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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과 정교함으로 일군 40년…감수성과 인식지도 확산
진지함과 정교함으로 일군 40년…감수성과 인식지도 확산
  • 우찬제 서강대
  • 승인 2006.06.0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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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창립 40주년 맞은 민음사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고,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이며,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 보르헤스는 ‘책’에서 그렇게 썼다. 언제 읽더라도 공감이 되는 소리다. 파피루스, 양피지, 죽간, 종이, 디지털, 그 어떤 매질을 이용하든 책은 인간의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을 위한 핵심적인 통로였다. 인간은 늘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감수성의 지도를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었다.


일찍이 헬레니즘이 인간을 언어 동물로 정의한 바 있거니와,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그 이전부터 언어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존재의 위엄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창조적 노력의 소산이었다. ‘논어’에서도 시를 읽지 않으면 말할 게 없다고 했다. 인문학이 교양 형성의 기본적인 토대로 중시되었던 사정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 것 없이 비슷했다. 19세기 낭만시인 키츠는 문학을 일러 인간 ‘영혼 형성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인문학 분야의 책은 그야말로 진정한 인간 영혼의 형성을 위한 깊은 골짜기가 아닐 것인가. 그 골짜기에서 인간은 내면적인 자기완성과 타자와의 교유를 통해 바람직한 시민적 덕성을 갖출 수 있었다. 또 얼굴 없는 존재의 익명성의 늪에서 벗어나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책은 아주 중요한 정신의 환기 장치 구실을 해 왔다.


지난 5월 19일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민음사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영혼 형성의 골짜기였다. 그 골짜기는 울울한 문학의 숲이며, 지성의 오솔길로 넉넉했다. 인문학의 향연으로 충일한 정자들로 흥성한 골짜기였다.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오늘의 작가 총서’ 등을 통해 본격적이고 품격 높은 문학 단행본 출판 시대를 열었고, ‘이데아 총서’와 ‘대우학술총서’ 등으로 인문서 및 학술 출판의 반석을 놓았다. 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지성의 의미 있는 산실이 되었으며, ‘오늘의 작가상’을 운영하면서 한수산·박영한·이문열·최승호·조성기·강석경·장정일·이혜경 등 작가와 시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한국문학의 상징적 자산을 높였다. 그런가 하면, 문학 단행본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비룡소라는 브랜드로 전집류 위주이던 아동 출판계에 뛰어들어 아동물 단행본 시대를 개척했다. 이밖에 사이언스북스, 황금가지 등 6개의 브랜드로 확장하여 한국의 출판 지도를 부단히 새롭게 제작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민음 인문 아카데미’ 40년

  무엇보다도 민음사는 문학 출판으로 빛난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김춘수의 ‘처용’, 천상병의 ‘주막에서’, 고은의 ‘부활’,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 오규원의 ‘사랑의 기교’, 최승호의 ‘대설주의보’,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등 그 목록만으로도 이미 한국의 현대시사가 되는 ‘오늘의 시인 총서’는 자비 출판이 주류이던 시대를 넘어서 본격적인 시집 출판 시대를 열었다는 시집 출판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1970년대와 8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당시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시집들은 심미적 교양을 입증하는 일종의 보증수표 같은 것이었다.


  ‘오늘의 작가 총서’ 역시 비슷하다. 최인훈의 ‘웃음소리’, 이청준의 ‘매잡이’, 이문구의 ‘우리 동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윤흥길의 ‘장마’, 한수산의 ‘부초’,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등 이 총서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감각과 방향을 알게 해주는 예민한 풍향계였고 상상력의 보물창고였다. 특히 민음사의 문학 출판은 문지/창비라는 문단의 양대 구도에서 균형감각을 가지고 한국문학의 중심을 잡아 나가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이런 양상은 발행인인 박맹호 사장의 미학적 균형 감각과 더불어 계간지 ‘세계의 문학’ 책임편집위원이었던 평론가 김우창, 유종호 선생의 문학적 위의와 인문적 지성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편에서 오늘의 작가와 시인들을 예각적으로 발굴하여 의미화하고 문학의 소통 효과를 제고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문학사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공을 기울였다. ‘정지용전집’, ‘미당서정주전집’, ‘김춘수시전집’, ‘박목월시전집’, ‘김수영전집’, ‘염상섭전집’, ‘김동리전집’, ‘김우창전집’, ‘유종호전집’ 등이 그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전집들은 한국문학 연구의 중요한 텍스트가 되고 있다. 외국문학 번역, 출판도 남달랐다. 보르헤스, 헤르만 헤세, 장 그르니에, 괴테, 보들레르, 이탈로 칼비노, 릴케 전집 등은 물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여러 번역서들은 외부의 세계문학이 한국문학 내부로 거듭나는 신비체험을 가능케 했다. 이쪽의 기획 안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간행으로 굵직한 결실을 맺게 된다.


