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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독립 노동자’도 사회보장 울타리 안으로
‘가정주부·독립 노동자’도 사회보장 울타리 안으로
  • 김재호
  • 승인 2023.01.1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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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리지 보고서’ 주요 내용

“모든 가정주부는 결혼 보조금, 출산 보조금, 과부수당과 별거수당, 퇴직연금을 받는다. 전업주부의 경우, 남편의 실업이나 장애 기간 동안 급여 혜택을 받는다.”
“독립 노동자로서 근무하는 기간 동안에 소득이 없다 하더라도 노화로 인해 소득이 중단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생계 소득에 대한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

1942년 12월, 국민최저선, 보편주의 원칙, 완전고용, 사회보장 계획을 강조한 『베버리지 보고서』(원제는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 이하 보고서)가 출간됐다. 5대 거악으로 궁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를 지적했다. 

보고서를 쓴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는 런던정경대학(LSE) 총장, 옥스퍼드대 유니버시티칼리지 학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산재보험 및 기타 기존의 국가보험과 그 관련 서비스의 상호관계를 비롯한 실태를 조사하고 필요한 권고를 제시할 것’을 임무로 하는 위원회의 장으로서 보고서를 집필했다. 위원회의 첫 임무는 사회보험과 관련된 서비스의 전 분야를 대상으로 포괄적인 조사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당시 어떤 조항들이 있고,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지 분석했다. 

공동 번역에 참가한 김윤태 고려대 교수(공공정책대학)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베버리지는 급속한 산업화 시기 영국의 가장 큰 사회문제인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역사적 과제와 씨름한 실천가였다”라며 “보고서는 전쟁 중 영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와 인류의 궁극적 이상에 대한 웅대한 포부를 밝히고 있다”라고 평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보고서는 단지 사회보험 개혁을 위한 정부 권고안을 뛰어넘어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과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제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회학적 통찰력을 담고 있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회보험·가족 관점에서 이중의 소득재분배

보고서에서 핵심은 ‘궁핍’의 타파이다. 그래서 궁핍을 측정해야 하는데, 소득의 능력이 중단되거나 상실로 인해 소득이 4분의 3에서 6분의 5까지 줄어들었다. 남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궁핍의 해소를 위해서는 사회보험과 가족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이중의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밝혔다. 특히 필요한 건 아동수당이다. 만약 소득이 중단됐을 때만 아동수당이 제공된다면, 극심한 궁핍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아동수당은 16세까지, 또한 아동의 상시 정규 교육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회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사회보장부터 정의한다. “실업, 상병이나 사고로 수입이 중단될 때 수입을 대체하고 고령으로 인한 은퇴와 양육자의 사망으로 인한 부양 상실에 대비하며 출생, 사망, 결혼과 같은 이례적인 지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장하는 것.” 당연히 사회보장의 주요한 목적은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은 무한정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재빨리 소득이 없는 상황을 끝낼 수 있도록 고용훈련급여 등의 조치를 함께 적용해야 한다. 

‘사회보장을 위한 계획’의 주요 특징은 사회보장의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소득 능력이 중단·상실되는 경우 혹은 혼인이나 사망으로 발생하는 특수한 경우에 말이다. 사회보장의 체계는 여섯 가지 기본 원칙을 갖는다. △정액 최저생계 급여 △정액 기여 △행정 책임의 일원화 △급여의 적절성 △포괄성 △계층 분류.    

정액의 최저생계 급여를 제공하는 건 소득의 양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실업이든, 장애든, 퇴직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다만, 산업재해로 발생된 장기적인 장애는 예외다. “모든 피보험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동일한 보장을 위해 동일한 액수의 기여금을 납부한다.” 각각의 피보험자나 그의 고용주는 자산과 무관하게 정액의 강제 기여금을 부과해야 한다.  

