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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넘어 時代를 그릴 수는 없는가
학문 넘어 時代를 그릴 수는 없는가
  • 고영진 광주대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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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한민국학술은 안녕한가: (1)학술원의 역사와 향후 기능

대한민국학술원(이하 학술원)은 명목상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학술기관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논란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제도 자체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을 것이고 운영상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학술원이 걸어온 발자취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과거 학술원의 성과와 문제점을 점검해보고 미래의 바람직한 학술원의 모습을 전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학술원은 1954년 63명의 회원으로 창립됐지만, 준비는 1952년부터 시작했다. 이 해 국회는 학술원과 예술원 설치를 위한 문화보호법을 제정했다. 학술원을 창립하는데 문화보호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을 제정한 것이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상황이 빚어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식민지를 겪으면서 학계의 인적 자원 자체가 적었고 그나마 남북분단으로 학자들이 양분되고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많은 학자들이 희생되고 남은 학자들도 전시 하에서 생존이 어려워 국가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문화보호법을 보면 학술원을 학문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를 우대하기 위해 설치하며, 국내외 과학자들의 대표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과학의 발전·활용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고 과학연구의 진흥에 관한 정부의 자문에 응하거나 그 의견을 건의할 수 있고 학문적으로 우수한 연구를 한 과학자들을 시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원로 대학자들을 예우하고 연구도 진흥하는 절충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기의 학술원은 두 가지 기능을 다 수행하기가 힘들었다. 학문적 업적이 큰 학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와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았고 연구 진흥을 위한 부서나 시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술원 본래의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판의 요지는 ‘학술원이 그 명칭에 상응하는 학술활동을 하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이는 제정 당시의 주요 목표가 전시 하의 문화인(학술인과 예술인)을 보호·우대하기 위한 문화보호법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지만 회원들의 소극적인 자세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1962년 5·16 쿠데타를 주도한 군사정권은 학술원을 개혁하려고 했다. 개혁의 방향은 학술원과 예술원을 통폐합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족문화과학연구원을 설치하여 두 기관을 흡수하려는 것으로, 이는 중국과학원과 같은 연구 중심의 학술원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학술원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학술원은 학술·교류활동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갔으나  1981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다시 한번 학술원을 개혁하려고 하고 기존의 문화보호법을 개정했다.


이 신문화보호법은 학술원 회원에 정년제를 도입하고 학술원 기능에 국민정신교육과 교육행정에 관한 사항 등을 첨가함으로써 학술원의 인적 쇄신을 이루고 문교부 산하 교육연구원과 비슷한 기관으로 개편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본래의 학술원의 모습과는 달라 회원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반면 40여 명이나 되는 중견 학자들이 새로 선출됨으로써 학술원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29선언 이후 학술원 내에서 학술원을 재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이듬해 대한민국학술원법의 제정으로 귀결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학술원은 ‘학술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고 학술연구와 그 지원사업을 행함으로써 학술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요 기능으로는 학술 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 및 건의, 학술연구와 그 지원, 국내외 학술의 교류 및 학술행사 개최, 대한민국학술원상 수여, 기타 학술 진흥에 관한 사항 등이 있다.


이를 보면 학술원법은 기본적으로는 초기의 문화보호법의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운영의 자율성과 연구 기능을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술원은 문교부장관이 관리한다”는 조항 대신 “문교부장관은 학술원의 활동을 지원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집어넣고 학술원 회원의 자격을 대학 졸업 후 연구경력 10년 이상에서 20년 이상으로 강화하고 연구업적 항목을 새로 첨가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 결과 학술원의 학술활동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학술원은 매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시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분과별로 학술세미나를 열고 국제학술대회 및 정책토론회도 개최하고 있다. 또한 회원들의 학술연구를 지원하고 국제학술교류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물들을 ‘학술원논문집’, ‘한국의 학술연구’, ‘국제학술대회논문집’에 수록해 간행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 보급지원사업을 교육부로부터 위탁받아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원 전체 예산에서 학술 활동 부분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 말하자면 현재의 학술원은 원로 대학자들을 예우하고 학술을 진흥하는 기능을 둘 다 가지면서도 예우에 더 비중을 두는 절충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지금도 학술원을 원로우대기관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호,예우 수준 넘어서야 … "대사회적 발언 필요"

그러면 앞으로 학술원이 나아가야할 바람직한 방향은 어떤 것일까. 이는 먼저 학술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우기관과 연구기관을 겸한 이상적인 형태를 지향하는 것은 학술원 설립 초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50년 전에는 가능할지 몰라도 학문연구자가 크게 늘어나고 학문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 학술원이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원은 현재 연구활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이 개인 차원에서 단편적으로 이루지는 경향이 많아 체계적이지 못하고 학계에 미치는 영향이나 성과도 크지 않다. 오히려 예우기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마지못해 이루진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따라서 기존 연구활동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지만 이를 계속하더라도 논문보다는 학술적 가치가 있는 저서 또는 ‘한국의 학술연구’와 같은 연구사 정리 등 원로지성들의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필요로 하는 작업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2006년부터 시행하려고 하는 인문사회분야의 우수학자(국가석학) 지원사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학술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학술기관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학술원은 ‘최고의 연구기관’도 아니고 ‘학술 지원기관’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고 지성들이 모인 학문의 전당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라도 유지하려면 학술원은 학문적 성과와 함께 대사회적 발언도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살기 힘들고 혼란한 사회를 헤쳐 나갈 지혜를 사회의 원로들로부터 듣고 싶어 한다. 이 원로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대한민국학술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술원의 원로지성들은 현 사회의 문제점을 점검해보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마련하는 작업을 순수 학문연구 못지않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영진 / 광주대·한국사 ©
필자는 서울대에서 ‘조선 중기 예설과 예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7세기 한국지식인의 삶과 사상’ 등의 저서가 있으며, 계간 ‘역사와현실’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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