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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8] 여성과 노예를 위해 ‘기독교 완벽주의’를 채택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8] 여성과 노예를 위해 ‘기독교 완벽주의’를 채택하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2.2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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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1805~1879). 사진=위키미디어

북아메리카에는 국가에 대한 적대감과 개인자치의 방어에 대한 오랜 전통이 있다. 특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리버럴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추구한다. 리버럴 데모크라시란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번역되지만, 그것이 북한식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자본주의라는 것과는 무관한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한국의 반공자본주의는 분단 이전에 경험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에 불과하다.

리버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가 재산권의 인정이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재산권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을 기본적 인권의 하나인 사상의 자유에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등으로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반공자본주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라고 할 수 없다. 

빈공자본주의와 함께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식민지적 잔재로는 기독교가 있다. 리버럴 디모크라시를 뒷받침한 개신교의 개인적 판단의 권리나 양심의 권리는 미국 정치 문화의 중심 부분이 되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방어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은 또한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개인주의 의식을 심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일제의 반공자본주의를 수용하여 미국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초석이 된 개신교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혁명) 이후, 새로운 공화국의 설립자들은 사적 재산과 개인의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를 열망했고, 지역 전체에 정치적 권위를 확산시키기 위해 연방의 원칙을 채택했다. 분권화된 권력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강화되어왔지만 그 원칙은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토마스 재퍼슨
토마스 제퍼슨이 언급한 '최소 지배'의원칙은 아나키즘의 구호 중 하나가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자립 정착민들은 토마스 페인의 『상식』(1776)을 읽지 않고서도 그 책에서 “모든 국가에서 사회란 축복이지만, 최상의 상태에서도 정부는 필요악일 뿐이고 최악의 상태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토마스 제퍼슨에게 기인하는 다음 격언도 대부분 공유했다 “가장 적게 통치하는 것이 최선의 정부다.” 페인이나 제퍼슨이 말한 ‘최소 지배’라는 원칙은 그 후 아나키즘을 위한 구호가 되었다. 제임스 C. 스콧을 비롯하여 제퍼슨의 민주주의 사상을 미국 아나키즘의 근원으로 보는 아나키스트들이 많지만, 그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탓인지 아나키스트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개인적 아나키즘 ‘미국 노예제 반대 협회’ 위기를 촉발하다

19세기 미국의 아나키스트 중에는 노예제 폐지 운동가인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1805~1879)을 그 최초로 들 수 있다. 매사추세츠 주의 뉴버리포트에서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약간의 교육을 받은 뒤 어려서부터 노동자로 살다가 고향의 신문 편집인이 되었으나 실패했다. 10대였던 1820년대에 노예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보스턴에서 노예제 폐지 신문인 <해방자(The Liberator)>를 발행했다. 개리슨은 노예 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거부했지만, 노예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 없이 즉각적이고 완전한 해방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는 위험한 광신자로 여겨졌다. 

<해방자(The Libertator)>의 1면 사진. 가운데에 있는 인물은 예수이고 왼쪽은 흑인 노예 오른쪽은 백인 농장주다. 사진=위키미디어

<해방자> 발간 이후 7개월 만에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냇 터너의 노예 반란으로 남부의 주둔군에 대한 항의가 불거졌다. 노스캐롤라이나 대배심은 개리슨을 기소했다. 그러나 <해방자>는 북부 주에서 점차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많은 보도, 서신, 뉴스 등을 인쇄하거나 재인쇄하여 노예폐지 운동을 위한 일종의 커뮤니티 게시판 역할을 했다. 1861년까지 그것은 북부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캐나다 전역에 가입자를 확보했다. 

1837년 재정 부족과 북부에서 지지를 얻기 위한 노예 폐지 운동의 실패로 인해 그는 교회와 국가를 포기하고, 부패한 사회에서 법을 준수하고 그 제도를 지원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부패한 사회에서 “나오라”는 성경의 명령 속에서 노예제 폐지와 여성의 권리 및 비저항을 결합한 기독교의 완벽주의(perfectionism) 교리를 받아들였다. 평화주의와 아나키즘의 이러한 혼합에서 1844년 노예를 소유한 남부로부터 평화로운 북부의 분리에 대한 요구로 공식화된 "노예 소유주와의 연합 거부"라는 개리슨의 원칙이 나왔다.

