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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출판사를 찾아서_(3) 지식산업사
학술출판사를 찾아서_(3) 지식산업사
  • 박수진 기자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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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출판 외길 37년 … ‘기록문화상’ 제정 돋보여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

“국문학과 국사학을 한다는 이들 중 ‘지식산업사’를 모르는 이들은 엉터리야.” 지식산업사 창사 2년 후인 1971년부터 35년간 지식산업사에 몸을 담아온 김경희 대표는 지식산업사에 대한 자신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자신감은 지식산업사가 그간 일구어 온 몇 가지 기록들이 밑동을 형성한다.

지식산업사가 처음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낸 건 1971년 ‘이조 회화’를 출간하고서다. 당시는 컬러 사진은 물론 컬러 인쇄도 없던 시절. 신문사에서 만드는 달력도 석판 인쇄로 빨강, 파랑, 검정 세 가지 색이 다였다. ‘미술 출판’을 하겠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때에 지식산업사는 독일에서 컬러 인쇄 훈련을 받은 평화당이라는 인쇄소를 통해 ‘이조 회화’ 출판을 시도한다. “우리 민족 미술도 중국, 일본 못지않으며 이를 알려야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 때문에 작품 설명도 영어, 일어, 한국어 3개어로 달았다. 당시 한 질 가격은 3만4천6백원으로 서울대 교수 한달 월급인 3만원보다 높았다. 높은 가격에 미술 출판이라는 생소한 분야 때문에 ‘누가 사겠냐, 과연 사겠냐’던 우려는 당시 주한 미국대사인  Philip C. Habib의 주문에 이어 청와대가 한국을 공식 방문한 영국 외상에 선물한다며 2질을 주문함으로써 사라졌다. 뒤이어 일본 수출 10만 달러라는 상업적 성공도 거두면서, 간송미술관과 합작한 ‘추사 명품첩’(1976), ‘겸재 명품첩’(1981) 등을 계속 발간하며 사세를 키웠다.

서울대 사학과 졸업 직후 민중서관(現 민중서림), 을유문화사를 거쳐 사촌 형이 운영하던 ‘지식산업사’에 자리잡은 김 대표는 본격 학술 기획출판을 하게 된다. 김 대표는 일본인 조선 사학자인 하타다 다카시가 중심이 된 ‘조선사 연구회’가 일본에 세워지고, 이들이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 연구 내용, 해방 후 연구 내용 등을 망라해 ‘조선사입문’을 발행하고 1970년에는 개정판 ‘신조선사 입문’을 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 대표는 “일본인 사학자가 우리 역사 입문서를 내는데 우리 사학자는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개탄이 들었다”며 당시 ‘한국사 연구회’의 대표간사를 맡고 있던 강만길 교수에게 한국 학자들도 한국사학계를 총동원해 우리 역사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그 다음 대표간사인 김용섭 교수 임기에 이루어져 1979년부터 2년간 60여명의 한국 사학자들이 18번 회의를 거쳐 ‘한국사 연구 입문’을 발행한다. 1981년 나온 이 책은 학계나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김 대표는 “이것이 본격 학술 기획출판의 효시였다”라고 말한다.

이후 김용직·조동일·황패강·이동환 교수 등이 책임 집필한 ‘한국문학연구입문’, 또 이강원·이우성·윤사순 교수 등이 문교부 연구비를 받아서 연구한 결과물인 ‘한국학연구입문’ 등 민족학 연구입문서를 차례로 내면서 국학과 국사학, 국문학 등 한국학 분야의 저자 인프라를 갖추게 된다.

지식산업사는 이렇게 쌓은 힘을 바탕으로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 학문을 하는데 보탬이 되겠다”는 출판 정신을 창사 37년째인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식산업사의 대표 저작들은 조동일 서울대 교수의 ‘한국문학통사’·‘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신용하 서울대 교수의 ‘독도, 보배로운 한국 영토’를 비롯한 신용하 저작 전집, 김용섭 연세대 교수의 저작집, 서울대 동양과학 연구회의 ‘강좌 중국사’ 7권 등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국사학, 국학 분야 외에도 미국 영향이 짙은 심리학에서 한국인의 ‘마음’을 개념화해 학문의 토착화를 이루려는 최상진 중앙대 교수 등이 쓴 ‘동양 심리학’ 등을 발간했다.

올해 다섯 권으로 완간될 예정인 ‘우리말 철학사전’에서도 ‘우리 눈으로 우리 학문하기’는 이어진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가 중심이 되어 우리사상연구소가 엮은 ‘우리말 철학사전’은 외국 철학에 기대거나, 공허한 이론 언어로 채워져 있는 기존 철학 용어들을 ‘우리’의 문제의식과 시각을 견지하고 일상 언어를 사용해 주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순한 번역의 차원을 넘어서 철학에서의 학문적 주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다.

