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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강조가 '史實' 해석 왜곡한다"
'현재'의 강조가 '史實' 해석 왜곡한다"
  • 김당택 전남대
  • 승인 2006.06.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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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교수의 '의문'에 답한다(전국역사학대회, 5월 29일)

최근 김기봉 교수는 이기백 사학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이기백에 의해) 두계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병도의 실증사학 흐름이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고 자리매김했으며, 이기백을 ‘한국 역사학의 랑케’라고 지칭했다(김기봉,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되어 있다”-한국 역사학의 랑케, 이기백). 이는 15권에 달하는 이기백한국사학논집에 실린 글들을 분석한 결과인데, 서양의 역사이론을 전공하는 학자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김 교수의 학문적 열정과 넓이에 압도된 가운데, 이기백 사학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기백이 왜 그토록 ‘역사적 진실’을 강조했으며 그가 말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피력할 필요를 느낀다. 김 교수가 제기한 ‘이기백이 생각한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되고, 나아가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이기백 사학을 이해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기백은 ‘역사적 진실’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역사의 기록 자체가 어차피 주관적인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이기백이 왜 그처럼 ‘역사적 진실’을 강조했으며 그가 말한 ‘역사적 진실’이란 무엇일까. 고조선의 국가 형성이나 민란에 대한 한국 사학자들의 해석은 이와 관련하여 참조된다.

한국사에 있어서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형성되었으며, 그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초기 국가들의 경우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기백이 말한 ‘역사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형성시기를 청동기시대 이전으로 끌어올리고, 고조선이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제국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단군신화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인물들까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족의 우수성을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사의 민란을 다룬 연구 가운데는, 1980년대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민중의 항쟁을 부추기려는 의도 아래, 민중항쟁의 성과를 지나치게 과장한 경우가 있었다. 이처럼 민족, 혹은 민중이라는 현재적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해석을 낳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 이기백의 주장이다.

역사학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해석에 있어서 현재적 관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기백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역사학이 단순히 사실을 밝히는데 그친다면 이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단순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왜 그랬으며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였다. 그가 자유의 확대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사를 시대구분한 것은 그 결과였다.

이기백은 일제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일찍이 1961년에 출판된 『국사신론』에서 민중의 생활을 하나의 소제목으로 설정했는데, 이후 1967년의 『한국사신론』에서도 그러한 체제를 유지했다. 오늘날의 한국사 개설서들 대부분이 민중의 생활을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지 않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특이하다.

 

따라서 그는 민족과 민중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기백이었지만, 민족이나 민중, 혹은 자유나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역사학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현재의 필요에 의해, 신라시대에 자유나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으며 민중의 역량이 향상되었다고 한다면, 역사학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역사적 진실’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기백은 그의 自撰 墓碑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적었다. 그는 또한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하면서 학문을 하는 목적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진리’란 무엇인가.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 역사학이고, 하나의 사실이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역사학인데,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다는 말인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자처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역사적 죄악을 저지르고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민족이 자신들만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면, 결국 죄악을 저지르고 패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기백은 이것이 역사적 ‘진리’이며, 이러한 역사적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라고 여겼다.

 

이러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파멸을 막을 원동력이 됨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는 민족을 강조해야 하는 현재의 필요성 때문에 종종 묻혀버리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이기백이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고 한 것은 이를 경계한 것이었다. 

이기백은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하였다. 외국의 침략을 비판하고 우리나라를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우리나라와 외국 침략주의자와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침략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한국사의 연구를 통해 인류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말한 ‘진리’는 우리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이기백이 ‘역사적 진실’을 강조한 이유나 그가 말한 ‘진리’에 대한 필자의 이제까지의 서술에 잘못이 없다면, 그의 사학은 ‘21세기에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구에 임하는 역사학도가 도달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아울러, 이기백이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사학을 ‘이병도  실증사학의 최고 정점’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의 사학은 이병도의 실증사학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한국사의 체계화에 노력하여 최초로 독창적인 시대구분을 시도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랑케의 생각이나 주장했던 바를 이기백이 그대로 따라했다면 모르거니와, 그러하지 않았다면 이기백을 ‘한국 역사학의 랑케’라고 지칭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기백사학을 어떻게 명명하고, 자리매김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김당택/전남대·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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