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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6] 강간 용의자인가 자율적 성관계를 꿈꾼 아나키스트인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6] 강간 용의자인가 자율적 성관계를 꿈꾼 아나키스트인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2.06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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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험프리 노이즈
존 험프리 노이즈는 예일신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자신은 죄를 짓지 않은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을 했다가 학교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당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9세기 미국의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이자 종교적 아나키스트로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존 험프리 노이즈(John Humphrey Noyes, 1811~1886)다. 그는 누구나 지상에서 신에게서 완벽한 사랑을 얻고, 구원을 받은 뒤에는 신의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없다고 하는 완벽주의(perfectionism)를 주장했다. 뒤에서 보는 기독교 아나키스트이자 노예제 철폐론자인 게리슨을 비롯하여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자유 연애론자인 점이 가장 좋다. 유사종교 교주들이 여러 명의 여신도를 성추행하는 것과 달리 노이스는 자치체를 구성하는 사람들끼리 상호동의를 조건으로 자유롭게 성교하는 것을 성경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실천했다. 

예일신학교 학생 노이즈, “나는 죄가 없다?”

1811년 버몬트 주 브레틀버러(Brattleboro)에서 목사, 교사, 사업가, 미국 하원의원으로 일한 존 노이즈(John Noyes)의 아들로 태어난 노이즈는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5세에 다트머스대학에 등록했다. 대학 졸업 후 의붓형의 변호사사무실에 들어갔으나 1831년, 20세 때 개종을 하고 목사가 되고자 앤도버신학교에 등록했다. 그러나 앤도버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1832년 가을, 예일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신학 공부 외에 정치적 행동주의에 빠져 미국 최초의 노예제 반대 단체 중 하나를 뉴헤븐(New Haven)을 조직했다. 그리고 예일대 2학년인 1834년, 그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죄가 없다면 기독교는 거짓이며 완전하고 죄가 없는 사람만이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포교활동을 했다. 친구들이나 교수들은 그를 이단으로 여겨 그를 대학에서 추방하고 목사 면허도 취소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설교를 계속했다.

노이즈는 행동이나 결과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직관에서 나오는 충동에 다라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기독교 인이면서도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며 포교 활동을 벌였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개종한 순간부터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이 "완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완벽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인간에게 독립적인 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신 때문이며, 이 독립된 의지가 신으로부터 왔기에 그것을 신성하게 만든다는 사상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적인 인도이므로 "교회가 인간에게 신의 법에 순종하도록 강요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선언했다. 또한, 신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는 전통적인 도덕 표준이나 사회의 정상적인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행동이나 결과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직관에서 나오는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상호 동의하에 완벽한 자유 성교를 주장하다

1836년에 퍼트니 성경학교를 시작한 노이즈는 1838년 자신의 믿음으로 개종한 헤리엇 힐튼(Harriet Holton)과 결혼했다. 결혼 후 첫 6년 동안 해리엇은 다섯 번 아이를 낳았는데 4명은 조산이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 1844년 그난 아내와 별거했지만 그 별거가 그와 그의 아내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만족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 노이즈는 공식적인 자치체 조직을 만들고 정부를 유해한 것으로 비판하며 성경이 지상과 하늘에서 '신이 인간 정부의 간섭 없이 몸과 영혼을 다스리며 통치하는' 하늘 왕국이 도래하는 것을 묘사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연애와 남성의 사정 억제를 실천하고 사랑의 완벽을 추구했다. 노이즈가 근거로 삼은 성경 구절은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마태복음 22장 30절)는 예수의 말이었다. 이 구절을 전통적으로는 부활 이후에는 성관계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노이즈는 반대로 해석했다. 즉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을 하고,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일부일처제는 없어지고 상호 동의하에 완벽한 자유 성교가 허용된다고 본 것이다.  

