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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 이미 서구 근대를 경험했고, 세계로 나아갈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국철학, 이미 서구 근대를 경험했고, 세계로 나아갈 방법론을 고민해야” 
  • 최재목
  • 승인 2023.02.22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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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진·조성환 교수 서평에 답하다 ② 한국에서 인문학 하는 태도의 문제

지난 1월 3일자 <교수신문>에, 이우진(공주교대 교수·교육철학)·조성환(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한국철학) 두 교수가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의 『비교양명학: 한중일 삼국의 시야에서』(2022년, 상해 고적출판사 간행)를 읽고 서평을 실었다. 서평 마무리 부분에서 두 교수는 저자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다. 최재목 교수가 첫 번째 질문 ‘기후변화 시대, 동양철학의 비전은 있는가?’에 대한 답변(2월 1일자 교수신문)에 이어, 두 번째 질문 ‘기울어진 철학의 현장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보내왔다.

이우진·조성환 교수의 세 가지 질문은 이렇다. 
①전통 동양철학의 현재적 의미 : 생태위기와 기후변화로 지구에서의 거주가능성 자체가 문제 되고 있는 오늘날, 유학은 인류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 

②한국에서 인문학 하는 태도 문제 : 한국의 인문학은 여전히 ‘유럽중심주의’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철학의 중심은 항상 ‘서양’이고, 비서구지역의 철학은 ‘주변’에 밀려나 있는 인상이다. 이 ‘기울어진 철학’의 현장을 우리는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③한국철학의 위상과 과제 : 오늘날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과연 얼마나 수준 높은 연구를 학계에 제공하고 있는가? 여전히 한문 번역 중심의 경학적 연구가 중심이 아닌가? 그래서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근대를 통해 얻은 것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학문 해석의 기법과 방법론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떠안은 과제는 
‘우리 것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깊은 안목과 상상력’, 
그리고 ‘서구 세계를 향한 충실한 번역의 실천’이다.

한국의 인문학에 대한 이우진·조성환 교수의 진단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는 말은 이미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한국학 자체로 국제적인 무대에 진입한 예가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신동원 교수(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장)의 저서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하늘·땅·자연·몸에 관한 2천 년의 합리적 지혜』(책과함께, 2021)는 우리 학술의 진척 수준을 잘 보여주는 국제적 안목의 성과다. 나아가 신 교수는 2010년부터 작년까지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국문판 30권, 영문판 7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동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학계에 우리 전통 학술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전 30권이 12년만에 완간됐다.

‘기울어졌다’ 보다는 ‘다르다’는 인식부터

이처럼 현재 우리 인문학과 철학의 운동장이 서양 중심으로 ‘기울어졌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운동장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럽이 아시아의 철학사상에 눈을 돌린 예들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동아시아(중국, 한국, 일본)의 인문학과 철학은 거의 서양과 단절된 채 독자적, 내재적 논리로 진전돼 왔다.

그럼에도 서양이 동아시아에 눈을 돌리는 것은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룬 ‘인도유럽어족’ 전통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모색을 해 본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시아의 성장에 따라, 차츰 저물어가는 서양 자신의 사유에 활력을 불어넣는 색다른 필드를 찾아 나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도 우리의 활로를 위해 ‘한자문화권’ 전통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모색을 해볼 능동적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라의 원효, 의상, 원측, 그리고 조선의 퇴계처럼 당시에 이미 국제 무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현재 우리 한국철학은 이미 서구 근대의 학지(學知)를 다각도로 경험했다. 또한 세계로 진출할 방법론도 고민 중이다. 아니, 그럴만한 충분한 여건도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어쨌든 요청받은 질문 -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주변으로 밀려난 듯한 학술을 국제적 무대의 중심에 우뚝 세워놓을 방법 - 에 대해 필자의 고민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보기로 한다.

