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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7] 노예폐지론자에서 강신술 종교운동 지도자로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7] 노예폐지론자에서 강신술 종교운동 지도자로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2.1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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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말 앤드루스
스티븐 펄 앤드루스. 사진=위키미디어

변호사이자 언어학자이며 노예 폐지론자이자 교육혁신가인 스티븐 펄 앤드루스(Stephen Pearl Andrews, 1812-1886)는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언어와 법을 공부하고 32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언어학 교과서를 집필했다. 특히 에스페란토의 선구가 된 국제어인 알와토(Alwato)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개인의 주권’이라는 워렌의 개념과, 비용이 공평한 가격의 한계여야 한다는 원칙을 채택하고 우주 전체에 걸쳐 '개성은 질서의 본질적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비용 원칙이 개인성 또는 '이해의 단절'에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그의 이익을 위해 나에게서 취하는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노동을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이론상으로 이러한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지속적으로 노예제에 반대했고 모든 노예를 사들이기 위해 돈을 모아 텍사스 주를 해방시키려 했지만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실패했다. 또한 성행위와 가정생활은 교회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개인적인 책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워렌의 '개인의 주권' 원칙을 남녀 모두에게 적용하여 남여의 '완전한 해방과 자기소유'를 옹호했다. 

노예폐지론자 태펀을 만난 앤드루스

1812년 매사추세츠 주 템플턴의 침례교 가정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앤드루스는 어렸을 때 4명의 도망 노예가 피난처를 찾도록 도왔다. 앤드루스는 그의 어머니에게 "이들은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28년에 엠허스트대학(Amherst College)의 고전학과에 등록하고 2년 뒤 그는 형제자매와 함께 루이지애나로 가서 잭슨 여성 신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1835년에 결혼한 메리 앤 고든(Mary Ann Gordon)을 만나 4명의 아들을 두었다. 

법학을 공부하여 1833년에 주 변호사 자격을 얻은 앤드루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뉴올리언스(New Orleans)로 이사하여 변호사로서 성공하고 노예 폐지론자인 루이스 태펀(Lewis Tappan, 1788~1873)을 알게 되었다. 태펀은 1841년 아미스타드 (Amistad) 호에 탑승한 노예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한 뉴욕의 노예폐지론자였다. 아미스타드 호는 1839년 미국으로 끌려가던 흑인 노예들이 탄 배다. 아미스타드 호에서 흑인 노예들이 일으킨 선상 봉기와 그에 따른 법정투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7년 영화 <아미스타드>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미스타드는 스페인어로 ‘우정’이라는 뜻이다. 1839년에 쿠바를 떠난 아미스타드호는 흑인 노예들을 쉰 명 넘게 태우고 있었으며 선상 반란이 일어난 시점은 7월 2일 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태펀은 1841년 아미스타드 호가 항구에 도착한 직후 코네티컷 노예 폐지론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 뒤 포로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훌륭한 변호사를 확보해 사건이 미국 대법원으로 넘어가도록 하고 이들을 석방시켜 아프리카로 귀국시키는 계획을 짰다. 또한, 태펀은 1846년 미국 중서부 전역에 걸쳐 100개 이상의 노예제 반대 회중 교회를 시작한 미국 선교사 협회( American Missionary Association )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앤드루스는 1837년의 공황과 황열병 전염병으로 인해 텍사스로 떠났다. 1839년 그는 가족과 함께 휴스턴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명성을 얻었고 몇몇 부유한 노예 소유주들에게 "국가를 자유노동에 개방함으로써 이민을 유도한다면 토지 판매로 빠르게 부자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노예 구매를 통해 공화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계획을 고안했다. 

