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7:10 (금)
우파·좌파, 양쪽에서 외면 당했던 민족지도자
우파·좌파, 양쪽에서 외면 당했던 민족지도자
  • 변은진
  • 승인 2023.01.06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㊷_몽양 여운형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사망 후 인민장을 지낸 8월 3일 장지인 우이동으로 향하는 운구차 행렬이다. 사진=몽양 여운형 사진자료집

미즈노 렌타로,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여운형,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1919년 11월 여운형이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와 나눈 대화이다. 미즈노와 악수하며 여운형은 “경성역에서 강우규 동지의 폭탄이 터졌을 때 얼마나 무서웠느냐?”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에 당황한 미즈노의 발언과 이를 맞받아친 여운형의 발언이다. 상대를 역습하는 대담한 언변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우리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나라 없던 시대’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건국준비운동을 전개했고, 8.15 직후 권력 공백기의 혼란 상황을 지혜롭게 이끌었으며, 분단의 위험성을 가장 빨리 감지하고 통일운동에 힘썼던 인물이다.

그의 존재를 빼고 우리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주인공 없는 드라마’를 보는 모양새일 것이다.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에게는 흔히 ‘독립운동가, 민족지도자’ 등의 타이틀을 부여한다. 물론 여운형도 여기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울리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정치지도자’라는 타이틀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에게 ‘정치, 정치가, 정치적’, 이런 단어들은 그리 고운 뉘앙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참 정치가’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부여하고 싶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리더십이다. 여운형에게서 확인되는 참 정치가로서의 리더십, 이를 발휘하게 하는 남다른 덕목들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확인된다. 

첫째, 역사의 방향을 꿰뚫는 판단력과 실천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폭넓고도 정확하게 읽고 그 요구에 따라 실천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대표적으로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함으로써 3.1운동의 기폭제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이를 “정숙(표면상)하던 한토 삼천리에 장차 일대풍운이 일어날 징조”라고 평가했다.

또 8.15 직전에는 일제 패망과 조선 독립을 예견하고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독립·건국 준비운동을 전개했으며, 8.15 이후에는 분단의 위험을 예견하고 끝까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둘째, 적과 아를 넘나드는 외교의 달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사상과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었고, 이 점은 현실에서 탁월한 외교력으로 발휘됐다.

젊은 시절 그는 국내와 상하이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했고, 기독교 사상을 운운하면서 한국 최초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했다.

수시로 쑨원, 장제스, 마오쩌뚱을 만나고 러시아의 레닌, 트로츠키까지 만났다. 심지어 일본 수상이나 군부대신, 총독이나 정무총감도 접촉했다.

8.15 이후에는 유창한 영어로 미군정청을 드나드는가 하면, 십여 차례나 38도선 이북의 김일성 등과도 접촉했다.

이러한 점은 그를 특정한 이념의 소유자, 즉 ‘××주의자’라고 단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늘 우파로부터는 공산주의자, 좌파로부터는 기회주의자라고 공격을 받았고, 여전히 어떤 이는 민족지도자라며 존경하고 어떤 이는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셋째, 늘 대중과 함께 한 신뢰의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15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5선의 상하이 교민단장을 지냈다.

1932년 출옥 후에는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조선체육회 이사 등을 지내며 강연과 결혼식 주례, 스포츠대회, 웅변대회 개최 등을 통해 청년대중과 접촉면을 넓혀갔다.

당시 세간에는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떡꺼떡,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늘 대중 곁에 있는 인물로 비쳤다.

이를 통해 그는 독립운동가를 넘어서 존경받는 대중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까지 쌓아갔다. 8.15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남쪽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 그 다음은 중국파 김구이고, 미국파 이승만은 세 번째다”라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47년 그가 테러로 사망했을 때 한국 최초로 인민장이 치러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이처럼 여운형은 대중의 신뢰에 기초한 통찰력 있는 리더십을 지닌 정치지도자였다. 그의 바람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해방, 인민에 기초한 하나된 민족‧민주국가 건설뿐이었다. 그리고 이 바람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변은진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교수

고려대에서 한국근현대사로 박사학위를 취득 후 고려대·영남대·가천대·방송대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허헌 평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인권변호사』(2022), 『일제말 항일비밀결사운동 연구』(2018),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여운형』(2018), 『자유와 평화를 꿈꾼 ‘한반도인’, 이소가야 스에지』(2018),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2013)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