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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보편문법, 생물학적 증거 있다”
“촘스키의 보편문법, 생물학적 증거 있다”
  • 장영준 중앙대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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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_김성도 교수의 촘스키 비판(교수신문 제401호)을 읽고

촘스키 혁명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비판(교수신문 제401호)에 대해 장영준 중앙대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김성도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과학사의 차원에서 독창적 패러다임이 아닌데다가, 촘스키의 생물학적 결정주의는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소거해 인문과학에 부적절한 토대이고,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는 도그마적 일원주의의 형식이며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입장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촘스키에 대한 맹목적 찬양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평가를 제안하고 있다. 이에 장영준 중앙대 교수의 글과 그에 대한 김성도 교수의 답변을 함께 싣는다. / 편집자주

▲장영준 중앙대 교수
어떤 강연회에서 촘스키는 자신을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고 소개하는 사회자의 말에 대해 매스미디어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촘스키는 자신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내린 뉴욕타임즈가 바로 같은 글에서 “그가 근거 없는 주장들을 일삼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 부분을 인용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타당성 있는 지적으로 성찰 계기돼

촘스키 혁명의 진정성을 묻는 김성도 교수의 글은 타당한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반가운 글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을 대하면서 떠오르는 첫 생각은 모든 언론의 본질적 위험에 대한 촘스키의 지적이 역시 일리있다는 것이다.


제목으로 뽑은 “침소봉대와 날조”, “비언어학자의 무비판적 수용”만 보면, 촘스키는 “학문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의 근거들을 김 교수가 낱낱이, 충분히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조”가 있었다면 이미 윤리적 차원을 떠나 실정법적 문제까지 초래되었을 것임은 명백하다. 매우 격렬한 단어들이 ‘남용’되었다는 소회와 더불어, 김 교수의 비판이 떠올리는 몇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촘스키 언어학은 ‘셀프 프로모션 마케팅’의 결과인가. 김 교수는 촘스키 패러다임의 성공 요인이 “그의 언어학 이론의 내재적 설명력과 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기보다는 당시 언어학의 급속한 제도적 팽창, 재정지원, 생성 언어학 학술지의 창간 및 편집권 독점 등 외적 요인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는 평가를 인용한다.


촘스키 언어학의 전 세계적 파급과 영향력을 외적 요인의 결과로 보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론의 우월성과 생명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의 언어학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재정지원을 받고, 학술지들이 대거 창간될 수 있었겠는가.


김 교수는 또 “언어학 분야에서의 촘스키의 업적은 희소하고 위대한 창조적 정신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상아탑의 ‘해킹’의 생산물로 … (중략) … 기존의 언어 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학문적 발견물의 침소봉대 또는 날조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독설을 인용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독설이자 한 자연인에 대한 ‘독살’이다. 이러한 독설은 전적으로 촘스키 언어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판관의 실수로 보여진다. 잘 알려졌다시피, 촘스키는 기존의 언어이론 자체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는 그는 매우 독선적이고 오만하다). 때문에 기존의 언어이론에 대한 ‘비방의 남용’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데카르트, 훔볼트, 예스페르센, 전통문법 등의 연구성과들에 그 모태를 두고 젖줄을 대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현대 언어학의 판도를 바꾼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는 수많은 당대의 반대자들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을 수용하면서 이론을 보강해왔다. 비판자들과 생산적 대화를 게을리 했다는 김 교수의 말은 일면 수긍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둘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꽃피어온 지난 반세기 동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수많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했을 뿐 아니라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실용인문학을 추구하는 김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하는 학문이 훌륭한 학문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언어학과 같은 연성과학(soft science)과 물리학 등의 경성과학(hard science)의 유용성을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촘스키 언어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사하로프의 물리학 이론이 수소폭탄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실생활의 변화를 초래했을 때 우리가 그를 훌륭한 학자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촘스키 언어학의 이론 내적인 문제에 대한 김 교수의 지적을 보자. 그는 촘스키의 이론이 “거의 예외 없이 극도의 복잡화와 추상화를 보여주고, 이어서 모순이 동반되고, 작은 과학적 ‘아노말리’와 파란들을 일으키면서 다시 해명에 나서고 침체기로 접어드는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말한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법칙들은 그쪽 분야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료하고 간단할지 모르지만 범인들에게는 너무나 복잡하고 추상적일 것이다. 문제는 촘스키의 이론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에 있지 복잡하냐, 추상적이냐에 있지 않다. 이 점은 김 교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복잡화와 추상화가 이론의 약점인가?