노이즈는 마테복음 22장 30절을 다르게 해석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랑을 하고,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와 함께 노이즈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사정을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성교는 영적인 것이고 출산할 의도가 없이 행해지는 자위와 성교는 부끄러운 낭비다. 그리고 당시 성교가 전통적인 기독교 결혼 관행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사춘기(노이즈에 따르면 14세)부터 결혼 연령(약 24세)까지 성적 기아에 직면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남자들이 이미 폐경을 겪은 여성들과 함께 사정을 조절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관계는 당사자들의 동의를 유일한 조건으로 하여 공동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졌으며 모든 성적 결합은 문서화되고 규제되었다. 출산을 위한 성교는 영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성교를 위한 남녀 짝짓기는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노이즈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여부와 시기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자치체의 모든 구성원은 공동 주택에 거주하여 성교를 훨씬 쉽게 추적할 수 있었다. 성교 후 개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치체의 피임법 관행은 수년 동안 출생률이 낮음을 의미했다. 자치체에서 태어난 모든 자녀는 가족의 전통이 아닌 자치체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이는 당시에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었고, 자치체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강간혐의를 받은 노이즈, 캐나다로 떠나다

1847년 노이즈가 간통죄로 체포되고 그의 동료들에게도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이듬해 그들은 뉴욕의 오네이다로 가서 누구에게나 완전한 자유 참가를 인정하는 오네이다 자치체(Oneida Community)를 만들었다. 그곳은 뉴욕 주의 메디슨카운티에 있는 인디언 리저베이션이었던 곳이다. 참가자 36명 중 9명이 아동이었고, 그들은 노이즈가 유산으로 받은 돈과 참가자의 기부로 하나의 상점과 두 개의 농장을 운영하고 세 채의 공동주택을 지었다. 

오네이다 자치체는 1881년까지 유지되고 뉴욕시 브루클린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지부에 300명 이상이 참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들은 동물덫과 비단실을 제조하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여 통조림으로 만드는 등의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자급자족했다. 1860년대에는 거대한 벽돌집을 지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함께 살았고, 한 쪽에서는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공동으로 육아되었다. 부모가 가끔 방문하여 자녀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의 양육은 양육교사들의 책임이었다. 

오네이다 자치체는 상호비판이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규제되었다.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하거나 범죄에 대한 죄의식을 갖게 되면 그는 구성원들의 순환위원회나 자치체 전체에 대해 비판을 요구할 수 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당사자는 침묵 속에서 비판을 받고, 그 뒤 공적인 고백을 하고 개선을 위한 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문제를 해결한다. 1870년대에 와서 구성원 중 몇 사람이 노이즈의 신앙과 공동생활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자치체를 떠났다. 또한 자치체의 비도덕성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오네이다 자치제에는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 오네이다 자치제는 코뮌주의와 성공을 물질주의적 가치와 소비자 가치를 부추기며 성장하는 번영에 대한 실패를 입증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879년 노이즈가 강간 혐의로 체포될 위험에 놓이자 노이즈는 캐나다 온타리오로 떠났고, 자치체의 공동 성교 방식을 버리고 보다 전통적인 결혼으로 돌아가 살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1879년 자치체의 성교 방식을 포기한 구성원들은 대부분 결혼했으나 공동생산만은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치체는 1881년 초에 공식적으로 해산되고 주식회사로 전환되고 주식은 226명의 구성원들에게 분배되었다. 몇 명은 오네이다에 머물었으나, 다른 몇 명은 정통 교회로 돌아갔으며, 몇 명은 새로운 자치체를 만들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노이즈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많은 추종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이즈는 1886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사망했고 추종자들과 함께 오네이다 자치체 묘지에 묻혔다. 셰이커(Shaker)와 같은 더 억압적인 천년왕국 종파와는 달리, 오네이다의 노이즈와 제자들은 모든 사람의 육체적, 영적 결합을 믿으면서 재산을 모으고 자유로운 사랑을 실천했다. 순환위원회에 의한 '상호비판' 관행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 분쟁을 해결했다.

오네이다에서 자치체는 눈에 띄게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네이다 코뮌주의의 성공은 물질주의적 가치와 소비자 가치를 부추기는 성장하는 번영에 대한 실패를 입증했으며 결국 그 급진적 목표를 약화시켰다. 세기말에 유럽 이민자들은 토착민의 다양성을 빠르게 추월한 새로운 종류의 호전적인 아나키즘 공산주의를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의 중산층 사회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반항적인 젊음을 생산할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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