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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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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데르 2009-12-08 16:53:46
물론 그 결과물로서 홍선생이 해석한 들뢰즈와 천선생이 해석한 들뢰즈가 상이하게 달라져 버리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이정우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결국 홍윤기에 따르면 천규석이 얼마나 그릇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가가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홍선생이 이 논의에 뛰어든 것은 천선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홍선생은 이정우가 주장하는 '철학함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정우가 던진 부메랑을 그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는 현명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판단됩니다. 즉 홍선생은 이정우에 대해 그는 학적 엄밀함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작 이정우 자신은 얼마나 엄밀하게 들뢰즈독해를 한 것인가에 대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격이 겨냥하는 지점은 앞서 언급한 실체와 개념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이 논의에서 홍선생은 이정우가 만들어놓은 구멍 빈틈을 단지 좇아가면서 매우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형국인 것으로서 이정우는 홍선생이 논점을 벗어난다 논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라고 말할 처지가 아닙니다. 전부 자신이 제시한 논점들이므로 말이죠. 이정우씨는 본인이 지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입장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을것 같군요

괴데르 2009-12-08 16:52:59
천선생이 노마디즘은 곧 침략주의라고 주장하니까 이정우씨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념과 실체구분을 했잖아요. 즉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어서 정도, 양의 문제일 뿐인 것이라고 말이죠. 만약 유목주의나 수목주의를 실체로 본다면 둘은 이분법 구도의 양자택일적 관계가 되는데 둘을 개념으로 본다면 둘은 연속선상에서 논의 가능하며 어떤 유목주의는 좋고 어떤 유목주의는 나쁘며 어떤 수목주의는 좋고 어떤 수목주의는 나쁘다는 유연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정우씨 주장이었죠. 따라서 천선생처럼 노마디즘 전체를 싸잡아서 그것을 침략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죠. 즉 이정우씨가 천선생을 반박하면서 제시하는 핵심근거는 노마디즘을 실체가 아닌 개념으로 보는것이잖습니까

그렇다면 홍선생이 천선생을 지원사격하기 위해 이정우씨를 반박하고자 한다면 어느 지점을 겨냥해야 할까요. 당연히 이정우씨가 천선생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핵심적 근거를 겨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지점이 바로 개념과 실체구분인 것이고 홍선생은 옳게 겨냥한 것이죠. 홍선생은 들뢰즈 자신이 유목주의는 개념보다 실체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이후 논의는 들뢰즈의 원전에 근거하여 왜 들뢰즈의 유목주의가 실체적인 것인가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보이고 이는 학문적으로 매우 바람직해 보입니다.

지층의 욕망. 2007-11-04 02:36:43
이정우의 '의도된 탈주' - 홍윤기와의 논쟁으로부터의 - 는 매우 비겁해보이기까지 하군요. 그가 애초 천규석에 대해 날을 세우고 양아치처럼(?) 덤벼들었던 그러한 도취적이고 까칠했던 지적권력은 어느새 수그러든 남근마냥 스스로 주저앉아 버렸네요. 그러다 머쓱함을 느낀건지 엉뚱한 데서 또 다른 도취적인 masterbation을 감행하고 있는듯도 하구요. 홍윤기의 문제의식과 논지에 대체로 공감합니다. 이정우는 이런식의 썰들을 풀기전에 흘러내린 아랫도리를 보고 타올이라도 하나 먼저 둘르는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닌가 싶네요. 천규석에 대해 원죄를 탓하기전에 말이죠.

보다가 2006-07-05 15:07:03
뭔 개소리들이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을 호통치니깐.. 이제 말의 격을 운운하며 천가와 홍가를 감싸다니...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 해봐라. 이정우 선생 말이 틀린 것 하나도 없구만..

밝음 2006-07-03 23:36:39
우선 처음을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우 선생은 천선생의 책에 대해 서평이라는 이름을 빌려 인격적 모독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논쟁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입니다. 원전을 원어로 읽지 않았으면 겸손해야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전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천선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에 대해 귀기울이고, 그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것 또한 담론의 윤리입니다. 또한 천선생이 지향해오고 살아온 삶에 대해 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최소한의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남에게 윤리와 예의를 거론하려면 자신부터 이를 갖추어야 마땅한 것 아닐까요?

자, 다시금 이제 논점을 분명히 해보죠.
천선생과 홍교수에 대해 논쟁은 그 논점을 분리해야 합니다.

천선생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논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이에 집중해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한 오해는 그 논쟁의 와중에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고요. 이에 대해 이정우 선생은 성실히 귀담아 듣고 그에 대해 논쟁을 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지식을 밑천삼아 모독을 했습니까?

홍교수와의 논쟁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지난번 홍교수의 답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체 무엇을 논하고자 하는 것인가요?

이번 논쟁을 통해 느낀 것은 가진 자는 스스로의 늪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말이죠. 앞으로 이정우 선생이 무엇을 논하든간에 내가 아는 용어의 정의와 지식에 어긋나는 문장을 본다면, 항상 이선생의 말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