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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변신
우연과 변신
  • 강봉룡 목포대
  • 승인 2006.07.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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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강봉룡 / 목포대·한국사 ©

내가 역사학이라는 전공을 택한 것도, 역사학 연구로 직업을 삼은 것도, 알고 보면 모두 우연인 것 같다. 역사학에서도 한국사, 한국사에서도 고대사로 폭을 좁히고 구체화하면서 학문이라는 세계에 진입한 것 역시 우연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그럭저럭 큰 고민 없이 논문들을 생산해 내는 일에 익숙해졌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9년 필사본 ‘화랑세기’라는 문건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화랑세기’眞僞 논쟁이 촉발되었다. 나는 그 논쟁의 중심에 성과 결혼이라는 주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간 한국사학계에선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나는 모대학에 출강하면서 감히 ‘한국사에서 성과 결혼’이라는 낯선 주제를 내걸고 한 학기 동안 강의하기로 하였다.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그간 내가 탐색해 왔던 고대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허탈함과 함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는 뿌듯함이 교차하였던 것 같다.

1995년 목포대 사학과에 부임하면서 조심스럽게 ‘생활문화사’라는 과목을 새로 개설할 것을 제안한 것은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생활문화사’를 담당하면서 거칠기만 한 강의 내용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역사를 통해 숨쉬는 인간의 삶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목포대 사학과는 지방사 연구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나 역시 그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전남의 고대사 연구에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특히 영산강유역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옹관고분의 존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대규모 옹관고분을 조영한 영산강유역 세력집단의 실태와 성격에 대한 논문들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막연히 백제사의 일부로만 여겨왔던 전남의 고대사가 새롭게 다가왔고 한국 고대사 전체의 체계에 대한 반성도 일었다.

지방사에 대한 관심은 해양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목포 주위에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서남해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섬의 60%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니 다도해란 말이 실감이 난다. 나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를 통해서 섬 조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간 무관심의 영역으로 방기해 왔던 역사의 흔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섬과 바다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무심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랐다. 고심 끝에 ‘도서·해양의 역사와 문화’라는 강좌를 개설하여 연구와 강의를 힘겹게 병행하면서, 바다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의 족적을 거칠게나마 추적하는 새로운 재미를 경험하고 있다.

현상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반면 이 세상은 변하지 않으려는 속성=관성도 있는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을 ‘지조’라 하여 미덕으로 여기고, 시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행위를 ‘변신’이라 지탄하곤 한다.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으되 변하는 것을 멀리해야 하니, 모순이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나의 역사 연구 과정은 ‘지조’ 보다는 ‘변신’에 가깝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나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역시 우연이 작동한 탓으로 돌리고 싶다. 지조와 인과적 필연성을 중시하는 역사학의 관행에 비추어 보면, 나의 우연과 변신의 성향은 이단에 가깝다. 다만 이것이 변하지 않으려는 역사학의 관행에 ‘우연히’ 자극적 요소로 작용하여 새로운 변화의 활력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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