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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증거 보여달라” … 비판적 언어학 수용사 필요
“구체적 증거 보여달라” … 비판적 언어학 수용사 필요
  • 김성도 고려대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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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_장영준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장영준 교수의 반론을 읽고 난 후 필자의 비평이 최소한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 사상의 균형 잡힌 평가의 필요성을 수긍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소 존경하던 국내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권위자 가운데 한 분인 장 교수가 자신이 수십년 동안 꾸준하게 연구해온 이론적 패러다임의 창시자에 대한 다소 자극적인 수사와 가파른 언어에  대해서 비교적 차분하게 반박 논리를 전개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을 통해서 필자가 궁긍적으로 던진 물음의 본질은 거의 전혀 감지되지 못했고, 대부분의 문제 제기는 필자가 사용한 표현들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실상, 장 교수가 강조 표시를 하면서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자극적 독설들은 필자의 것이 아닌, 反촘스키 진영에서 피력된 표현들이다. 더구나 이같이 거친 표현들을 사용한 학자들은 촘스키 언어학을 수십년 동안 추종하고 전파했던 그의 직계 제자들이었다.

“비판의 본질 접수되지 않아 아쉽다”

필자는 다만, 지금까지 예찬 일변도나 백과사전식 상투어들을 지양하고, 기존의 찬동 일변도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의 필요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논증 전략의 차원에서 그같은 반대 주장을 先텍스트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촘스키가 어떤 절대적 신화가 아닌 이상, 그가 지난 50년 동안 받아온 온갖 찬양과 흠모의 수사에 못지않게, 그의 학문적 성취의 진정성과 의미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논의는 원칙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의 따분함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장 교수가 반론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역반박을 가하는 수순을 밟는 대신 장 교수가 제기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이어서 이 짧은 지면에서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본질적 문제를 다시 환기시킬 생각이다.

먼저 장 교수는 물론, 독자들에게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장 교수의 비평을 보면, 필자가 反촘스키 진영에 서서 그의 지적 성취의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처럼 비춰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필자가 처음 언어학을 접한 80년대 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촘스키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언어학자들에게 넘어야 할 높은 산이요, ‘문제’ 그 자체이다. 아울러 그가 20세기의 인지과학 혁명을 촉발시킨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기실, 그가 제기한 세 가지 언어학의 과제, 언어의 기원, 언어 능력, 그리고 언어의 사용은 언어 연구의 본령이요,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언어학의 창립자이자 문화과학의 패러다임을 창발시킨 소쉬르가 제시했던 언어학의 3대 과제인 언어의 관찰과 기술, 일반 법칙 추론, 언어학 자체의 한계 설정 및 본질 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시각에서 이들 세 가지 과제들은 섣부른 보편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상의 기술과 설명, 보편과 특수의 미묘한 변증법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촘스키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번째, 과제는 바로 언어학 이론 자체의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철학적 메타적 성찰과 자기 반성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시도한 언어학 이론의 비평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지면 관계상 장 교수가 제기하는 문제를 모두 답할 수 없어 몇 가지 문제만을 재론한다.  첫째, 장 교수는 필자가 제기한 촘스키 언어학 이론의 성공 요인으로 제시한 제도적 사회적 요인들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 지식의 성공 요인이 이론 내재적 내용과 제도적 여건들 사이의 상호 종속적 관계에 있다는 지식 사회학의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근대 언어학의 제도화 과정을 지식사회학 관점에서 고증한 암스테르담스카(Amsterdamska)의 노작을 참조하기 바란다).

예컨대, 촘스키가 MIT에서 언어학과를 창립하고 초기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것은 촘스키 이론 그 자체의 과학적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정보 처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미국방성이 자연언어의 자동 번역이라는 국가적 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미 국방성에서 연구비 받은 촘스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본산지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했던 미국방성으로부터 그 자신은 물론 생성 언어학 연구의 상당수가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심지어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교수 초기 시절 보수의 절반 가량을 국방성으로부터 받았으며, 실제로 군사적 연구와 거리가 먼 언어학의 성격을 변질시켜 가면서까지 연구비를 수주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음을 스스로 발설한 바 있다.

둘째, 장 교수는 필자가 인용한 ‘인접학문의 교수들’이 촘스키 언어학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두면서 그 비판의 적효성을 단숨에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들 언어학사가, 과학철학자, 전문 언어학자, 언어철학자들이 촘스키 비판의 자격이 없다면, 누가 촘스키의 비판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 가운데서는 초기 변형 문법의 창시부터 70년대 초까지 촘스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카츠 교수도 있다) 촘스키 저작은 크게 전문적인 언어학(technical linguistics) 이론서와 언어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다루는 철학적 언어학(philosophical linguistics)으로 크게 양분된다.

그런데 문제는 촘스키 계열의 언어학자들 가운데 이 양자에 대해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연구하는 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촘스키 생성 언어학의 핵심 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촘스키 언어 이론의 인식론적 구조와 정당성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모국어 화자의 직관에 의존하여 생성 문법 이론을 데이터에 적용하고 그것의 적합성을 따져 묻는 작업만이 중시된 것이다.

끝으로,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주의에 대해서 한 마디. 지난 30년 동안 촘스키는 시종일관 인간 정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 개념의 혼란성을 이유로, 언어 연구는 언어 지식을 구성하는 정신적 구성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인간 언어는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대상이며 자연 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필요성만을 반복해왔다.

이제, 이같은 촘스키 언어학의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서 순수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보편 문법 과학성을 입증할 수 있는 생물학적 증거가 현재 얼마나 확보되었으며, 아울러 인간의 언어 구사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장 교수를 비롯한 생성언어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가 제기하려 했던 문제는 무엇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의 언어학계를 평정하고 그 지적 헤게모니를 휘둘러 온 촘스키의 언어 사상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시점에 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문제의식은, 하나의 특정 언어학 이론이 과도한 독점적 주류를 형성하여 다른 언어학 이론들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에서 학문의 다양성 정신을 훼손시키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언어학 자체의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교란시켰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느냐가 중요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세 개의 하위 주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그의 이론의 과학성과 진정성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과연 그가 행동 하는 양심의 선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언어학 이론을 구축하면서 타자의 비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하게 소통했는지 점검하면서, 그의 학문적 윤리성을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난 40년 동안 촘스키 가라사대 식의 맹목적 수용과 추종을 당연시한 한국의 언어학자들(여기에는 애석하게도 일군의 국어학자들 역시 포함된다)에게 그의 언어 모델의 획일적 적용을 통해 과연 한국어의 본질과 구조가 얼마나 해명되었는지 점검해, 비판적 서구 언어학 수용사를 진작시키려는 암묵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같은 문제의식을 장 교수가 동감하고 그 취지에 찬동한다면, 필자의 글과 장 교수의 반론에서 제기될 수 있는 사소한 오해나 곡해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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