그의 노력은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노예들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킨 그를 비난했다. 그의 노예 폐지 운동 때문에 그의 집은 1843년에 폭도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와 그의 가족은 텍사스를 떠나야 했다. 그해 여름 그는 테펀과 함께 영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영국에서 텍사스로의 대출 형태로 노예 구입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많은 영국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텍사스 대리공사인 아쉬벨 스미스(Ashbel Smith)가 그를 거부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모던타임스’에서 ‘판타르키’까지

영국에 있는 동안 그는 음운론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학생들과 대화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과학적’ 언어인 알와토를 고안했다. 사망 당시 앤드류스는 알와토 사전을 편찬하는 중이었으며 이 사전은 그의 사후에 출판됐다. 뛰어난 언어학자인 그는 음성학과 외국어를 연구하고 32개 이상의 언어를 가르쳤다. 그는 또한 칼 마르크스를 발견한 최초의 미국인이자 미국에서 그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출판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1840년대 말까지 그는 유토피아적 자치체에 그의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동료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조시아 워렌의 영향으로 앤드류스는 급진적 개인주의로 개종하고 1851년 그들은 뉴욕 브렌트우드에 "공정한 상업과 자유로운 개성의 원칙에 기초한 마을"인 모던타임즈 자치체를 설립했다. 모두를 위한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삼은 자치체는 당시의 도덕 개혁가들에 의해 가혹한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1846년에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모던타임스는 1857년에 해산되고 브랜트우드(Brentwood)로 변경되었다. 

1856년 앤드류스는 두 번째 부인인 에스더 핫세 바틀렛 존스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1857년에는 뉴욕의 자치체인 유니티홈(Unity Home)을 설립했다. 1860년대까지 그는 신가톨릭교회와 강하게 연결된 자발적 정부가 있는 사회인 판타르키(pantarchy)라고 하는 이상사회를 제안하고, 여기서 그는 모든 지식과 활동의 통합을 강조 보편론(universology) 철학을 주장했다. 판타르키는 전통적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남녀의 유일한 도덕 기준이자 공동생활의 기준으로서 자유연애를 옹호했다. 

빅토리아 우드헐. 사진=위키미디어
빅토리아 우드헐. 사진=위키미디어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도 앤드루스의 판타르키에 동참했다. 앤드루스와 우드헐은 1868년 런던에서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제1 인터내셔날) 미국 지부를 지지했다. 앤드루스는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고 우드헐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개인의 주권’, 동등한 사람들 간 조화로운 관계

앤드루스 <우주론의 기본 개요(Basic Outline of Universology, 1871)>에서 우주에 대한 연역적 과학인 ‘우주론’을 제시했다. 앤드루스는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단어는 1871년 그의 책 <보편론과 알와토의 기초개요: 새로은 과학적 우주 언어(The Primary Synopsis of Universology and Alwato: The New Scientific Universal Language)>에서 신조어로 정의된다. 

1870년대에 앤드루스는 선험적으로 도출된 지식이 정확한 과학으로서 경험적 과학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측한 자신의 우주론 외에 정신측정법을 홍보하고 강신술 종교운동을 지도하기도 했다. 1882년에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견해가 매우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상을 교환하기 위해 콜로키움으로 알려진" 여러 회의를 조직한 앤드류스는 1886년에 사망했다.

앤드루스는 <사회의 과학(The Science of Society)>에서 ‘개인의 주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인은 자신의 능력과 자연적 조직이 그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그의 취향에 따라 충족하게 하는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그 결과로 재산 관계 및 기타 사회의 구성 또는 배치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를 향유하고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개인을 사전 협의된 사회 조직의 엄격한 요구 사항과 일치하도록 조형하는 대신에, 개인의 모든 특성과 취향의 변동과 함께 각 개인의 필요에 대한 사회적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 나아가 국가의 평등한 주권이 서로의 독립을 상호 인정하는 조화로운 관계의 기초이듯, 개인의 주권도 등등한 사람들의 조화로운 관계의 기초라고 했다. 

앤드루스는 사이언톨로지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나아가 자신이 살았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그들이 수행한 노동의 양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지 못한다고 비판한 앤드루스는 개인이 노동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받는 이익에 따라 지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양에 따라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엔드루스는 워렌처럼 노동지폐를 사용하는 경제를 옹호했다. 노동지페는 노동시간으로 표시된 통화의 형태이다. 즉, 고용주가 직원의 노동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느냐가 직원의 급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직원이 얼마나 일했는지가 중요하다. 

비슷한 이유로 앤드루스는 사람들이 자본의 대출을 위해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본의 대출을 대출자의 입장에서 노동이나 박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앤드루스는 교회의 간섭을 거부하는 것처럼 국가의 간섭을 거부했다. 그리고 거대한 사회 혁명이 일어나 모든 종류의 폭정이 사라지고 모든 종류의 자유가 존경받을 것이며 아무도 사랑의 자유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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