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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5] 폭군‧도둑은 투표로 시민들이 자유롭다고 믿게 속인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25] 폭군‧도둑은 투표로 시민들이 자유롭다고 믿게 속인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3.01.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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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샌더 스푸너
라이샌더 스푸너는 변호사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아나키즘 저술의 소개가 지극히 빈약한 한국에서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저술의 번역이나 소개는 활발하다. 그 중 하나가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 1808~1887)의 『국가는 강도다』라는 책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에 번역된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저자가 1860년대에 쓴 글을 옮긴 것이니 150년 이상이 지난 뒤에 소개되는 셈이다. 그러나 150년 전 스푸너가 쓴 글과 같은 글을 나는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다. 한국 역사에 누가 국가는 강도라고 했던가?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물론 역사에 기록된 인간들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모두 국가 쪽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일제라는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아나키즘일까? 

흔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하면 자기에게만 애착을 갖는 이기주의자로 보기 쉽지만, 스푸너는 바쿠닌이나 마르크스처럼 ‘국제 노동자 협회’(제1인터내셔널)의 회원이었고 노동운동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반권위주의자였으며 우파는 물론 좌파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등주의적 함의는 무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임금노동을 반대하고 자본을 노동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스푸너는 자본주의적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반자본주의자적 아나키스트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로스바드와 같이 그를 숭배하는 자본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스푸너를 편리한 대로 왜곡한다. 그런 아류는 한국에도 많다.

부당한 법은 부정했던 스푸터

변호사이자 아나키스트이며 노예 폐지론자, 사업가, 수필가, 법학자, 정치철학자, 유니테리언(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개신교 파생 종파) 등 여러 가지 얼굴을 갖는 스푸너는 18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애솔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5년간(대졸자는 3년)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습기간을 거쳐야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스푸너는 그것이 빈민을 배제하려는 부자들의 불합리한 법이고 계약에 대한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투쟁하여, 1836년 그 제한을 폐지시켰다. 1835년 그는 당시 법을 위반하고 수습 3년 만에 변호사를 시작했다. 간디도 법을 위반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런 변호사들을 대한민국에서 본 적이 있는가? 부당한 법을 비판하거나 부당한 법에 의해 감옥에 가는 변호사는 있지만, 그 법 자체를 부정하고 스스로 감옥에 가는 변호사가 있었던가? 

스푸너는 의사 등에 대한 마찬가지 제한에도 반대했다. 자연법 또는 그가 정의의 과학이라고 부른 것을 옹호하면서, 조세를 포함하여 개인과 재산에 대한 선제적 강압 행위는 부도덕하기 때문에 범죄로 간주되는 반면, 인간이 만든 자의적인 입법을 침해하는 소위 범죄 행위는 반드시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정부의 우편사업 독점에 반대하며 1844년 사영 우편업을 시작하여 성공을 거둔다. 비록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사업을 접어야 했지만 그의 이러한 도전은 우편 요금의 인하를 가져왔다. 

스푸너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이기도 했다. 사진은 노예 반란을 시도했다 실패한 노예폐지주의자 존 브라운이 1859년 12월 2일 사형대로 끌려가는 모습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푸너는 1845년 발표한 『노예제도의 위헌성』으로 정치평론가이자 노예제도폐지 운동가로서 유명해졌다. 『도망친 노예들을 위한 변호』, 『자유입헌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건의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예를 변호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던 그는 군사력을 통한 남북전쟁을 반대하면서 북부 정부와도 충돌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강제적인 과세에 반대했고 배심제를 옹호하는 등 미국 헌법의 위헌성과 그 위에 세워진 정부의 폭력에 저항하는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스푸너는 “동의 없는 과세는 강탈”이며, “미국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국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악당들의 연합체이자 강탈자”일 뿐이라고 말한 그는 『자연법 또는 정의의 과학(Science of Justice)』(1882)에서 정의는 각 개인이 인격과 재산의 불가침성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정의를 잊어버려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한, 그들 사이의 정의를 유지하고 불법 행위자에 대한 상호 보호를 위해 결사를 맺는 것이 분명히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했다.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그러한 자발적인 연합은 최소한의 국가와 다를 바 없지만 화재 또는 상업 손실에 대한 보험 정책과 유사하다고 봤다. 스푸너가 보기에 이는 전적으로 계약의 문제다. 

유효하지 않는 사회계약과 권위를 주장하는 정부

변호사로서 스푸너는 처음에 미국 헌법을 받아들였다. 그의 초기 저작, 특히 노예제에 관한 논문에서 그는 그것이 사적 판단의 권리와 조화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한 배심원 재판이 정부 법령보다 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믿었다. 

남북전쟁은 마침내 그에게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정부에 복종하고 지지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확신하게 했다. 그는 일련의 『반역죄가 아니다: 권위 없는 헌법』 팸플릿에서 “어떤 사람이 정부를 지지하는 데 동의하거나 동의한 적이 없다면, 지지를 거부하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전쟁을 한다면 그는 반역자가 아니라 개방적인 적으로서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의는 만장일치여야 하며, 세금이나 개인 서비스를 통해 정부에 기여해야 사안들은 모든 개인의 별도 동의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남북전쟁은 스푸너에게 원하지 않는 정부에 복종하지 않을 저항심을 강화시켰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푸너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모든 시민이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 일반, 특히 미국 헌법의 계약 이론을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자신 외에는 누구를 위해서도 계약할 수 없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이 정치적 계약을 후대에 구속력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유효하지 않은 사회 계약을 근거로 권위를 주장하는 정부는 분명히 불법이다. 실제로 세계의 모든 강력한 정부는 약탈, 정복 및 동료 인간의 노예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강도 집단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조직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고 노예화하며 전리품에 대한 합의된 몫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자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계약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정부라는 '폭군-도둑'은 국민들 중 일부가 몇 년마다 새로운 주인에게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롭다고 확신함으로써 국민을 속인다. 투표는 다른 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동안 자유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에서 이루어진 자기 방어 행위에 불과하다. 

시민사회는 언제나 자발적으로 조직돼야

팸플릿 『빈곤: 그 법적 원인과 법적 치유(Poverty: Its Illegal Causes and Legal Cure)』(1846)에서 스푸너는 범죄를 빈곤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으로 추적했다. 스푸너는 범죄에 대한 치료법은 자신의 신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현재의 '운의 수레바퀴'를 '확장된 표면으로 바꾸고 불평등에 의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수준을 나타내고 모두에게 안전한 위치를 제공하고 강제나 사기에 대한 필요성을 생성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용주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며 쉽게 신용에 접근할 수 있는 자영업자와 기업가의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 결실을 얻는다면 부의 공정하고 평등한 분배가 초래될 것이라고 본 스푸너는 존 로크의 주장을 아나키즘적 결론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푸너는 1887년 50년 넘게 투쟁하다가 작은 방에서 80년의 삶을 마치고 보스턴의 포리스트힐 묘지에 묻혔다.  

스푸너의 묘지석. 묘지석에는 'CHAMPOIF OF LIBERTY'가 쓰여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푸너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항상 미국 사회의 병폐를 정부에서 추적했고 시민 사회는 자발적인 결사체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와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과 같은 미국의 현대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스푸너의 주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를 좌파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만들었다. 실제로 그의 출발점은 개인이지만 그는 일종의 거친 평등과 이익 자치체를 추구하여 고전적 자유주의를 넘어섰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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