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3:05 (수)
빗창
빗창
  • 최승우
  • 승인 2023.01.17 1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행백 지음 | 아마존의나비 | 368쪽

한반도 남쪽 섬, 한가롭던 해변에 정부가 거대한 항구를 만들기로 결정하자 마을 사람들은 반대 운동에 나선다. 환경 보호의 명분 뒤엔 육지인들에 대한 해묵은 거부감 또한 똬리 틀고 있다.

비대위 농성 천막이 세워진 바닷가 너럭바위에 마을의 마지막 심방(무당) 고장생이 홀로 진혼굿을 벌인다. 오래전 그곳에서 떼죽음 당한 원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농성장에서 지켜보는 석준은 어릴 적 굿을 따라다니던 기억을 되살리며 장생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서울에서 광고 회사에 다니던 석준은 민간인 사찰 사건에 연루되어 서른넷 나이에 실직하고 빈털터리로 귀향했다. 석준의 형, 명준은 집 마당에 들여놓은 컨테이너 공장에서 농기구 만드는 일을 한다. 한쪽 다리를 절며 늘 남의 눈치나 보던 그가 마을 비대위원장을 자청해 활동하다 구속되기에 이른다. 석준에게 농성장은 구속된 형을 대신하여 마지못해 참석하는 자리다.

1949년생 심방 장생은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람들의 병까지 고쳐 주던 어미 심방 문막례의 뒤를 잇는 마을의 마지막 심방이다. 젊은 시절 스스로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하고 월남전 참전 후 직업 군인으로 1980년 빛고을에 파견되었다. 5월 난리통에 자신의 아이까지 배 속에 품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좌절하던 그는 결국 세상을 등지고 귀향했다. 어미 심방을 이어 무가에 입적하지만 잃어버린 여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자 하는 처절한 욕망을 어미에 못 미치는 신기(神氣) 대신 묘약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애쓴다. 마침내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여주는 관시탕을 얻었으나 제 몸에 반복된 시험으로 끝내 건강을 잃어 정작 본인은 그 묘약의 효험을 경험할 수 없다.

석준은 베트남 출신 어린 형수 응옥이 환청과 두통에 시달리자 수감 중인 형을 대신하여 병원에 데리고 다니지만 원인 모를 병의 치료에 실패한다. 며느리의 증상이 향수병인가 싶은 어머니 부탁으로 형수 응옥을 데리고 베트남 친정에도 다녀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그러는 사이, 석준과 응옥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낀다.

명준과 결혼한 지 6년이 됐지만 응옥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산부인과 진단 결과 그녀에게는 이상이 없다. 그녀는 평생을 해녀로 살아 온 시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운다. 연로하여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게 된 할머니는 손자며느리의 손에 빗창을 쥐어준다. 두통으로 실신하기에 이른 손자며느리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석준에게 고 심방을 찾아가 보라고 권한다. 응옥의 신기를 첫눈에 알아본 고 심방은 석준에게 일종의 거래를 제안한다. 형수의 병을 고쳐줄 테니 몸이 쇠락해진 자신을 대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한 잔이면 과거로, 두 잔을 마시면 미래로 간다는 고 심방의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석준은 관시탕을 받아들고 과거 여행에 빠져든다. 그리고 해방 후 이어진 비극의 가족사와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