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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4)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베스트셀러 시장
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4)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베스트셀러 시장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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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漫畵·映畵에 종속 … 책의 경량화 가속 붙어

지난 27일 평일 오후인데도 교보문고는 사람들로 복작였다. 최근 베스트셀러 동향을 알기 위해 그 쪽 판매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1위부터 30위까지의 책들을 주섬주섬 뽑아 읽으면서 주위 동향도 살폈다. 20대 여성이 독서문화를 주도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2시간 동안 베스트셀러 앞에 왔다가는 이들 90%가 10대~30대 여성들이었다. 남자는 트럭 야채장사로 보이는 40대 후반 남성을 포함 1~2명에 그쳤다. 베스트셀러 분석에 있어서 ‘여성’은 주요변수인 셈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드러나는 몇가지 풍경을 비판적으로 살펴봤다. / 편집자주

베스트셀러 1위는 지난해 10월 출간돼 계속 상위권을 맴도는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한국경제신문)다. ‘1등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통념에 따라 머리말과 1~2장 정도만 읽어보려고 펼쳤다가 20분만에 후딱 읽어버렸다. 책도 얄팍하지만 내용도 단순하고 여백도 많고 글자도 왕사탕만해서 시간이 걸릴 게 없었다. 그런 식으로 훑으니 베스트셀러 30위까지는 자기계발서와 실용처세서, 어학서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래서는 분석이 될 수 없어 폭을 넓혀서 1백위까지 조사를 해보았다.

두드러진 특징은 일본소설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는 이제 구세대인 듯, 없거나 저 뒤로 밀려있고 에쿠니 가오리, 가네시로 가즈키, 이사카 코타로, 츠지 히토나리 등의 이름들이 보였다. 후회할 게 뻔했지만 그 중 몇 권을 구입했다. 소설은 집에서 읽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 가운데는 일본 아쿠타카와상의 최연소 기록을 깨뜨렸다는 여고생 작가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정유리 옮김, 황매), 한국에 바나나 열풍을 몰고 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회심작 ‘N·P’(김난주 옮김, 북스토리)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소설일까 하는 의문이 덮쳐왔다. 그림만 없지 純情·學院 망가(manga)에 가까운 내용이다. 친구들 사이의 감정, 예민한 정서상의 변화와 그걸 이끌어내는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전부다. 게다가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수도 만화와 비슷해 페이지 넘기는 게 신경을 거슬릴 정도로 빨리 넘어갔다. 문장도 소설의 문장이 아니다. 이건 90년대 한국소설이 보여주는 내면의 사변적 문체도 아니고, 입말과 머릿속 생각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마구 튀어나와 정신이 없을 정도.

오히려 신드롬이 된 공지영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목록에 속한 한국소설인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지음, 문이당)가 훨씬 현실과의 긴장감이 있었다. 비록 축구공 차듯 연애이야기를 써서 시트콤 같은 느낌을 줬지만 말이다. 