김 대표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출판관은 “팔리지 않더라도 사회에 필요한 책을 만드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알지도 못하고 가입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대해서 늦게라도 알아야 되지 않겠냐며 펴낸 ‘경제협력개발기구’(임홍재 지음, 1998)가 그렇고 중국 분야 시장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때 민두기 서울대 교수 및 연구자들이 직접 호남성을 답사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 성과를 모아 책을 내자고 기획하고 실행한 ‘中國近現代史上의 湖南城’ 등이 그런 책이다. 지금도 중국에 진출한 기업의 80% 이상이 실패하고 있고, 우리가 16억 인구 중국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중국 경제 전략’, ‘중국근대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이병주 옮김) 등을 계속해서 펴내고 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한국인 기록문화상’ 역시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삶의 경험과 땀의 체취를 기록하고 책으로 남겨두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 끝에 김 대표의 머리 속에서 기획됐다. 문화일보와 서울방송(SBS), 지식산업사 3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해외 한인 기록문화상’은 1905년 멕시코에 강제 이주당한 이래 아직 남아있는 한인들의 자취와 삶을 10년간 좇아 기록한 재미극작가 이자경씨가 받았다. 이는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로 출간됐는데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검은 꽃’의 작가 김영하가 머리말에서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가 없었더라면 이 책은 없었을 것”이라며 그 ‘기록성’을 치하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어렵게 추진한 기록문화상이 이렇게 쓸모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 한 켠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편집부 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

지식산업사가 다른 학술출판사와 다른 점으로 ‘학술 용어의 우리말화를 위한 노력’이 꼽힌다. 편집부 강명훈 씨는 “전문 학술 도서의 경우 교양서보다 편집자의 재량권이 작지만, 지식산업사의 경우 영문 번역투가 심한 단어 등을 가급적 우리 말로 바꾸기 위해 저자를 설득해서 많이 순화한다”라고 학술 서적에서 우리 말 사용하기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경희 대표의 ‘우리 말 지키기’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 탓도 있고, ‘우리 시각으로 우리 학문하기’라는 출판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지식산업사를 굳건히 받쳐주는 또다른 힘은 한 번 맺은 연을 평생 이어가는 저자진이다. 영남대 교수 시절 “박사학위 논문은 꼭 지식산업사에 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이래 여지껏 연을 이어가고 있는 조동일 서울대 교수, 신용하 교수, 김용섭 교수 등은 지식산업사의 허리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1983년 지식산업사가 부도나자 변형윤, 민두기, 진덕규, 이태진 교수 등 40여명의 교수들이 ‘지식산업사 살리는 모임’을 만들어 재활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또 이들이 소개해 준 임재해 안동대 교수 같은 뛰어난 제자, 후배들이 그 뒤를 잇는다. 이런 탄탄한 저자진 덕에 지식산업사의 필자는 90% 이상이 내국인이면서도 연간 3~40종의 양질의 학술서를 꾸준히 발간해오고 있다.

김 대표는 학술 출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번지르르한 겉모양보다 내용”이라고 말한다. 최근 간혹 상업성이나 표지 디자인 등에 강한 다른 출판사에 원고를 갖다 주려다가도 “지식산업사가 영업에는 부진하지만 교정에서는 최고다”라며 다시 지식산업사로 오는 이들도 많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학술 출판사라 하더라도 상업성을 많이 따지고 인문학 분야 책은 체면치레용으로만 내려는 분위기에서 한국학 분야 원고가 들어오면, 질만 담보되면 책을 우선적으로 내주는 출판사는 드물다”라며 꼿꼿이 지켜오고 있는 출판정신에 의미를 부여했다.

현재의 고민은 평생을 같이 해온 과거 필진들을 이어나갈 젊은 필진 발굴이다. 지식산업사의 내일을 위해 새 물을 들이붓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이를 위해 현재 매해 한국학 전공 소장학자 중심으로 필자를 기획 발굴하여 두세 권씩 솔벗학술총서를 간행하고 있다. 다만 요즘은 깊이 있고 내용이 다양한 좋은 원고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지식산업사의 대표작을 묻는 질문에 김 대표는 어렵사리 몇 권을 말했지만, 사실 출판 기조를 지키면서 발간해 낸 37년간의 책들 모두가 지식산업사의 얼굴이다. “책은 영원히 남는 증거이므로 한 권을 만들더라도 충실해야 한다”는 김 대표의 출판관이 한 권 한 권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박수진 기자 namu@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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