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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글쓰기를 비판한다
지식인의 글쓰기를 비판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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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싸움닭 될 결심을 하며
박홍규 영남대/법학

조선일보 거부운동이 일었을 때 어느 교수가 “조선일보를 읽는 재미로 학교에 온다”고 내게 말했다. 물론 그 교수는 내가 그 운동에 가담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교수는 한겨레나 교수신문 ‘같은 것’은 안 읽는다고 말했다. 이런 ‘선호’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나는 그들의 야유에 침묵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어떤 신문이 ‘선동적’이어서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선호’차원을 넘어 ‘가치’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도 나는 침묵했다.

사회학 교수 전상인이 한겨레를 아무 근거도 없이 “남의 신문 욕하는 전문”, “불안한 정체성”, “대자보를 방불케하는 선동성”이라고 욕한 것은 문제이다. 도리어 그 교수야말로 “남을 욕하는 전문”이고 “불안한 정체성”에 “대자보를 방불케하는 선동”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문열은 소설가인 탓인지 최근의 방송을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선전선동”에 비유하지만, 그 자체가 대단한 선동이다.

전 철학교수 신일철은 동아일보를 ‘불사조’에 비유하며, 그 역사를 찬란하게 설명한 뒤, 정부에 대해 “정치적 흑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는 동아일보와 깊은 관계인 대학의 교수를 지냈는데 그 글이 ‘개인적 흑심’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의문이 있다.

소설가 조성기는, 말에는 “소리로서의 언어”와 “관계로서의 언어”가 있는데 후자가 잘못되면 전자가 아무리 번지르르 해도 소용없다며 언론탄압을 비판한다. 그러나 언론사와 지식인의 사적 관계로서의 언어에는 문제가 없는가. 물론 그들은 언론 ‘탄압’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리라.

족벌언론 앞에 선 지식인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욕지거리가, 중립이나 공정을 가장하면서 은근히 욕하는 고답적인 위선보다는 차라리 낫다. 사회학 교수 송호근은 언론사의 70%를 넘는 지배주주의 소유지분, 몇 신문의 74%를 넘는 시장점유율을 대폭 내려 규제하자는 정기간행물법 개정안을 “두 담론 세력의 정치적 이전투구”로 몰아세우며 꾸중을 한다. 족벌·재벌 신문의 폐해를 고치자는 것이 이전투구라니 할말이 없다.

그래도 그것은 구체적이기는 하다. 더욱 위선적인 것은 논쟁 시마다 언제나 감초처럼 등장하는 ‘중용론’ ‘생각하는 지식인론’이다. 모두 극단이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꾸중하는 것인데, 당연히 자신은 중용이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제에 선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실 명백한 편들기이다.

철학교수 이진우는 “자기 무덤 파는 양극화”를 비판한다면서 보수라고 하면 지식인 자격의 박탈임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진보는 이성을 결여한 증오심에서 공격적 언어로 선동적 글쓰기를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양극화’를 비판한다고 하나 사실은 진보를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비판하는 근거도 없다. 진보라고 하는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정기간행물법 개정 추진자들이 이성을 결여한 ‘증오심’에서 ‘공격적 언어’로 ‘선동적 글쓰기’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거부터 문제가 된 신문의 강제투입, 무가지와 경품살포의 금지, 그리고 지금의 세금 부과 이전의 세무조사를 언론자유의 탄압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에 대한 반대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이성, 증오, 공격, 선동인가.

“이제는 보수와 인연을 끊자”

나는 진보라고 불리지도 않지만, 교수 대부분과 모든 것이 너무나 다르다고 느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대화를 한답시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그것은 ‘선동’의 낙인으로 끝났다. 언론이 국민을 ‘선동’한다 하듯이 교수가 학생을 ‘선동’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왕따였다.

나는 김대중 정권과 한겨레에도 반발하여 진보로부터도 ‘왕따’ 당했다. 왜 정권은 국민에게 약속한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 신문은 왜 그것을 제대로 비판하지 않느냐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정권과 그것을 지지하는 한겨레와 극소수의 지식인을 전폭 지지한다.

이제는 싸워야 한다. 나는 싸움닭이 될 능력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언제나 다수에 의해 ‘선동’으로 낙인찍히는 대화에 나설 생각이 없다. 정권은 끝까지 언론개혁에 철저하라. 나처럼 조금이라도 진보에 가깝다고 느끼면 모두 나서라. 이제는 보수와 인연을 끊자.

이문열은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족벌·재벌·반공·보수의 언론을 선택할 수 없다. 그들이 ‘선동’이라는 말로 싸잡아 욕하는 우리의 ‘양심’을 지키자. 그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는 글쓰기의 기본도 모르고 함부로 내갈기는 말의 폭력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진우는 진보의 “공격적 글쓰기와 선동적 언어”가 청소년에게 부정적 냉소주의를 확산시킨다고 말하지만, 도리어 위에서 본 보수의 언어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 시대는 그런 시대였지만 후손을 위해서도 용납할 수 없다. 언론민주화는 역사적 개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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