이제 소설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순정·학원 만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협지 세대가 성장하면서 판타지 소설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듯, 순정만화 세대가 성장하면서 손바닥만한 일본 소설들을 유력한 트렌드로 형성시킨 게 아닐까. 아무튼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도 근대문학이 끝났다며 일본 문학은 이미 10년 전에 종언을 고했다고 표현한 것이 이해가 되었고, 유종호 교수가 지난 5월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 ‘문학의 전락’이라는 글에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가리켜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며 “계몽되지 않은 독자가 이러한 작품에 일찍 노출되었을 때 거기 중독되어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한 채 그 수준에서 정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 이들 소설을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이들 젊은 작가들은 하루키가 열어놓은 영상적 상상력의 공간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두드러진 것은 영상미디어에 대한 출판미디어의 종속현상이었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 ‘다 빈치 코드’, ‘오만과 편견’, ‘도쿄타워’, ‘연애시대’, ‘모모’ 등이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소설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외에 ‘스펀지5’(KBS 스펀지 제작팀 지음, 동아일보)는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을 펴낸 것이고, ‘그 남자 그 여자 3’(FM음악도시 지음, 랜덤하우스중앙)은 라디오 프로그램 사연을 모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소설의 붐이라고 해서 인기를 끈 ‘삼한지’, ‘정약용 살인사건’, ‘유림’, ‘제4의 제국’ 등도 대하드라마의 영향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대필한 것이 분명한 박지성과 아드보카트의 자전적 이야기도 텔레비전 후속효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책이라는 것이 그 미디어의 고유한 특징과 내용으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의 餘興이 2차로 소비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들 만하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출판의 對美 종속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미국의 것이었다. 베스트셀러 1·2위인 ‘마시멜로 이야기’와 ‘행복한 이기주의자’(웨인 다이어 지음, 21세기북스)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젊은 목사의 리더십을 다룬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지음, 두란노),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리퍼블릭 오브 티(The Republic of Tea) 社 사장의 성공충고를 담은 ‘핑-열망하고 움켜잡고 유영하라’(스튜어트 골드 지음, 웅진윙스), 너무도 유명한 애플 社 CEO의 프리젠테이션 스타일을 분석한 ‘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멘토르),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강인선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등은 온통 미국 얘기였다. 이들 책엔 대부분 뉴욕타임즈 장기 베스트셀러라든지 아니면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는 명칭이 붙어있기 마련이다. 그 많던 프랑스, 독일, 영국, 인도 같은 나라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살펴본 30위권 중에서 미국 출신이거나 소속이 아닌 저자의 책은 5위에 오른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외 지음, 류시화 옮김, 이레)이 유일할 정도였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생해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가 된 저자가 죽기 일보직전의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모은 이 책이 그나마 30위권 중에서 내용이 가장 알차고 깊이도 있었다. 나머지 책들엔 미국의 생각, 삶, 취미, 색상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마이애미대 외래교수이자 미국의 유명한 대중연설가인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는 미국이 한국 사람들을 얼마나 단순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너무 단순한 자본주의의 청교도적 윤리를 읊어놓은 것이라서 생각하고 자실 게 없었다.

15분 동안 마시멜로라는 과자를 먹지 않고 참아낸 아이들과 먹어버린 아이들이 10년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그 차이에 대한 이해가 이 책의 전부다. 군침을 삼키고 참아낸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인내심을 여러 분야에 적용해 성공하고, 그걸 자신의 운전수에게 가르친다.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되는 이 책엔 놀랍게도 1%의 갈등요소도 없다. 스펀지처럼 주인의 가르침을 흡수하고 응용하는 훈련된 조교 같은 콤비플레이가 등장할 뿐이다. 처세서의 특징인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2~3개가 고작이다. 배가 몹시 고픈데 정부미로 지은 밥을 반 공기 먹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소아를 버려야 한다는, 그러나 이런 동양적 경구로 요약하기엔 그 대어라는 것이 뻔뻔할 정도로 황금 본위적이라 민망한 그런 책이다. 아무래도 경제지에서 펴낸 책이라 공격적인 마케팅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으로 여러 나라 출판계 인사들과 얼굴을 트고 좋은 책을 선점하기 위해서 경쟁을 벌인 결과가 고작 앵글로 색슨으로 도배하는 것이라면, 출판기획자나 에이전시들의 안테나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영업력과 광고력, 넓은 유통망을 지닌 대형 출판사들이 이미 미국에서 히트친 주류 스타일을 라바이벌 할 때 독서시장이 그 쪽으로 기우는 것은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비록 랜덤하우스중앙이 국내의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접근해 책의 저자로 둔갑시키고, 그 결과물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많이 포함돼 있지만, 이 출판사야 말로 미국 랜덤하우스의 스타일을 벤치마킹해서 국산 글쓰기 스타일과 편집의 기술까지 미국화하고 있어 오히려 더 해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지난 27일 발표한 상반기 베스트셀러 분석결과에 따르면 50위권에 경제경영 도서가 15종이나 포함돼 50%의 신장률을 보였으며 그에 반해 자연과학·공학·예술·인문학 서적들은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였다. 교보문고는 주요 흐름을 △경제경영 자기계발서의 독주, △여성 자기개발 & 연애도서 화제, △드라마·영화화 된 소설의 붐 △ 쉽고 재미있는 잡학 사전 인기, △역사소설의 부활, △월드컵 효과 등으로 정리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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