 

『베버리지 보고서』의 원서 표지와 국내 발췌·번역본이다. 사진=영국 의회

 

최저생계에 필요한 최저소득의 보장

“사회보험은 최저생계에 필요한 최저소득의 보장을 목표로 해야 한다.” 재원은 보험 수급자의 기여금으로부터 마련된다. 기여금은 사회보험기금을 조성한다. 만약 사회보험기금이 부족하면, 수급자들은 더욱 많은 기여금의 납부를 요구받을 수도 있다. 여기서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 유념해야 할 지점이 있다. 피보험자인 개인은 어떠한 원인으로 소득이 중단되더라도, 즉 실업의 상황에서 실업수당이 무한정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 반면, 국가는 실업수당을 통해서 실업·질병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가 직접 지출과 조직화의 역할을 하는 이유는 노동을 비롯한 국가의 여타 생산자원의 고용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하고 퇴치하기 위해서지, 불완전한 보험 체계에 미봉책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받는 급여액과 납부해야 하는 기여금이 얼마여야 하는지는 바로 확정하기 어렵다. 전후 물가 수준을 현시점에서 분명히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가 있어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저생계와 관련된 추정 금액들은 시간이 흐르면 달라진다. 사회가 발전하면 그 수치는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분명한 건 임대료 문제에 대한 고려, 의료 서비스 구축, 적합한 과부(寡婦)연금 지급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정주부를 직업 종사자 계층으로 인정

보고서가 제안하는 주요 변화 중 눈여겨 볼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보험 보험료의 일원화이다. “각 피보험자는 하나의 단일한 보험 서류에 따라 주당 보험 기여금을 납부하며 이를 기초로 모든 급여를 수급할 수 있다.” 둘째, 행정의 일원화이다. “사회보험과 사회부조의 관리를 사회보장부로 일원화하며, 사회보장부 산하에는 모든 피보험자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역 사회보장사무소를 둔다.” 셋째, 생계 수단을 상실한 이들을 위한 고용훈련급여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가정주부와 독립 노동자들에 대한 제안은 현재 시점에서도 의미가 상당하다. 보고서는 “가정주부를 하나의 독립적인 보험 계층으로 분리”한다. 가정주부는 본인의 특수한 욕구에 부합하는 급여를 수령할 수 있도록 직업 종사자 계층으로 인정돼야 한다. “모든 가정주부는 결혼 보조금, 출산 보조금, 과부수당과 별거수당, 퇴직연금을 받는다. 전업주부의 경우, 남편의 실업이나 장애 기간 동안 급여 혜택을 받는다.”
부부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아내는 노동자 남편(피보험자)에게 의존하는 ‘성년 부양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내와 남편 둘 다 공동체의 핵심 일원이다. “남편의 기여는 그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위해 이뤄진 것으로 다뤄지며, 그 공동체를 위해 급여가 제공되는 것이다.” 보고서는 “특별 계층으로서 주부에게 필요한 모든 다양한 급여를 위한 비용은 일부 남편의 기여로, 일부는 남편과 아내의 혼인 전후의 기여로 이루어진다”라며 “필요한 급여의 성격은 혼인의 경제적,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고려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강조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쟁점이 되는 독립노동자에 대한 내용은 가히 선구적이다. 고용계약으로 일하는 노동자보다 소규모 상점 주인, 곡예사, 어부, 노점상, 외지 노동자는 더욱 가난하다. 특히 건강이 나빠지면 일당이 사라진다. 그래서 보고서는 “독립 노동자로서 근무하는 기간 동안에 소득이 없다 하더라도 노화로 인해 소득이 중단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생계 소득에 대한 확실성이 있어야 한다”라며 “근로 기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본인의 기여금 또는 그를 대신하는 기여금을 통해 생계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국민최저선 이상을 스스로 쟁취

보고서는 ‘분배’를 강조한다. “궁핍의 해소는 생산물에 대한 분배의 개선을 이해하지 않은 채 단지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분배가 토지, 자본, 경영, 노동 사이의 분배를 뜻하지 않는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소득이 있을 때 혹은 없을 때, 가족에 대한 책임이 큰 경우와 적은 경우의 각 상황에 맞게 구매력 분배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더 나은 분배가 복지에 보탬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며, 적절한 설계가 이루어지면 균형 잡힌 성장을 유지하면서 부를 증대시킬 수 있다.” 부가 적절히 재분배될 수 있도록 설계·관리하면서 재원 조달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모든 시민은 의욕을 높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무런 대가나 고생 없이 사회보장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보장 계획은 근로와 기여금의 조건을 충족한 시민에게만 제공된다. 근로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최저생계를 위한 소득을 보전해주는 것이다. “사회보장 계획은 사색과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개인들은 국민최저선 이상의 것을 스스로 쟁취하고, 단순한 물질적 욕구를 넘어 더 높은 이상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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