랑키의 역사관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연구조원으로 재직 중이고, 부산대 대학원 철학과 사회철학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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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2023-04-10 09:59:03
안녕하세요. 글쓴이 정재훈입니다.
제목, 몇몇 문장, 표현을 바로잡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본문 중 '계약'이라는 표현은 "인문사회분야 학문후속세대의 연구력 강화를 위한 실태조사 및 과제: 박사과정생을 중심으로"(2022) 인터뷰에 참여했을 때 연구진으로 계셨던 한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온 것입니다(본문에 설명을 넣어뒀었는데, 보기 매끄럽지 않아 지워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