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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었던 소련의 비즈니스 
돈 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었던 소련의 비즈니스 
  • 우동현
  • 승인 2023.03.16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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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③ 소련 재평가

2014년도 저작 『붉은 지구화』는 소련의 대외무역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자급자족을 추구한 강대국 소련’이라는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집는 과감한 해석을 제시한다.

지난 연재에서는 냉전에 대한 지구사적 접근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살펴보았다. 지구사적 접근은 냉전을 ‘탈(脫)냉전적’으로 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냉전사 다시보기는 가장 ‘오해된’ 냉전 국가인 소련에 대한 재평가와도 밀접하게 닿아있다. 1990년에 대한민국과 수교했던 소련은 대체 어떠한 나라였을까?

소련은 대체 어떤 나라였나?

소련의 기원은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인 10월 혁명을 통해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5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서 승리했고, 1922년 ‘창설 선언’을 통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캅카스의 네 공화국을 합쳤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들의 연맹, 소련이 선포된 순간이다.

세계무대에 등장한 신생 소련의 행보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미국과 서유럽은 ‘사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가진 나라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연합국은 러시아 내전에 직접 개입했고, 모스크바 지도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각종 금수조치(embargo)를 취했다. 볼셰비키의 1918년 채무불이행 선언은 소련을 신용불량 국가로 만들었다. 돈 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었다. 소련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역사학자 오스카 산체즈-시보니 교수의 2014년도 저작 『붉은 지구화』(Red Globalization)는 소련의 대외무역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자급자족을 추구한 강대국 소련’이라는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집는 과감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 해석은 ‘미소 양극 대결’로서의 냉전이라는 지배적인 인식을 겨냥한다. 비밀 해제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 그의 저작은 우리가 가진 소련의 이미지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미 국무부와 미국 학계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상상’에 더 가까움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기업만큼이나 상업적이었던 소련

모두 6장으로 구성된 『붉은 지구화』는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소련 대외무역사를 재구성한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1922~1953), 집단지도체제 시기(1953~1955), 흐루쇼프 시기(1956~1964)를 통틀어 소련 지도부의 핵심 관심사가 경화(硬化)인 미국 달러의 획득과 세계시장에 대한 ‘참여’였음을 증명한다. 요약하자면,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미국-서유럽의 자본과 선진 기술 도입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상업적 몸부림이다.

잠깐, 소련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참여’하려고 했다고? 소련의 대외무역은 세계 적화(赤化)의 야욕을 보여주는 증거 아닌가?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소련/러시아를 ‘냉전적’ 렌즈로 보는 한국인 독자들이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하지만 『붉은 지구화』는 소련 경제 관료들의 다채로운 무역·원조 전략이 기록된 수많은 자료를 엄밀히 분석했고, 소련이 자본주의 기업만큼이나 상업적 고려에 입각한 ‘비즈니스’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전후 미국의 원조를 받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일본은 달러와 석유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자국 공업이 파괴된 상태에서 세계 시장에 팔 고품질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미국이 부과한 규제도 있었다. 이틈을 파고든 소련은 원자재(천연자원)를 서독, 일본의 선진 기술이 만들어낸 제품(대형 파이프, 어선 등)과 맞바꿨다. 1957년에는 소·서독 장기무역협정과 소·일 무역협정이 각각 체결됐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인도네시아·미얀마·아프가니스탄·인도 등 제3세계는 주도적으로 소련과의 무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미국 및 식민모국과의 거래보다 훨씬 저렴한 대(對)소련 물물교환 무역이 세계 시장에서 탈식민 국가들의 숨통을 틔워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시장에서 소련의 대외무역 역량은 높지 않았다. 북한을 포함한 소련의 상대국은 거의 언제나 소련 제품의 품질을 문제 삼았다. 소련 관료들은 이러한 문제를 잘 인지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제품 생산의 차질, 배송의 지연, 소련 경제기구에 깊게 뿌리박힌 관료제는 세계 시장에서 소련호(號)의 경쟁력 상승을 심대하게 저해했다.

전체주의 자급자족 국가라는 이미지

『붉은 지구화』는 팽창욕으로 가득한 전체주의 자급자족 국가라는 ‘냉전적’ 소련 이미지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수치로 봐도 그렇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이 지출한 대외원조 총액은 미화 410억 달러이다. 이 액수는 같은 기간 미국이 이스라엘 한 나라에 준 원조의 크기에 불과하다. 인도에 대한 원조 규모를 놓고 봐도, 서독은 거의 언제나 소련을 앞질렀다. 

소련이 군사과학기술과 천연자원(특히 1970년대 이후 천연가스) 측면에서 냉전 강대국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미국-서유럽 주도의 세계시장에서 극히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아쉬움은 저자가 밝히고 있듯,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역, 대중(對中) 교역, 무기 거래를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자의 두 요소는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과 밀접하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공개된다 하더라도, 저자의 핵심 주장이 갖는 설득력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소련 재평가는 경제사 연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최근 출간된 유관 연구서들은 소련 내 관·학 연계루블의 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꿀 수 있어 굉장히 유용하다. 다음 연재에서는 소련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는 연구자들과 그들의 연구를 소개할 것이다.

우동현 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환경기술사, 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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