<교수신문> 1월 2일자 5면에 실린 이우진, 조성진 교수의 서평

우리의 근대, 그 어설픈 풍경과 學知

현재 한국에는 아시아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타율적 근대를 경험하고, 해방 이후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를 통해서 자율적으로 근대를 완성해갔다. 그런 가운데 서구는 이미 어느 정도 우리 내부에 침투해 있다고 봐야 한다. 

방법과 방향은 다르지만, 아시아는 나라별로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서구를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근대는 야수이면서 미녀였다. 서세동점의 충격에 휩싸인 근대기 아시아의 민족주의는 ‘기독교’와 ‘부르주아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

대개 중국은 중체서용을, 한국은 동도서기를, 일본은 화혼양재를 대응 방법론으로 삼았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주의 운동을 승화시켰고, 한국은 일제식민지를 겪으면서 기독교를 성장시켰고, 일본은 기독교 수용을 거부하고 천황제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탈아입구와 제국주의 길을 걸었다. 

사실 한국의 근대는 서양 근대의 ‘과학기술’과 그 근저의 정신(ratio, 합리성 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도(道), 리(理), 인(仁)’과 같은 전통 유교 이념으로 대응하려 했던 한계성을 갖는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내지 동양 철학, 인문학은 독자적인 체계나 논리를 구축했다기보다 근대의 실험, 연습을 지속하거나, 게다가 급박하게 불어 닥친 국제화, 세계화의 길마저 걸어야 했다. 따라서 근대+현대의 실험과 모색이라는 중첩된 어설픈 연습기를 겪는 광경을 보여왔다.

예컨대, ‘실사구시 등의 실학 붐’, ‘유물주의와 기 철학의 유행’, ‘이성주의, 국민 윤리・도덕의 강조와 칸트, 퇴계 리학의 성행’, ‘아시아-유교 자본주의 재평가 논의’, ‘유물주의, 유심주의 논란’, ‘여성, 인권, 생태, 몸, 생명 담론의 폭발’, ‘과학기술, 이공계 학술의 발전’, ‘국제화’, ‘세계화와 지방화의 합성어인 글로컬리제이션(=세방화)의 등장’, ‘한의학, 음양론에 주목’, ‘한국학의 국제화’, ‘K-문화의 세계무대 진출’ 등등. 

이처럼 숨 가쁜 걸음걸이를 해오면서 한국 내지 동양 철학, 인문학도 아시아적인 시야를 넘어 서구세계를 경험하고 서구를 향해 나아갔다. 사용하는 용어, 사유 방식 측면에서 서구의 형식이 없이는 한국학, 동양학의 내용을 보편적 일상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긴 우리의 언어(눈치, 내로남불 등)가 그대로 서구에 번역되는 예도 더러 있긴 하다. 

넓게 보면 한국 사회는 대부분 근대화, 서구화되었다. 서구라는 형식과 내용 속으로 우리의 사유가 편입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문화, 라이프스타일은 서구화되었고, 한국 철학은 서양 혹은 서양철학에 의해 해체되거나 변형돼왔다. 물론 드물게 동학과 같이 서학을 받아들여 동서를 회통하며 주체적으로 동도(東道)를 제시하려 했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동학 그 자체의 내용과 패러다임만으로는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에 대응할 수는 없었다. 남은 것은 그 다양한 현대적 해석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근대를 통해 얻은 것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학문 해석의 기법과 방법론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떠안은 과제는 ‘우리 것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깊은 안목과 상상력’, 그리고 ‘서구세계를 향한 충실한 번역의 실천’이라 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과 실천의 과제들

첫째, 이미 이룩한 국제적인 성과는 더욱더 진척시켜갈 필요가 있다. 앞서 예를 든 신동원 교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의 간행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둘째, 서양철학사에 대응할만한 우리 학술 내부의 깊이 있는 체계적인 철학사상을 발굴, 연구, 소개하는 일이다. 예컨대 원효의 화쟁(和諍)의 철학, 혜강 최한기의 통(通) 철학, 동학의 섬김-모심의 철학, 임윤지당 및 장계향 같은 여성의 철학을 보다 더 세련되게 연구해 갈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독창적인 내용을 세련되게 다듬어낼 것인가이다. 

