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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능력주의, 불평등을 먹고 자란 괴물
한국의 능력주의, 불평등을 먹고 자란 괴물
  • 최승우
  • 승인 2023.02.20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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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㊱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28일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능력주의, 사회적 아노미, 개인의 자유」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7강은 정과리 연세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한국 문학 속의 자유와 자유주의」, 제38강은 원용진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의 「한국 대중문화 속의 개인과 자유」, 제39강은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신학과)의 「한국에서 근대적 자유와 기독교」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한국의 중산층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누적된 유리함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으로 적어도 사반세기 이상의 불평등 체제 변화의 결과물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불가사의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개혁의 영향으로 불평등 심화, 노동 시장 양극화, 빈곤층 급증 등 분배와 관련해 큰 변화가 나타났다. 외환 위기로 30대 재벌 기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과다 부채로 몰락했지만, 살아남은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2020년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해, 저개발국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렇지만, 노인 자살율과 노인 빈곤율은 세계최고 수준에 달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와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최고 수준으로 의아스러움의 대상이 됐다. 소득 1인당 3만5천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불평등한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을’들의 경쟁은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라는 K-컬처를 빛낸 국제 영화제 수상작들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로테스크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오늘날 분배와 관련해 한국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공유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분절 능력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능력을 중심으로 사회 조직과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집합적 심성이자 제도이다. 집합적 가치관으로서의 능력주의는 능력 있는 사람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른 응분의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공정하고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부모의 학력과 소득이 자녀의 고등학교 유형과 진학에 영향을 미친다”라며 “신생아는 불평등 체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제도로서의 능력주의는 능력주의를 실현하고, 유지 혹은 강화하는 다양한 제도(교육 제도, 시험, 고용과 임금 체계, 인사 제도)를 이루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와 제도로서의 능력주의가 맞물리게 될 때, 능력주의는 견고한 사회 조직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다양한 계기로 부각됐고, 그에 따라 능력주의의 내용도 변화하면서 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능력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능력이다. 시장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은 시장 가치가 있거나 혹은 시장 가치와 연관된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돈과 관계가 되는 능력이다. 시장 가치는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보통 사람들이 인정하는 능력은 대체로 교육과 관련이 있다. 20세기 들어서 의무 교육 제도가 확대되고, 대학이 교육과 지식 생산의 핵심 기관으로 발전하면서, 고등 교육을 받고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전문화가 이뤄졌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개인의 지능은 상대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부분이 많지만, 교육의 성과는 지능뿐만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국에서 제도적으로 능력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교육이다. 공교육은 국가가 개입하는 교육이고, 사교육은 교육 시장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학습을 통해서 학생들의 교육 성취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특히 사회적으로 교육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는 제도는 사교육이다. 한국 사회에서 시험 능력주의는 시험이 능력을 평가하는 공정한 수단이고, 시험 점수가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라고 믿는 심성이다. 시험이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가 여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고, 시험이 절차적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시험을 통해서 능력을 평가받고, 생애 과정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 능력주의가 한국인의 심성으로 내면화됐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봉건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됐다. 자유주의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시민권에서 정치적 참정권이나 사회적 시민권과 같은 복지권으로 확장됐다.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모두 동일한 권리의 주체이자 사회적 선택의 주체라고 가정한다. 능력주의는 능력이 개인의 능력이고, 개인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전제한다. 

그렇다면, 개인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모든 개인은 전체 생애 과정에 걸쳐서 가족의 영향을 받고, 사회와 시대의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환경은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요소로 기능하는 동시에, 어려움과 제약을 가한다. 개인은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서 중산층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최근 많은 연구들은 영유아 발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가정 환경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영유아의 인지 능력과 언어 능력은 가족 환경에 따라서 발달이 빠르거나 지체될 수 있다. 영유아와 청소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가족 배경과 불평등 체제 내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생애 과정에서 계속 여러 가지 가능성과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보육과 교육 환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는 자녀의 생애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영유아 시기의 이점이나 불이익이 시간이 흐를수록 누적돼 커지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사회경제적인 격차와 문화적인 이질성은 더욱 확대된다. 상대적인 유리함과 불리함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며, 초기의 유리함이나 불리함이 다음 단계에서 유리함이나 불리함으로 이어지면서, 전 생애 과정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은 이를 마테 효과라고 불렀다. 한국의 중산층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누적된 유리함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것으로 적어도 사반세기 이상의 불평등 체제 변화의 결과물이다.

부모의 학력과 소득이 자녀의 고등학교 진학에 영향을 미쳐서, 고등학교 유형에 따라 부모의 학력이 크게 다르게 나타났다. 과학고 학생 부모들의 83.91%가 4년제 대학 이상의 졸업자이었고, 고졸자 비율은 13.17%에 불과했다. 반면에, 특성화고 학생 부모들의 경우,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는 20.20%이었고, 고졸 이하가 70,64%를 차지했다. 이러한 추세는 마이스터고, 체육고, 일반고, 자사고, 예술고, 외국어고순으로 대단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부모의 학력과 자녀의 고등학교 유형 선택이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공무원 시험을 보는 청년들에게도 부모의 소득과 학력이 영향을 미친다. 공무원 시험은 누구에게나 자격 제한 없이 열려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데, 민간 부문에서 취업이 어렵고 또한 고용 불안정이 높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매년 수십만 명이 준비해 2%만 합격하는 것으로 알려진 공무원 시험은 얼마나 열려있는 기회의 문인가? 최근 경험적인 연구는 5급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경우 계층이 높을수록 높아지지만, 반대로 9급 공무원 시험의 경우는 계층이 낮아질수록 높음을 밝히고 있다. 계층에 따라서 원하는 공무원 급수가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합격률의 경우, 5급 공무원 시험 합격률은 상위 계층일수록 그리고 학업 성취가 높을수록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9급 공무원 시험 합격률에서도 대체로 계층이 높을수록 그리고 교육 성취가 높을수록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공무원 시험에서도 사회 계층에 따라 응시율과 합격률에서 체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생아는 불평등 체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본인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바꿀 수도 없다. 특권을 누리는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기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아기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부모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불 능력이 중요한 사교육 중심의 교육 제도와 환경 속에서 영유아와 청소년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영유아 시기부터 대졸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족 배경이 생활 기회의 격차를 체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피케티가 밝혀낸 세습 자본주의가 서구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한국에서도 뚜렷하게 자리를 잡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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