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0:15 (토)
피라미드에서 느낀 기시감
피라미드에서 느낀 기시감
  • 김소영
  • 승인 2023.03.20 0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_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최근 은퇴해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집트를 다녀왔다. 기자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앞에서 약간의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 사진으로만 보던 에펠탑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라고 한다. 피라미드의 규모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과 스핑크스는 생각보다 크다는 것. 나는 둘 다 놀라웠다. 규모 때문이 아니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북적대는 카이로의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우연히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19 봉쇄 조치 중에 실내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의 서평을 본 적이 있었다. 아파트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피라미드의 사진을 보았다. 여태까지 보았던 황량한 사막에 높이 솟은 피라미드의 사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수십만 명이 수십 년에 걸쳐 돌덩이를 쌓아올린 것은 파라오의 절대권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휑한 사막 한가운데 피라미드를 세웠을까? 내세를 믿는 이집트인들이라면 죽은 왕이 드나들기 쉽게 경복궁처럼 시내 한가운데 세웠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곳은 모래더미 사막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의 사진에는 기자 피라미드 바로 앞에 나일강의 넓은 강줄기가 보였다. 이집트 지리를 보면 수천 년 동안 대부분 인구가 나일강 줄기를 따라 살았었다. 인구 과밀과 환경 문제로 각종 인프라를 나일강 외곽으로 확장하는 게 도시계획의 중요한 방향이었다. 지금도 카이로 동쪽에 현 이집트 대통령의 최대 인프라 프로젝트라는 신행정수도를 건설하고 있다.

세 기의 파라오 무덤과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기자 지역은 나일강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다. 기자 피라미드는 인류 최초의 신도시 건설계획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휑한 사막에 죽은 파라오를 버려둔 게 아니라 신도시 한가운데 모셔놓았던 것이다.

5천년 전에 이 거대한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한 기술력과 자원 동원력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인들의 문명이 어떻게 그리 허무하게 무너져버렸을까? 실제로 오랫동안 해외 이집트학의 대가들을 사로잡은 것은 이집트인들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규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그것이 사라졌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버전으로 바꾼다면 원자폭단으로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사람을 달에 보내고, 방구석에서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인터넷을 발명한 미국이 정말로 무너질까 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고고학자 에릭 클라인이 『기원전 1177년 : 문명이 붕괴한 해』라는 책에서 제시한 가설은 한마디로 퍼펙트 스톰이었다.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는 늘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런 자연재해가 한꺼번에 혹은 연달아 일어나는 와중에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양극화 등 사회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모든 문제가 통제 불가능한 퍼펙트 스톰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퍼펙트 스톰을 예견하는 듯한 일련의 사태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다. 인류 최초의 신도시를 건설했던 문명의 붕괴에서 피라미드보다 더한 기시감이 든다.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