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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에서 적으로…‘68혁명’이 갈라놓은 두 지식인의 운명
절친에서 적으로…‘68혁명’이 갈라놓은 두 지식인의 운명
  • 변광배
  • 승인 2023.02.02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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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지음 | 변광배 옮김 | 612쪽

마르크스주의와 맺었던 관계·담론 재평가
프랑스 좌파 일간지도 아롱 옳았다고 지적

『세기의 두 지식인, 사르트르와 아롱』은 이른바 ‘시앙스 포(Sciences Po)’인 파리정치대학 교수를 역임한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의 『Deux intellectuels dans le siècle, Sartre et Aron』(Fayard, 1995)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서론의 제목인 ‘천국과 지옥 사이(Entre walhalla et hallali)’에 함축되어 있다. ‘발할라’는 북유럽 신화에서 영웅적인 전사들이 사후에 머무는 장소로, 천국에 비유된다. ‘알라리’는 사냥감을 함정에 몰아넣었을 때의 사냥꾼의 함성이나 각적 소리, 사냥의 마지막 순간 등을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패배나 파멸을 의미한다. 

시리넬리는 1980년대 구(舊)소련과 동유럽 및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의 붕괴 과정에서 사르트르와 아롱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음을 사학자의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하강, 아롱의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상승이 그것이다.   

20세기 말에 내려진 시리넬리의 이런 판단이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프랑스 좌파를 대변하는 <리베라시옹>의 2017년 7월 2일자 「애석하다. 레몽 아롱이 옳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그 증거다. 사르트르가 이 신문의 발기인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기사는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사르트르와 아롱의 관계는 롤러코스터를 닮았다. 절친(petits camarades)에서 적(敵)이 된 과정이 그렇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많이 겹친다. 고등사범학교 입학, 철학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레 탕 모데른> 창간 주도 및 협력 등등. 하지만 두 사람은 냉전시대 이후 이념적으로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고, 특히 1968년 5월 혁명을 계기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만다.  

 

왼쪽부터 레몽 아롱(1905∼1983)과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이다. 둘은 어쩌다 친구에서 적이 됐을까. 사진=위키백과

사르트르는 해방 후에 프랑스 인텔리겐치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전쟁 전에 그는 문학을 통한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했다. 현실과 역사에는 무관심했다. 해방과 더불어 ‘실존주의’와 ‘앙가주망’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동반자’의 길을 가면서 온건 좌파 지식인들의 대부가 된다. 1960년대 초중반, 구조주의의 파고에 휩쓸렸으나,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선정됐고(이 상의 수상을 거부했다), 1968년 5월 혁명과 더불어 일시적으로 다시 일어섰다. 이 모든 활동을 통해 20세기가 ‘사르트르의 세기’였다는 단언이 정당화되고 있다. 

아롱은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르트르보다 더 열렬한 현실 참여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아롱은 전쟁 중에 런던에서 드골 장군을 도왔으며, 해방 후에는 저널리즘에 종사하면서 현실과 역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했다. 이런 경험을 안고 그는 후일 소르본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역임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아롱은 자신이 ‘지식인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좌파가 득세한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옹호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듯 상반된 상황에 처해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아롱과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사르트르와 틀린 얘기를 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 국제정치 질서가 요동쳤고, 그 무렵부터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두 사람이 각자 생전에 마르크스주의와 맺었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된 각자의 수많은 담론(공산주의, 전체주의, 식민주의, 개인숭배, 계급투쟁, 혁명, 폭력 등에 관련된 담론)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이 시리넬리의 주장이다. 

이 책은 프랑스 지성사, 나아가 세계 지성사의 한 장을 장식한 두 사람에 대한 과거형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재 진행형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과거에 고민했던 문제가 우리에게는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세기의 유물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청산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이했고, 또 힘겹게 이 새로운 세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이 책이 이런 상황에 대한 성찰과 이해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변광배
전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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