1838년 개리슨은 기독교 평화당을 이끌었는데, 그 선언문인 ‘감정 선언’은 "우리는 어떤 인간 정부에 대한 충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우리 동포는 모두 인류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정부와 국가 간의 구별은 불합리하고 부도덕하며 기독교 신앙은 세계주의적 아나키스트와 평화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1840년까지 노예문제에 대한 그의 개인적 정의는 미국 노예제 반대 협회(American Anti-Slavery Society) 내의 위기를 촉발시켰고, 그 회원의 대다수는 여성의 참여와 개리슨의 아나키즘 모두에 대해 반대했다. 

미국 노예제 반대 협회의 회합을 그린 그림이다. 벤자민 로버트 헤이든이 그린에 의해 그려졌다. 사진=위키미디어

1840년, 개리슨주의자들이 여성을 허용하는 일련의 결의안을 표결하여 보수적인 반대자들이 탈퇴하고 경쟁자인 ‘미국 및 외국 노예제 반대 협회’를 결성하게 되면서 불화가 절정에 달했다. 그해 말에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폐지론자들도 개리슨의 기준을 버리고 자유당을 창당했다. 따라서 1840년에는 전국 조직이 붕괴되고, 개리슨은 그의 "외부적" 교리에 충실했지만 새로운 반노예제 개종자와 북부 개혁 자치체의 지원을 박탈당한 비교적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남았다. <해방자>는 당시 발흥한 여성의 권리 주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1840년 자유당 설립에 기여했다. 

평화주의와 해방을 선택으로 만든 전쟁

1840년의 분열과 미국 남북전쟁 사이의 20년 동안, 그의 급진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개리슨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 노예제도와 연방 정부에 대한 반대가 절정에 달했다. <해방자>는 1850년의 타협, 캔서스-네브라스카법(Kansas-Nebraska Act), 드레드 스콧(Dred Scott) 결정 등을 비난하고, 존 브라운(John Brown)의 하퍼스 페리 레이드(Harpers Ferry Raid)를 "폭군의 머리에 징벌을 내리는 신의 방법"이라고 환영했다. 1854년 개리슨은 매사추세츠 주 프레밍헴(Framingham)에서 열린 노예폐지 집회에서 헌법 사본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고 3년 후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서 노예제 폐지된 분리주의자 대회를 개최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개리슨은 평화주의 신념과 해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노예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여 에이브러햄 링컨을 적극 지지했으며 1863년 노예해방 선언을 그는 환영했다. 노예해방은 정치적 권리를 즉시 보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유민을 위한 그의 강령에 잠재 된 보수주의를 표면에 드러냈다. 1865년 그는 미국 ‘노예제 반대 협회’를 해산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사임했다. 1865년 12월에 그는 <해방자>의 마지막 호를 출판했다. 그리고 “노예폐지론자로서의 나의 소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공무에서 은퇴한 마지막 14년을 정기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고 절제, 여성의 권리, 평화주의 및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데 보냈다. 그는 급진적인 평등주의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모든 멍에가 꺾이고 모든 노예가 풀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1879년 그는 보스턴에서 죽고 그곳에 묻혔다. 개리슨은 발루와 함께 톨스토이의 아나키즘 그리고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톨스토이는 1904년 개리슨의 짧은 전기를 출판하고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에서도 개리슨에 대해 언급했다. 보스턴의 커먼웰스 에비뉴에는 개리슨의 동상이 있다. 

마리아 웨스턴 채프먼 은 1830년 결혼 후 노예 폐지론자가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개리슨을 도운 여성인 마리아 웨스턴 채프먼(Maria Weston Chapman, 1806-1885년 7월 12일 웨이머스에서 사망)은 어려서 영국에 있는 삼촌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1828년부터 1830년까지 보스턴에 있는 소녀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1830년 결혼 후 노예 폐지론자가 되어 1832년 12명의 여성들과 함께 보스턴 여성 노예제 반대 협회를 설립했다. 이어 채프먼은 개리슨의 수석 보좌관이 되어 매사추세츠 반노예제 협회를 운영하고 <해방자>의 편집을 도왔다. 1839년 그녀는 노예 폐지론자들 사이의 심각한 분열이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의견 불일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소책자인 <매사추세츠에서 옳고 그름Right and Wrong in Massachusetts>을 출판하는 등 개리슨을 도와 노예폐지와 여성의 권리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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