넷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시종일관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빠져 “언어와 관련된 일체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들을 주변화하거나 아예 소거한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 뿐 아니라 촘스키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촘스키는 언어를 내재언어와 외재언어로 구분하여, 자신의 연구가 내재언어를 대상으로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촘스키에게 있어서 내재언어의 연구는 한 개인에 국한되는 ‘언어기관’의 연구이고 정신/두뇌의 연구이다. 언어학이 인지과학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고전적 의미에서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생성문법이 더 이상 언어학이기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게 만드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언어학이 생물학으로 환원 내지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코퍼스 언어학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도 보인다.


다섯째, 김 교수는 촘스키 언어학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향해 돌진”했다고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생물언어학(bio-linguistics)이란 용어가 회자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보편문법은 생득적이라는 주장, 인간의 문법은 생물학적으로 ‘하드와이어’되어 있다는 주장은 촘스키 언어학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검증을 위해 많은 심리학자, 생물학자, 언어습득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여온 결과, 일부는 근거를 얻은 것으로 보이고 일부는 실패한 가설로 폐기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기존의 어떠한 이론보다도 강력한 학문적 역동성(dynamism)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론에 대한 정밀한 검증 필요

마지막으로 촘스키가 “이미 실패한 이론을 대중에게 팔아먹었다”는 김 교수의 비판을 살펴보자. 서두에 언급된 존 썰(Searle)의 비판을 촘스키 혹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의치 않는, 혹은 무시하는 듯한, 이유는 자명하다. 도대체 촘스키의 어떤 이론이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포스탈(Postal)은 2004년 발표한 ‘타락한 언어학’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글에서 촘스키의 부풀려진 기대와 희망을 맹렬하게 비판했다고 하지만, 막상 그는 여전히 생성문법의 틀 안에서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포스탈은 1995년 이후의 촘스키 이론 모델에 대해 반대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결국 그 분야의 전문가들일 것이다. 물론 전문가만이 어떤 사안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김 교수가 언급한 인접 학문의 교수들이 과연 촘스키 언어학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김 교수가 우려하고 있듯이 “비언어학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분명 반성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그릇되거나,  과학적 검증이 될 수 없거나” 한 촘스키의 기대와 약속들에 현혹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촘스키 자신의 말대로 그는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대해왔지 추종자(followers)를 양육한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업적에 대한 저속한 찬양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각론적이고 정밀한 검증이 없이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실패한 이론을 천재적 발견인 것처럼 비언어학 청중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공격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이러한 공격은 촘스키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한 언어학의 진정성을 지금까지 점검, 보완, 반박해온 전 세계 수많은 언어학자들을 싸잡아서 비언어학자로 몰아붙이는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총론적 비판이나 단죄에 앞서 각론적인 점검이 수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촘스키가 “학문적, 윤리적으로 결정적 문제점을 노출한 이력의 소유자”란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전대미문의 어마어마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 인물에 대해서 이제 “맹목적 찬양이 아닌 균형 잡힌 평가”를 해야 한다는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좀 더 구체적인 논쟁이 양산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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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2006-07-13 11:18:51
그럴리가 없는 킬링필드 함 뒤져봐라.

사람 뼈같이 말라비틀어진 보편문법 있나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