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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우생학' 신드롬
21세기판 '우생학' 신드롬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6.06.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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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유전학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20세기 초엽은 우생학의 시대였다. © www.life.uiuc.edu/ib

 

유전학에 대한 열광이 식을 줄을 모른다. 뉴스포털에 들어가 보면 관련 기사가 일주일에 적어도 한 개는 꼭 뜬다. 굳이 기사를 읽지 않아도 내용은 누구나 다 안다. 인간의 지적 능력 혹은 감성적 성향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거나, 음주벽을 결정짓는 유전자 혹은 동성애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식별됐다는 것이다. 보도는 구체적이고 극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키 193센티에 푸른 눈과 갈색 곱슬머리의 만능 스포츠맨이자 박사인 독일계 남성의 수퍼 정자 401호에서 25명의 배다른 아이가 태어났다.” 이는 워싱턴 포스트의 최근 보도다. “인간의 30억개 DNA 염기서열을 휴대용 메모리에 담아 다니면 특정 유전자로 인한 개인의 질병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는 국내 최대 기업 대표이사의 최근 발언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생학이요 인간개조론일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주의이기도 하다. 모든 유토피아적 기획의 중핵에는 ‘신인간’의 생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현대사를 전공하는 필자에게 유전학적 유토피아주의는 익숙하고 또한 불길하다. 유전학은 20세기 초엽에 탄생한 학문이다. 당시 아직은 하등생물의 유전자 구조 해명에 몰두하고 있던 그 학문의 사회적 의미는 우생학 운동에 의해 부여받고 있었다. 완전한 인간의 생산이 그것이다. 다만 유전학의 학문적 성과가 아직은 일천했던 그 시기, 목표를 위해 채택된 수단은 부정적이었다.

미국의 경우 1938년까지 총 30개 주에서 ‘열등인간’에 대한 강제 단종수술이 합법화됐고, 총 6만여 명의 미국인이 실제로 불임의 운명에 처해졌다. 1929년에는 덴마크가 그 뒤를 이었고, 스웨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최악은 나치 독일이었다. 집권한지 두 달 만에 단종법을 통과시킨 나치는 몰락하기까지 약 40만 명에게 단종수술을 강요했고, 약 10만 명의 ‘열등인간’을 안락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 민족에게도 비슷한 불행이 닥쳐왔었다. 1912년에 소록도에 한센인 수용소가 설치돼 멀쩡한 그들이 강제노역과 단종수술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유전학적 유토피아는 단종수술 및 학살과 무관하다. 그러나 어제의 그 운동에는 오늘에 와서 되돌아보면 볼수록 더욱 긴박해지는 의미가 하나 식별된다. 당시 우생학 운동은 단지 생물학 혹은 과학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운동이었다. 단종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소위 유전병 환자만이 아니라, 술꾼과 노숙자와 노동 회피자와 어쩌다가 걸려든 빈민이었다. 그리고 단종법이 왕성하게 입법화되던 때는 세계대공황기였고, 입법화의 명분 역시 사회복지비용의 절감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유전학적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사회적 기획이었던 것이다. 이는 문학에서도 적나라하게 형상화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단종법이 통과되던 1930년대 초반,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서 유전학적 디스토피아의 사회적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냈다. 하나의 난자에서 최대 96 명의 신생아를 부화시키는 그 ‘신세계’의 구호는 “공유, 평등, 안전”이었고, 온갖 심리 교육법이 동원되는 그 세계의 최종 목표는 계급의 고정이었다. 인간의 노화 문제를 해결한 그 세계는 지배와 노동이 영원히 분리되고 고정된 세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형상화가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워싱턴 포스트의 ‘수퍼 정자 401호’는 헉슬리가 묘사한 인간생산 공장과 똑같고, 한국 대기업 사장의 DNA 메모리칩은 현재의 경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줄 도깨비 방망이다. 그러나 유전학은 인간을 해명해주지도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한다. 특정 인간의 유전자 정보는 최선의 경우 그 인간의 ‘개연성’을 지시해줄 뿐, 그의 ‘구체적인’ 인격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과학은 경제가 아니다. 산업혁명은 1차와 2차 모두에서 과학과 무관하거나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었었다. 과학은 사회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한다. 과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조건 한 가지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는 사회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문제에 대한 과학적 우회로를 발언하는 것은 실제로는 사회문제를 회피 혹은 억압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유전학적 유토피아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김학이 / 동아대·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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