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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그리고 정치적 동원의 기제
민족 그리고 정치적 동원의 기제
  • 류동민 충남대
  • 승인 2006.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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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짐 잃어버리기로 악명 높은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밤늦게 영국의 어느 소도시에 도착했을 때,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짐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수중에는 달랑 칫솔 하나 든 손가방을 들고 시 외곽에 있는 대학을 찾아 가야 했다.

이미 공항분실물센터에서 마치 독일어 같은 영국식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필담까지 하는 굴욕을 겪은 직후라, 인적 드문 역 앞 광장에서 어찌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그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두 명의 학생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냐며 말을 걸어 왔는데, 아쉽게도 한국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는 중국인, 다른 하나는 일본인으로, 다행스럽게도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들은 먼 길을 일부러 걸어서까지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정말 불경스럽게도 그 순간 나는 米蓄鬼英의 식민지가 될 바에야 같은 황색인종의 신민이 되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고 주장하였던 그 옛날 지식인들의 해괴한 논리를 이해할 듯도 하였다면 지나친 오버일까.

1970~80년대의 재야경제학계를 풍미했던 ‘민족경제론’의 박현채는 민족경제의 물적 기초를 설명하면서 異人狄視, 즉 자신과 달라 보이는 타자에 대해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적대적 감정을 지적하고 있는데, 민족경제론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 감정의 물적 기반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일본의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사회에서 국가와 자본, 민족(네이션)이 한 덩어리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제거 또는 극복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월드컵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국의 월드컵 열기는 끝났다. 월드컵을 둘러싼 열광에서 파시즘을 읽어내느냐, 억눌려만 왔던 민중의 해방된 축제를 읽어내느냐 등속의 논란거리가 쉽게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2002년도의 월드컵에 비해 자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는 것, 아울러 이인적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족주의적 열기가 더욱 격렬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월드컵 자체가 어찌 보면 자본의 논리대로 묶여 있는 선수들, 예컨대 연봉조건만 맞는다면 같은 팀에서 뛰어도 아무런 이상할 것이 없는 호나우두와 지단을 국가단위로 재배치하여 국가주의적 열정을 자극함으로써 다시금 자본의 이익을 창출해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지난 몇 주간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열광이 굳이 한국사회에만 특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령 야구경기에 이겼다고 마운드에 국기를 꽂는다거나 오심여부가 확실치 않은 애매한 판정 때문에 인터넷 사이트를 습격하거나,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는 해설자의 해설에 대해서까지 이견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같은 것들이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정한 문제는 예를 들어, 월드컵열광을 노사모의 열기나 386세대에 놀아난 젊은 세대들의 철없음으로 연결 지어 좌파(?) 포퓰리즘의 등장을 경고하는 보수버전이 있는가 하면, 유신시절의 국가주의적 교육의 잔재로부터 이어지는 오래된 습속임을 강조하다가 예컨대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질 때면 오히려 이를 적당히 자극하려는 진보적 민족주의 버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현상들을 편의에 따라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일 것이다.

마치 어떤 기업의 지원을 받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에 모여 제각기 다른 응원가를 부르면서 심지어는 대립하기조차 하는 것처럼,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이들에 의해 동원되는가 또는 지지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제로 작동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상황은 지속될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이슈화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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