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3:55 (금)
‘이룸’이란 대학 밖의 대학원에서   
‘이룸’이란 대학 밖의 대학원에서   
  • 유현미
  • 승인 2023.02.06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유현미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

한 달에 한 번 기다리는 택배가 있다. ‘불량언니 작업장’에서 보내는 물품이다. 향초, 비누, 수세미까지 계절마다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품들이 온다. 불량언니 작업장은 고령 성매매 여성들의 생활비 조달과 관계망 형성을 위해 운영되는 프로그램이다. 구독자들에게 반(反)성매매인권행동 단체인 ‘이룸’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언니들이 만든 물품과 함께 언니들의 생활과 작업장 활동을 담은 소식지가 온다.

청량리 집결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여성들이 집결지 폐쇄 이후 어떻게 뿌리뽑히지 않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자본주의의 빠른 속도와 효율성 추구에 매몰되지 않고 살만한 삶을 고민하는 단체의 지향 속에 가능했던 일이다. 운영이 쉽지 않았지만, 팬데믹을 겪으며 더욱 어떻게든 직접 만나고, 감촉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모임은 언니들에게 소중했다. 박사논문을 작성하느라 연구실에 종일 갇혀있던 시기에 작업장 택배가 나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언니들과는 이룸의 공부방 모임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대학원에 여러모로 답답함이 쌓여있었을 때, 성매매 이슈를 공부하기 위해 학교 밖으로 갔다. 성매매는 젠더 연구의 주요 주제지만, 판매와 구매, 알선 모두 불법화된 현장에 접근하는 어려움에 더해 성노동론과 반성매매로 양분된 구도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어려움까지 가중되어, 탐구하기 어려운 이슈다. 더구나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학 내 젠더 수업이 체계적으로 자리잡지도 못했고 교양강의나 학부 수준을 넘어 대학원에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제도도 희박한 상황에서 성매매 문제에 대한 나의 이해는 얕을 수밖에 없었다. 이룸에 가서 활동가, 회원들과 선행연구를 읽어나가면서 성매매가 한국의 부동산 재개발과 임대업, 성형산업, 대부업 등과 긴밀히 얽혀있는 거대한 경제 시스템이면서, 동시에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의 문제임을 배울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순환하며 생산된다고 말한다. 공부방 다음에 여성들을 사회적‧법적으로 처벌하는 관행을 변화시키고자 ‘불처벌 세미나’를 시작했다. 청량리 공간의 변화와 여성들의 생애사를 엮어 『청량리-체계적 망각, 기억으로 연결한 역사』의 발간 작업을 이룸과 했던 연구자들, 성매매 정책과 금융경제적 전환을 연구해온 쟁쟁한 선배 연구자들, 현장에서 여성들을 조력해온 변호사 등이 합류하면서 여성 처벌의 구체적 실태, 해외 사례와의 비교, 이론적 검토까지 폭넓은 지평에서 문제를 탐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비대한 한국의 성산업이 해외 정책을 단순 이식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쉽게 돈 버는 헤픈 여자들이란 편견과 달리 여성들을 착취하는 성산업 생태계에 많은 이들이 의존하고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의 곁에 함께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 집단적 노력 없이 나올 수 없었던 내용이다.

그리고 학계의 연구프로젝트가 아니어도, 거기에서 연구책임자, 연구보조원으로 위계화된 관계가 아니어서 가능했던 결과다. 활동가와 연구자, 여성학, 사회학, 법학, 인류학, 역사학 전공자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공글리는 과정에서 나는 분과학문에 갇히지 않는 융합적 인식론이자 방법론으로서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체험했다. 페미니즘은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기보다는 좀 더 평등하고 다양한 삶이 가능한 질문을 던지고 모색을 해보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에너지다. 젠더 연구를 주변부의 영역으로 게토화시키는 학계의 지식생산 관행에 하나의 작은 파열음이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나는 학문후속세대로서 지적 효능감도 체험했다. 박사수료자가 익힌 학술적 분석력과 표현 능력은 알게 모르게 이룸 활동에 도움이 되었고, 이룸 활동은 젠더사회학 강의에서 성매매 이슈를 깊이 있게, 생생하게 다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식생산과 유통의 선순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연구자의 삶에 큰 원동력이다.     

얼마 전 <인문·사회분야 학문후속세대의 연구력 강화를 위한 실태조사 및 과제> 보고서를 읽었다.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이 자신의 연구가 읽히지 않고 별다른 사회적 효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고립감을 호소했다. 지적 고립은 연구자 집단의 재생산과 연구력 강화에 치명적 위험 요소다. 보고서는 지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함께 공부하고 상의하는 모임, 서로 글을 읽고 논평해주는 동료 관계, 공동의 문제를 함께 의제화할 수 있는 대학원 안팎의 모임과 같은 지식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공저자 강수영은 신진연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학계의 폭넓은 외연과 활발한 소통, 사회적 명예라고 이야기한다. 사람과 지식이 학교에 고이는 게 아니라 사회에 흐를 수 있도록 판을 짜고 분위기를 만들어 예전과는 다른 형식으로 대중과 연결점을 찾고, 연구자들 스스로 제대로 된 인정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해줄 수 있는 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문사회 학술장이 멸종위기종 보호 구역이 아니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매력적이고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되려면, 우리는 더 연결되고 넓어져야 한다. 피해의식과 경쟁의식 넘어 사부작사부작 함께 할 것이 많다.

유현미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대학 성폭력의 지속과 성별화된 능력주의」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젠더폭력과 고등교육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다. 함께 쓴 책으로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불처벌』,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