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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철학으로 확대…유려하고 쉬운 문장 매력
치유의 철학으로 확대…유려하고 쉬운 문장 매력
  • 정동호 충북대
  • 승인 2006.06.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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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김정현 지음| 책세상| 441쪽| 2006

철학에는 흔히 치유적 사명이란 게 있다. 살아있는 철학이라면 마땅히 그 시대의 질환을 진단하고 그에 합당한 치유책을 내놔야 한다는 소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새로울 게 없지만, 그런 사명을 말할 때 떠오르는 이가 마르셀이다. 마르셀은 구체적 현실위에 추상의 정신이 난무해 능산적 사유가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에 따르면 추상의 정신이야 말로 인간정신을 파괴하는 독침이며, 그것에 쏘여 신음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가 구원의 해독제로 제시한 것은 명상과 관용이다. 마르셀은 나아가 기술발달의 세계를 파괴된 세계로 보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는데, 존재 우선의 사유와 삶이 그것이다. 

김정현의 저서에서 마르셀적 행로, 가령 우리시대가 앓고 있는 병고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그 치유를 위한 길의 탐색을 본다. 제목도 그렇지만 파괴와 건설, 비판과 찾기라는 세부 주제를 통해 그는 치유의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 이 사명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이해, 즉 글쓰기는 “진단과 검사, 처방과 치료라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 의료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사회와 시대의 문제를 점검하고 논의하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행위”라는 규정에서 재차 확인된다. 이는 니체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과 깊이 있는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저자의 안목과 집요함을 확인케 한다. 

국내 니체철학 수용의 역사는 1백년에 이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니체가 강의, 연구된 것은 해방 후다. 또 학회가 구성된 것은 1989년 이후이다. 니체의 철학을 연구해온 국내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읽고 해석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심도 있는 니체 이해와 함께 우리 상황에 대한 자각에서 니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게 됐고, 그만큼 연구방향도 다변화 됐다.

이런 흐름을 선도하는 이 중 한 명이 김정현이다. 저자도 니체를 숙주로 삼되 뜻은 새로운 미래 철학적 사유 문법인 생명을 찾아가는 데 있다고 밝힌다. 니체 사상을 단서로 하되, 시선을 그 너머에 두고 있다는 얘기로, 거기엔 니체에 대한 독자적 시선의 확보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니체 개설서가 아니다. 이 책엔 영원회귀라든가 힘에의 의지, 가치의 전도 등에 대한 논의가 따로 없다. 이들은 허무주의, 위버멘쉬와 함께 하이데거가 니체철학의 다섯 핵심 주제에 포함시켰던 것들이고, 이후 니체 연구서의 기준이 돼온 것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편제가 니체 철학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는 만족할만한 것이 되지 못하나, 보다 전문화된 연구서로서 역할한다. 즉 저자는 교과서적 니체 해석의 틀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저자가 10년 동안 발표해왔던 것들이다. 그래서 “중복과 변주”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글의 모음은 지적 편력과정에 있는 저자의 관심 전개와 시각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또 전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한정된 시각에서 쓰인 글들이어서 흩어져 있지 않은 데다 깊이가 있다.

구성은 총 5부로 돼있다. 각 부의 제목만 봐도 전체적 조망이 가능한데, 형이상학 담론 및 합리주의비판과 몸이성 찾기, 근대성 비판과 역사적 치료제 찾기, 종교비판과 자기 찾기, 진리 비판과 생명 찾기로서 “찾기”로 일관돼있다. 선택적이지만 이렇듯 주제가 다양해 그 만큼 독자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이 찾기 일환으로 천착된 니체와 불교, 니체와 심층심리학 관계, 니체와 페미니즘, 니체의 건강 철학은 저자가 몇해 전부터 관심을 갖고 추적해온 것들이다. 그동안 우리 학계에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것들로서 후속 연구와 학제간의 교류가 기대되는 분야들이기도 하다.

눈에 띄는 것은 뛰어난 어휘 선택이다. “역사적 비만증후”가 한 예다. 독일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자주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는데, 저자는 곳곳에서 우리말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일깨우고 있다. 문헌 역시 고전적인 것에서 최신의 것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것을 망라하고 있어 일반인이나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글도 유려하고 쉬워 읽기에 큰 부담이 없다. 철학책은 어려워야 한다는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가볍게 느껴지겠지만, 그런 믿음은 허세이고, 오히려 명쾌한 내용에 쉬운 글 솜씨야 말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덕목이 아닐까.   

 
곳곳에 고심을 한 흔적도 있다.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개념의 번역에서도 그렇다. 그 고심이 사상적인 것이라면 독자가 나서서 뭐라 할 수 없다. 다만 소통 언어인 개념의 번역 문제라면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서양철학을 우리말로 소개할 때 부딪치게 되는 것이 개념의 번역이다. 이것은 저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저자가 어휘 선택에 공들였다고 했는데, 원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없는 개념을 옮기는 부분에서 상당한 곤란을 격은 듯 하다. 조작적인 느낌을 주는 번역 어휘가 몇 개 있어 그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그런 것 가운데 “몸성(Leiblichkeit)”, “몸이성(Leibvernunft)”이 있다. 물론 원어인 독일어를 아는 독자라면 그 뜻을 미루어 헤아려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특히 몸성이 그렇다. 몸은 우리말이고 性은 한자어다. 그 조합이 부자연스럽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저자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의 하나인 ?bermensch를 ‘극복인’으로 옮겼다. 그동안 일본의 전통에 따라 ‘초인’으로 번역해온 개념이다. 이 땅에서 구현될 현실적 이상인 위버멘쉬를 초인으로 옮길 때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여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 그동안 여러 차례 개진되돼왔고, 음역해 오해의 여지를 없애고 원의를 되살리자는 주장 또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돼왔다. 물론 위버멘쉬는 독일어이고, 음역할 경우 곧바로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최근에는 슈퍼맨으로 옮겨 무방하지 않나 하는 견해도 있다. 영역 초기에는 슈퍼맨이 유력했고, 아직 영역 개념으로는 overman과 함께 자주 쓰이고 있다. 이후 영어권에서도 위버멘쉬를 둘러싼 갖가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음역해 아예 ?bermensch로 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저자는 장고 끝에 의역을 해 위버멘쉬를 ‘극복인’으로 하기로 했다.

이는 해석상의 문제이고 역자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시시비비할 게 못된다. 초인으로 불러 무방한 경우도 있고, 슈퍼맨으로 옮겨 문제될 것 없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보면 위버멘쉬는 극복인이다. 따라서 극복인 또한 하나의 선택이다. 아무튼 저자가 새로운 역어를 찾아내 그것을 공론의 장에 내놓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생산적인 제안이다. 공개 논의를 통해 보다 좋은 우리말 개념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정현의 저서는 그 시각이나 내용에서 인상적인 연구서다. 저자에게는 중간 결산이란 의미가 있겠지만, 학계로서는 보다 향상된 단계의 진입을 위한 전주다.  

정동호 / 충북대·철학

필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의 역서와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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