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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교수가 될 수 있습니까? 
배워서 교수가 될 수 있습니까? 
  • 정두호
  • 승인 2023.01.02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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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정두호 동국대 철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수료

“누구나 배워서 성인이 될 수 있다.” 북송시기 유학자 주돈이의 이 간결한 한마디는 성인을 하늘이 내려준 타고난 존재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바꾸었고, 이것은 성리학의 시작이자 정신이 되었다. 같은 책을 읽었으나 주돈이는 성인을, 나는 1년에 논문을 최소 몇 편을 써야 뒤처지지 않는지, 이 학술지의 IF 지수는 몇 점인지를 고민한다. 교수의 안정적인 월급과 정년 보장이 있어야 계속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즉, 호학(好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자 한 것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흥미로웠고 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려 교수가 되지 않고서는 계속할 수 없다니, 새삼 얼마나 대단한 목표를 세웠는지 깨닫는다. 나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호학하기를 그치지 않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교수가 되어야 계속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나 배워서 교수가 될 수 있을까.

연구자의 생애주기는 매우 단순하다. 박사과정을 얼추 마칠 때쯤이면 강사로 활동하면서 논문을 쓰고, 연구소나 학교에서 연구원, 비정년트랙 교원으로 몇 년 연구실적을 쌓고, 그리고 교수가 된다. 이 과정을 단계별로 거치지 못하면 연구를 지속하기는 힘들다. 강사-비정년-정년트랙의 순환이 시작과 끝이 없는 듯이 돌고 돌아야만 그나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할 수 있었으나, 이제 이 과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좋지 않은 결말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위기라는 단어조차 한가하다. 학문후속세대는 후속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신진연구자는 진출할 곳이 없다.

구조가 붕괴하니 인문학 연구자의 소멸은 이미 시작되었다. 최근 학술대회에 참석해보면 나와 같은 철학 전공 30대 동료 연구자들을 만나기 힘들다. 한국연구자정보(KRI)에서는 분야별·연령별 연구자 수 통계를 제공하는데, 국내 대학에 속한 철학 전공자는 50대 882명, 40대 547명, 30대 249명이다. 10년 주기로 거의 절반씩 감소하고 있다. 일반 연령별 인구 통계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사회계열 분야에서도 나타나는 전반적인 추세이다.

한창 발표 중인 교육부와 기재부의 올해 고등교육 관련 정책과 예산을 보며 무례함을 느낀다. 학생인건비 기준을 15년 만에 올렸다며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체 예산 규모도, 과제 선정률도 그대로이다. 끊임없이 교육환경 악화와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겸·초빙 교원 활용 기준은 5분의 1에서 3분의 1까지 대폭 완화되었다. 강사들의 열악한 강사료를 보정하는 강사처우개선비도 전액 삭감되었다. 철저하게 학교의 입장만 반영된 정책이다.

이제 취약 학문에 대한 보호는 철폐해야 할 규제로, 기초·순수 학문은 혁신해야 할 구시대의 적폐로 간주된다. 본격적으로 고등교육은 경제의 원동력, 산업역군 양성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와 산업, 혁신과 무관한 그 외 기타는 불필요하다. 학교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자유만 허용될 뿐이다. 그러나 합의되지 않은 자유는 절반의 자유이며 그에 속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억압이다. 일방의 자유를 위한 유연화와 연성화는 가장 약하고 무른 부분을 두들겨 만들어내는 파괴의 과정이다.

한때 어떻게 해야 인문학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합계가 -가 아닌 +여야만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전을 읽으며, 자기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고민하며 이것이 얼마인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탐구할 뿐이다. 우리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무늬, 인간의 모양새를 공부함에 있어서 다른 사사로움은 필요치 않다. 구조는 이미 붕괴했으니 이제 새로 쌓아 올릴 때이다. 누구나 배워서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신화적 사유에서 벗어나, 왜 배우려면 꼭 교수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직업적 단계와 무관하게 그저 호학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그러하듯 쓸모를 증명해야만 하는 학문은 없다.

정두호 동국대 철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수료
동국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으로 정도전을 중심으로 유학과 불교 비교 연구를 준비 중이며, 유학과 불교 형이상학 연구에 관심이 많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동국대 부분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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