셋째, 현재 진행되는 첨단분야(예컨대 인지철학, 인공지능, 뇌 및 신경과학 등)에 적극 뛰어들어 협업, 연구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면에서 문과-이과의 통합, 복합영역(인문・교양, 심리・인지과학, 디자인, 첨단과학기술, 정보・환경, 문화, 생태・지리, 의・약학, 공학 등) 내의 새로운 통섭과 창발적 매트릭스도 수반돼야 한다.

서양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심리학, 신경과학, 생물학, 뇌과학, 의학, 수학, 논리학, 기호학, 언어학, 현상학, 인지과학, 컴퓨터공학, 인공지능(AI), 로봇공학’ 등 다양한 분과 학문이 발전했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인문학적 논의들이 유기적으로 분업, 또는 융복합적인 협업을 하며, 예컨대 ‘마음과 뇌, 신체, 환경’ 관련 문제를 해명해왔다. 

이 같은 방식으로 한국 내지 동양 철학에서도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지난해 <교수신문>(2022.08.26)에서 이승건 교수(서울예술대・미학)가 소개한 ‘유아사 야스오(湯淺泰雄, 1925-2006)의 『기·수행·신체』’라는 책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잘 아려진 대로 유아사는 ‘철학·물리학·정신의학·종교학·심리학·뇌생리학’ 등 신체 관련 동서의 사유를 아우르며 독특한 사유를 펼쳐낸 다양한 저술을 국제학계에 선보였다. 

넷째, 외국 학자와의 만남과 협업을 통해 한국철학의 외연과 내포를 심화시켜가야 한다. 예컨대 서양철학의 뼈대를 이루는 인도유럽어의 전통에서 빠져나오는 전략으로 중국을 택하고 중국철학사상 문화에 대해 부단히 연구하여 저술을 내는 프랑수아 줄리앙(Francois Jullien, 파리 제7대학 교수, 상하이대 박사) 같은 학자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일본 근대의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郎)의 풍토론을 근간으로 환경윤리를 넘어서서 ‘지구와 존재의 철학’을 구상하며 활발히 활동하는 오규스탄 베르크(Augustin Berque,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같은 사람도 좋은 예이다.

다섯 째, 우리 철학사상 자료의 온전한 한글 번역과 이를 토대로 해외 번역 사업을 추진하는 일이다. 흔히 서양철학 전공자들이 읽고 관심을 기울일만한 한국철학사상 자료가 없다고들 한다. 한국 내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노력도 필요하긴 하나 우리 한국 철학자 스스로 분발하여 읽을 만한 자료를 적극 제공할 일이다. 이 작업은, 잘 읽지도 않는 허다한 논문을 쓰는 일보다 더 시급한 근본적인 과제라 본다.

한국철학, ‘세계-지구’라는 사유와 지평에서

한 마디로 “한국철학은 이미 서구화를 경험하고 세계 속에서 고민 중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이미 구축된 안목과 깊이로, 스스로 주제를 발굴하여 국제적인 논의에 적극 참여할 일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듯이, 우리의 한국철학, 인문학 연구도 자신 있게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하며 위상을 높여가야 한다. 

우리 전통은 서구 과학기술과 첨단 학술을 만나서 더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서구의 학술 전통을 우리의 학술과 대화하게 하는 매개와 통로를 어떻게 마련하는가이다. 

다만 우리의 전통, 우리의 학술이라고 할 경우 주의할 것이 있다. ‘한국’이라는 일국주의나 민족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세계-지구라는 사유와 지평에서 언어를 가다듬고,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세계-지구와 함께 호흡하는 생명과 인간의 다양한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를 인문 학술에 담아낼 수 있다. 한국철학, 인문학은 다른 것들과 ‘홀로-함께’ 가는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일본 츠쿠바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동양철학(양명학), 넓게는 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다. 한국양명학회장과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내 마음이 등불이다: 왕양명의 삶과 사상』 『노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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