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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정신적·도덕적 삶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사회의 정신적·도덕적 삶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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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대한민국학술원은 안녕한가(2) 현역 교수들이 말하는 학술원의 역할과 과제

‘대한민국학술원’(이하 학술원)은 ‘한국 최고의 학술적 권위를 지닌 집단’이라 불리는 만큼 한국에 대학이 설립된 이후 각 학문분야 초석을 다지는 데 평생을 바쳤던 분들이 모여 있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연구에 정진하여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들도 있으며, 학자로서 청빈한 삶을 살아 존경을 받는 분들도 꽤 있다. 또한 해외 주요 학술원과의 교류를 통해 국가대표 학술기관으로서 위상을 다지고 있다.

이러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는 한편 많은 교수들은 ‘학술원’ 하면 ‘양로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또 일각에선 “서울대 출신 모임”, “외부와 교류 없는 끼리끼리 집단”이라며 ‘폐쇄성’을 지적하기도 하며, ‘과연 최고의 지성기관인가’에 대해 의문부호를 달며, 대표성을 문제삼는다. 이러한 학계 일각의 시각은 학술원의 구체적인 역할의 세부가 외부에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이처럼 학술원이란 이름에서 퍼뜩 떠오르는 높은 상징성과 학계의 부정적 인식 사이의 깊은 간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학자들이 입을 모으는 가장 큰 문제는 학술원이 ‘학술원로에 대한 우대기관’과 ‘최고의 학술연구기관 및 학술적 권위집단’의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사학)가 ‘남북학술원과 과학원의 발달’(지식산업사)에서 “예우기관과 연구기관 사이에서 어느 한 방향으로 정립해야 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듯, 두 기능을 절충하면서 혼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학술원 외부에서는 대체로 후자인 연구기관으로서의 생산적인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문학)는 “원로로서 학술논문, 글쓰기, 비평작업을 활발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로써 후학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손동현 성균관대 교수(철학) 역시 “생산적·창조적 역할이 기대되며,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바탕을 그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래야만 ‘죽은 모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거용 상명대 교수(영문학)는 “학술원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지도 않고, 후학과 교류하는 것도 아니기에 외부에서는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일만 하는 것으로 비친다”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우대기관인가 연구기관인가, 역할 분명히 해야

그렇다면 학술원 회원들은 어떤 입장일까. 인문사회분과의 ㄱ 교수는 “현재의 재정과 회원규모로는 명예직으로 가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연구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재정과 연구시설이 확충돼야 하는데, 그런 뒷받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이야 개별연구가 가능하더라도 자연과학은 실험실 없이 연구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분과의 ㄴ 교수 역시 “평균 연령도 높고, 회원 대부분이 종신이며, 정원은 제한돼 있어 ‘예우기관’의 성격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반면, 정범모 한림대 한림과학원 석좌교수(교육학)는 “최고 인력이 모여 대단히 생산적 역할을 할 수 있다”라며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특히 정 교수는 “평균수명이 늘어 80세까지는 거뜬히 생산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다만 그 전제는 획기적인 정부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시설 없이 수당과 연구보조비로 지급되는 월 1백20만원(올 10월부터 1백50만원으로 상향조정 예정)으로는 ‘양로원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정 교수 같은 적극적 입장은 소수이고, 대체적으로 밖에서의 기대와 안에서의 요구가 엇갈리는 상황이다.

물론 연구시설과 비용이 없는 현실에서 무조건 기대를 강요할 수만도 없는 건 사실이다. 문화보호법에 학술원을 연구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상, 정부에서도 이에 걸맞은 지원책을 마련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학술원들이 활발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정부지원이 따르기 때문이다.

지원책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부분이 회원증원 문제다. 현재 회원 구성을 볼 때 20~30년 전 학문분과 기준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회원수도 1백50명으로 제한돼 있는데, “새로운 학문분과가 많이 생겨나 현 분과기준은 부적절하며, 신규회원이 진입할 수 있는 기회도 너무 적고 평균연령이 높아져 생산성을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게 학술원 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이다. 

그럼에도 학술원 원로들의 자구적인 노력과 ‘큰 어른’으로서의 발언이나 비평활동에 대한 기대를 접기는 쉽지 않다.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인류학)는 “원로들이 학회에서 활발히 활동해야 하며, 프랑스학술원처럼 공개강연과 시민교육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따금씩 학술원의 원로 회원들은 “나이가 들어 논문을 쓰긴 어렵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강 교수는 “우리 학계 전반이 조로증에 걸려 있어 50세만 넘어도 ‘에헴!’하면서 논문발표를 젊은 학자들에게 떠넘긴다. 그런 문화가 만연되다보니 이것이 학술원까지 이어진다”라며 원로들의 생산적 연구역할을 촉구한다.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동양철학)는 “학술원에서 학술대회를 한다지만 외부 발표자나 논평자를 활발히 섭외해 논쟁을 주고 받지는 않는다”라며 “일반 학계, 젊은 학자들과의 생산적 대화가 없는 게 큰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윤 교수는 “학술원 원로들이 한국 학문의 초석을 다진 분들이라 과거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앞으로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참담한 심정을 표할 수밖에 없다”라고 덧붙인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사)는 “학술원은 헌법재판소처럼 학술적 권위를 확보해야 하며, 국가정책에 대해서도 적절한 자문역할을 활발히 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영문학)는 “학술원은 한 사회의 정신적 삶, 도덕적 삶에 대해 발언하고 가이드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본다. 즉 학문과 사회의 교량역할을 하고 도전이 될만한 사회적 사유들을 찾아 제공하는 ‘큰 어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생명공학, 유전자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에 개입하면서 사회의 방향을 선도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도 교수는 아쉬움을 표한다.

서울대 중심 탈피하고 좀더 개방돼야

나아가 학계는 제도와 운영에 있어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서울대 출신’이 학술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박이문 연세대 초빙교수(철학) 등은 “서울대 중심의 동종교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털어놓는데, 이는 신임회원을 선출할 때, 후보추천은 학회에 위임하지만, 회원선출의 결정권은 학술원 회원에게 있어 결국 서울대 학맥이 작용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연고’가 강한 곳에서 회원이 선출권을 갖는 것은 그 결과의 공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현재 학술원 회원 가운데 서울대(경성제대) 출신은 전체 74%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술원 회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선출과정의 편파성이라기보다는 학계 자체가 서울대 중심으로 구성돼있어 발생하는 문제”라며 향후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꼭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대학 간의 교수초빙이나 이동이 별로 이뤄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서울대 출신이 지배력을 지속해나갈 가능성이 크며,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업적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특정학교 편중은 고쳐지기 어렵다”고 전망하는데, 이처럼 서울대 편향이 쉽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 또한 너무 안이한 발상인 것. 따라서 김진석 교수 등 몇몇 현역들은 “학회에서는 업적보다는 대표성이 더 큰 사람을 추천하는 경향이 다분하므로 회원 추천과 선출을 좀더 오픈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또한, 학술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학술원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의견들이 제출된다. 현재 학술원 활동 중 가장 알려진 건 ‘학술원우수도서추천’과 ‘학술원상’ 사업인데, 이병천 교수는 “‘우수도서추천’은 학술진흥재단에서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일로서, 학술원이 賞을 부여하는 일로 권위를 세울 게 아니라 학술적 권위로서 책임있는 사회적 발언을 하고 학계에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종고 서울대 교수(법학)는 “지금이라도 해외 선진국가에서 학술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대한민국학술원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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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수 2006-07-03 16:39:38
정범모교수(교육학)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석좌교수님 입니다. 특임교수라고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