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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 범주 벗어난 ‘인류세’…과연 지질시대에 포함될까
지질학 범주 벗어난 ‘인류세’…과연 지질시대에 포함될까
  • 최덕근
  • 승인 2023.03.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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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인문학자가 본 인류세

“1만 년보다 짧은 단위의 지질시대는 지질학의 범주를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인류세를 지질시대의 한 단위로 설정할 경우,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인류세의 GSSP를 퇴적층에서 정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컬럼비아대출판부에서 나 온 인류세 책의 표지 그림이다. 지구 위에 인 류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컬럼비아대출판부

요즈음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구글 학술검색에서 ‘Anthropocene’을 찾으면 37만 건이 넘는 논문이 검색된다. 우리말로 ‘인류세’를 찾아도 8만 건 가까운 결과가 나온다. 인류세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때가 2000년이므로 인류세를 다룬 논문이 연평균 1만 건 이상 발간되었다는 뜻이다. 인류세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류세(人類世)라는 용어는 198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공론화시킨 사람은 독일의 대기화학자로 노벨상을 수상했던 파울 크루첸(1933~2021) 교수였다. 그는 2000년에 열렸던 국제지권생물권계획(International Geosphere-Biosphere Program) 회의에서 18세기 후반에 시작됐던 산업혁명과 함께 활발해진 인류의 활동에 의해 수권·기권·생물권의 환경이 위기에 처했음을 강조하자는 취지로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지질시대로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빙하 시추공 자료에서 18세기 후반부터 대기 중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함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양상에 주목하여 산업혁명의 시기, 더 구체적으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던 서기 1784년을 인류세의 시점으로 제시했다. 

 

인류세연구그룹 구성해 타당성 검토

2009년 국제제4기층서위원회는 인류세연구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을 구성해 인류세를 공식적 지질시대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타당성 검토에 나섰다. 인류세연구그룹은 오랜 논의를 바탕으로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지질시대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칙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인류세의 시점을 18세기의 산업혁명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엽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여러 가지 환경지수(CO2, CH4, NOX 등)의 급격한 증가 추세가 관측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시기에 일어났던 환경변화를 ‘급가속(Great Acceleration)’으로 표현하면서 인류세의 시점으로 핵폭탄 실험 후에 플루토늄-238의 양이 급증한 1952년을 제안했다. 만약 이들의 제안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인류세는 100년 미만의 무척 짧은 시대가 될 것이다.

인류세는 개념적으로 지질학 용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더 각광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인류세는 인간의 무분별한 산업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이 크게 악화됐음을 강조하는 용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사회적·환경적 문제점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는 인류세처럼 함축적인 용어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인류세라는 용어가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한편 많은 지질학자들은 인류세를 지질시대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고 있다. 국제층서위원회는 2018년 지질시대의 마지막 시대인 홀로세를 3개의 절(節)로 나누었다. 그런 조치는 아마도 인류세에 대한 지질학계의 불편한 심기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제층서위원회의 조치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에 인류세의 문제는 앞으로 한동안 뜨거운 논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질시대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지질시대의 정의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의 지질시대는 지구의 탄생에서 현재까지의 기간이다. 둘째, 지구 탄생에서 역사시대 이전(약 6000년 전)까지의 기간이다. 셋째, 가장 좁은 의미의 지질시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약 40억 년 전)의 생성시기에서 역사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지질시대’에는 암묵적으로 역사시대 이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지질시대에는 등급이 있다. 예를 들면, 누대(累代), 대(代), 기(紀), 세(世), 절(節) 등이다. 사실 지질시대 체계는 어느 한 사람의 제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특정위원회에서 한꺼번에 결정된 것도 아니다. 19세기 초엽, 유럽 곳곳에서 연구하던 지질학자들이 암석을 자세히 구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질시대 이름을 제안했고, 그중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자주 사용된 용어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지질시대 체계가 만들어졌다.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루첸 (1933~2021)은 인류세라 는 용어를 공론화시켰다. 사진=위키피디아

 

지질시대의 경계를 위한 퇴적작용

19세기 이후 오랫동안 사용돼 왔던 지질시대 체계가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엽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드러난 문제는 지질시대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국제층서위원회는 각 지질시대마다 전문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지질시대의 경계를 명확히 정하도록 요청했다. 지질시대의 경계는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단면에서 특정한 층준(層準)’을 기준으로 정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 기준은 국제표준층서단면·점(GSSP: Global Boundary Stratotype Section and Point)으로 불리는데, GSSP는 가능한 한 넓은 지역에 걸쳐서 대비(對比)가 가능해야 하며, 퇴적작용이 멈춘 적이 없는 구간에서 정해져야 한다. 

현재 지질시대는 크게 명왕누대·시생누대·원생누대·현생누대로 나뉘며, 현생누대는 다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나뉜다. 신생대는 고진기(Paleogene)·신진기(Neogene)·제4기(Quaternary)로 나뉘며, 오늘의 화두인 ‘인류세’는 제4기에 속한다. 제4기는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와 홀로세(Holocene)로 나뉜다. 플라이스토세의 GSSP는 2010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정해졌으며, 그 시점은 258만 년 전이다. 홀로세의 GSSP는 그린란드에서 시추한 빙하 코어로부터 2009년 정해졌는데, 그 시기는 1만1천700년 전(서기 2000년 기준)부터 현재까지로 지질시대 중에서 기간이 가장 짧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질시대는 개념적으로 역사시대 이전이라는 함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1만 년보다 짧은 단위의 지질시대는 지질학의 범주를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인류세를 지질시대의 한 단위로 설정할 경우,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인류세의 GSSP를 퇴적층에서 정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우리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근원적인 이유다. 

 

 

 

최덕근
서울대 명예교수·지질학
서울대 지질학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주요 저서로 『한반도 형성사』, 『10억 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지질시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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