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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의 이념적 공모? …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해
플라톤과의 이념적 공모? …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해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6.28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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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_ 박치완 한국외대 교수, 들뢰즈 철학 맹비판

국내 서양철학자가 들뢰즈의 철학적 진정성에 물음표를 크게 찍었다. 박치완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최근 ‘철학연구’ 제31집(고려대 철학연구소)에 실린 ‘들뢰즈의 플라톤 비판과 시뮬라크르의 반란 또는 복수’에서 들뢰즈가 플라톤을 쏙 뺀 ‘도플갱어’라고 결론지었다.

어째서 상식을 뒤집는 이런 결론이 났을까. 박 교수는 두가지를 묻는다. 과연 들뢰즈의 플라톤 타파는 성공했는가, 그리고 타파 이후는 무엇인가. 그리고 답한다. 타파는 실패했고 타파 이후는 아무 것도 계획된 게 없다고.

 애초에 들뢰즈는 플라톤에 대해 “차이를 동일자나 유사성에 근거하지 않는 차이 자체로서 드러내주지 못한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재/이데아’, 그리고 ‘실재/모방물’을 구분할 때 어떤 하나(비순수 혈통)를 다른 하나(순수 혈통)와 비교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어 차이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논변은 “모순의 변증법이 아닌 경쟁관계의 변증법”에 속할 뿐이라는 게 들뢰즈가 등을 돌린 이유였다. 박 교수는 들뢰즈가 “플라톤이 시뮬라크르의 존재(?)에 도덕적 의미의 ‘악마적 속성’을 부여한 것에 격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구닥다리 도덕이 발동되는 게 싫었던 들뢰즈는 아예 판을 바꿔 유사성의 모델이 아닌 비유사성이 모든 사유의 원천이 되는 타자의 모델을 개발한 것이다. 그로써 마침내 구조를 부수고 그 표면으로 무수한 차이들을 기어나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과연 도덕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져서 새로운 존재를 얻은 시뮬라크르가 “동일성의 논리에 대해 反구조적으로 기능”하며, 심지어 “구조 해체의 임무까지 떠맡아야” 한다면 역할 과잉 아니냐는 게 박 교수의 질문이다. 따지고 보면 들뢰즈의 장황한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를 통해 아무 것도 지향하는 바가 없”지 않느냐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오직 시뮬라크르의 위상을 자신의 상상 공간, 즉 ‘장소’가 아닌 ‘非장소’ 안에서 극대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實在’의 인식이나 이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오직 플라톤 식의 재현시스템의 전복에만 지나치게 매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런 집착은 “자신의 ‘차이’ 개념을 새로운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다분히 의도된 공격”이라는 것이 비판의 중심적 내용이다.

“차이는 이미 충분하다”

물론 들뢰즈를 그리로 몰고 간 몇가지 외부적, 내부적 정황은 포착된다. 1960년대 68혁명과 함께 번지던 모더니즘의 붕괴기운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걸 철학운동으로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 혹은 당시의 철학이 지나친 재현의 논리를 사유에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

하지만 박 교수는 이런 이해의 태도에서 금방 발을 빼며, 온정주의나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해석을 경계한다. 차라리 그는 미셸 메이에르를 인용하면서 “차이의 보편적 권리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이념적·현실적으로 확보된 마당에 여전히 절대 권리를 차이에 부여하려는 태도는 철지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선택한다. 혹은 윤성우 한국외대 교수(서양근대철학)의 저작 ‘들뢰즈: 재현의 문제와 다른 철학자들(철학과현실사, 2004)을 인용하면서 “재현이 갖는 다양한 층위를 고려하지 못하고 곧장 비표상적 결말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이라고 자리매김한다.

이런 결론은 들뢰즈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작업을 일컬어 “우리 자신을 좀 흩뜨리는 것으로,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피부를 북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위대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과연 위대한 정치는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헤겔적 변증법을 넘어선 차이의 변증법이 있었던가.

혹시 박 교수의 표현처럼 “모든 사회,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금욕을 요구하는 플라톤 식의 유토피아가, 각자 절제하기 힘든 개인적 욕망을 자유방사하는 그런 무정부주의적인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데아를 밀어낸 시뮬라크르, 새로운 위계 형성”

결론은 이미 나왔지만, 박 교수는 들뢰즈가 반플라톤주의를 완성했다기보다 플라톤주의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으며, 시뮬라크르, 차이, 생성 등을 통해 동일성의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고심했다기보다, 철저한 대립으로 부각시키고 나아가서는 ‘위(上)’에 위치시키려 했기 때문에 결국은 플라톤 전복이 아니라 그와의 ‘이념적 공모’에 다름 아니라고 가혹하게 말한다. 왜 이런 점증되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들뢰즈의 모순들이 강조되는 것일까.

왜냐하면 지금은 시뮬라크르들이 “요구하는 ‘권리’보다 순전히 이념지향적인 허구성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이기 때문이다. 들뢰즈 시대에는 시뮬라크르와의 유희가 건설적이고 유쾌한 사건으로 비칠 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비록 사고의 차원이라고 해도, 무정부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판단인 것이다.

신인섭 강남대 교수(현상학)가 ‘메를로-퐁티와 시뮬라크르의 현상학(‘철학’ 제77집, 2003)에서 지적했듯 “현대철학은 많은 부분 언어적 인플레 속에서 전통 사유 체계의 전환을 시도하기 때문에 철학 내에서 이미 ‘지시적 지식’이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고, 시뮬라크르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다.”

어찌 이것이 철학만의 일일까. 언어와 화법이 철학을 철저히 빼닮은 문학이론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과연 들뢰즈는 생성의 철학자일까 아니면 동어반복을 싫어한 언어유희자일까, 어디에 무게추가 쏠릴까, 또 다른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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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2006-07-02 06:27:51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독자 2006-07-01 21:12:57
강성민 기자님 기사를 읽다 보면 종종 제목이 바뀌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기자님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 기사제목도 벌써 두번인가 바뀐 것 같네요. 처음에 올리실 때 잘 정해서 올리시면 안 될까요?

언젠가 읽었던 어느 기사는(칸트연구 원전부터 다시...였던가요?) 나중에 기사 내용도 부분적으로 바뀌더군요. 꼭 올려놓고 퇴고를 하는 것 같아서 (물론 그건 아니겠지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좋은 기사들 잘 읽고 있긴 한데 요런 부분들 신경써주시면 더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