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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어가 던지는 존재의 물음…일본어 중역은 오역
일상어가 던지는 존재의 물음…일본어 중역은 오역
  • 이기상
  • 승인 2023.01.20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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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_‘하이데거’ 번역에 나타난 문제점

객관적인 입장에서 선호하는 번역어 선택
좋은 중개인 역할하며 실존계기·범주 해설

『하이데거 극장 1』의 제2부는 “신들과 거인들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존재와 시간』에 할애되었다. 250쪽이 넘으니 웬만한 책 한권 분량인 셈이다.

 

필자는 『존재와 시간』을 번역해서 내고(까치, 1998),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해설집까지 펴내고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까치, 1998), 거기에 덧붙여 쉬운 해설서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살림, 2008)까지 출간했다. 그런 나로서는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이데거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존재와 시간』을 번역해 출간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필자가 번역해서 내기 이전에 이미 네 종류의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내가 독일에서 하이데거 철학으로 학위 받은 1호이고 나 뒤로는 많은 사람이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나를 비롯한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하이데거학회도 구성하고 주기적으로 모여 어려운 하이데거 원전들을 같이 읽으며 토론을 했다. 그때 이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존재와 시간』 번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하이데거 특유의 개념들을 갖고 많은 토론을 벌였다. 어쨌거나 나는 나 나름대로 일찍 귀국했기에 학부와 대학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강의와 강독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다양한 강의록들을 만들어 수강생들의 이해를 도우려 애를 많이 썼다.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를 시작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 1992),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광사, 1993)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명실공이 하이데거 철학 전도사 역할을 했다.

필자가 계속 주장해온 것이지만 하이데거는 처음으로 일상의 독일어를 철학개념으로 삼아 살아 있는 인간 현존재의 철학을 펼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존재와 시간』을 옮기려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의도를 감안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일상언어 분석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독한(獨韓)사전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는 개념들이다. 필자는 10년을 독일에 살면서 일상어의 심층문법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생활 세계적 의미를 잘 파악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미 번역돼 있는 4종의 『존재와 시간』 번역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이 일본어를 통해 중역을 한 것들이었다. 나는 아예 일본어를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존재와 시간』 번역에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는 『존재와 시간』의 핵심개념인 Vorhandensein, Vorhandenheit를 “안전존재”, “안전성”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눈앞의 존재”, “눈앞에 있음”이라 옮겼다.] Zunandenes, Zuhandenheit를 “용재자”, “용재성”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손안의 것”, “손안에 있음”이라 옮겼다.] 이 단어들은 한자표기 없이는 무슨 말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낱말들이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상 독일어로 철학개념을 삼은 것인데, 그것을 일본어 번역어를 그냥 베껴 쓰니까 뜻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계인 개념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교수는 zu-sein을 “지향 존재”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거기서의 “zu”는 동사의 부정형을 표기하는 독일어인데 그것을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본 것이다. 그야말로 어이없기 그지없는 오역이다. 어찌나 고집 세게 우겨대는지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일본교수가 그렇게 해석했다고 나중에 자백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는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 존재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zu-sein”이라 쓴 것인데 그것을 전치사로 보다니!!

 

우리말 일상언어로 살려내기 어려운 하이데거 용어들

독일어만 읽어서는 하이데거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어 번역을 보며 그대로 따라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귀국했을 때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번역 상황은 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일본어에 길들은 나이 많은 교수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도 되지 않는 번역을 그저 우겨댔다. 이야기와 토론이 되지를 않았다. 특정대학의 교수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번역어만을 사용할 것을 암암리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의 주요개념의 번역어가 통일이 되지 않고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하이데거 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내 번역서와 해설서들을 읽으면서 내 번역용어에 힘을 실어주는 덕분에 내 번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겪은 나이기에 『존재와 시간』의 용어들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데거 극장』의 저자 고명섭은 나름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번역어들을 택해서 1권 2부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어 그런 그의 관점을 나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용어의 통일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중개인 역할을 떠맡은 것 같아 고맙기까지 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하이데거 철학과 관련된 논문을 42편 발표했다. 수없이 많은 학술대회에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했고 수많은 대담을 했고 수많은 칼럼들과 서평들을 썼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을 비롯해 내가 하이데거 철학 원전을 번역해서 출간하고 하이데거 철학을 연구하고 소개하기 위해 발간한 책도 22권이다. 내 연구 인생을 오롯이 하이데거 철학 연구와 전파를 위해 보낸 셈이다. 거기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명섭 저자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 “존재” 물음을 제기하며 해결의 길을 찾아나가는 『존재와 시간』의 실존론적 분석을 잘 따라가면서 중요한 실존 계기들과 실존 범주들을 쉽게 풀이하며 해설해내고 있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의 문제가 『존재와 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이데거가 일생 여러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도전하며 풀어나가는 핵심문제인 것을 감안해서 그런 존재 사유의 길을 계속 추적하며 연결지어 설명해내고 있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망각과 무(無)제거의 역사로 보는 후기 사유의 실마리를 찾아내서 뒤좇는다. 

이러한 존재물음은 허무주의의 도래와 그 극복을 위한 시도와 연결되며 니체 철학의 분석을 걸쳐 시인 횔덜린을 통한 구원일 길 찾기로 이어진다. 그것은 하이데거 자신의 국가사회주의(나치)의 개입과 그 실망의 시련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그것은 테크네(기술) 주도로 펼쳐지는 존재사건의 역운적 전개와 무관치 않다고 보는 시각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기술과 전향』의 시도가 개진된다.

하이데거는 그의 삶 후반부에 시인 횔덜린과의 사유의 대화를 통해 망각해서 잃어버린 신적인 차원을 되찾아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호소 속에 새로운 『세계 사방』이라는 사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 제일 원인이며 창조주이고 절대정신인 이성중심의 “계산하는 사유”에 있었음을 통찰하고, “존재”와 “시간”을 내주는 존재 역운적 “존재생기의 사건”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런 존재사건 속에서 눈짓으로 알려오는 존재의 뜻을 알아보는 “뜻새김의 사유”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하늘과 땅, 죽을 자와 신적인 것들이 펼치는 “사방 세계”의 거울놀이 속의 “세계하다”와 “사물하다”를 읽어낼 수 있을 때 죽을 자로서 “인간하다”의 몫이 무엇일지를 깨닫게 된다. 이런 새로운 사유의 지평 속에서 “존재”와 “진리”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내야 한다. 

이렇게 “존재의 비밀”을 파헤치며 “진리의 심연”을 넘나드는 『하이데거 극장』의 이야기는 이어져 나간다. 자칫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 쉬운 철학의 주제들이 주변에 등장하는 후설, 야스퍼스, 한나 아렌트 등으로 인해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시대적인 상황을 함께 추체험하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된다. 다 기막힌 저자 고명섭의 연출 덕분이다. 재미 속에 중요 철학개념들을 익히면서 돗단배를 타고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만나게 된다.

 

 

이기상
한국외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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