  문학 출판에서의 이런 경향은 인문학을 포함한 각종 학술 문화 출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미셸 세르의 ‘헤르메스’ 등으로 대표되는 ‘이데아 총서’는 한국 지식사회학의 살아있는 증인이랄 수 있으며, 막대한 예산이 투자된 ‘대우학술총서’는 한국의 학술문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책들이다. 또 ‘인문사회과학총서’, ‘현대사상의 모험’, ‘뉴미디어 총서’, ‘정신분석학 총서’, ‘들뢰즈의 창’,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 ‘일본의 현대지성’ 등 다양한 총서들과 각종 문학이론과 비평집들을 민음사는 출간했다. 이와 같은 민음사의 인문 학술 서적들은 1970년대 이후 숨가쁘게 전개된 한국 지식사회의 관심 이동의 풍경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아니, 차라리, 세계와 사회 문화의 변화 조짐을 앞질러 예감하고 그리로 향한 담론을 미리 제출함으로써, 지식사회와 현실 문화를 바꾸어온 역사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마르크시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기호학, 페미니즘, 문화 연구, 정신분석학,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담론의 공간들이 민음사를 통해 인문적 지성의 회통 효과를 산출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민음사 40년은 인문 아카데미 40년과 거의 등가라고 해도 좋겠다.

콘텐츠 비즈니스 허브를 기대하며

  출판 자산의 재배치 효과라는 측면에서 한 가지만 언급하자. 내가 알기로 민음사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베스트셀러를 통해 축적한 자산을 채산성이 떨어지는 인문 학술서 분야에 투자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3천5백여 종의 다채로운 형태의 출판물들이 민음사와 그 브랜드 이름을 걸고 출판될 수 있었다. 그 많은 출판 자산들은 21세기 콘텐츠 비즈니스 시대에 중요한 원천 콘텐츠를 제공하는 허브로서의 역할을 다양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출판종수가 다양화되고 많아짐에 따라 출판된 책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든지(창고나 시장 상황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아까운 많은 문학, 인문 서적들이 절판 상태다. 디지털 시대의 신매체를 통해 새로운 소통회로를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계문학전집을 간행하기 시작하면서 혹은 문학위기론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한국문학 출판에 예전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등의 민음사에 대한 고언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맹호 대표가 늘 강조하는 것처럼 “책에 대한 진지함, 시장을 보는 눈의 정교함, 기획자의 정신적 부피” 등과 문단과 학계 사이의 역동적 대화로 이룬 민음사 40년의 공적은 고평되어 마땅하다.


  40년을 맞은 민음사가 소망하는 대로 문화 콘텐츠 시대의 중요한 허브 역할을 명실상부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더욱 ‘부자 출판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문학과 문화, 학술적 담론도 더불어 부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수입과 이식 문화를 넘어서 통합적이고 자생적으로 생산되고 창조된 우리 문학/문화와 학술 담론이 밖으로도 역동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세계 지도를 구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찬제/서강대· 문학비평

필자는 서강대에서 ‘현대 장편소설의 욕망시학적 연구: 주체의 성격에 따른 욕망현시 유형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고독한 공생’, ‘텍스트의 수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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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러블 2006-06-08 12:48:51
세계문학전집의 경우 조금 긴 소설은 두 권으로 분책하여 나온다. 글자간격과 행간격이 좀 널널하다. 오늘의 작가총서, 세계문학전집은 표지 디자인은 예쁘지만 편집은 서투르다고 생각한다. 편집의 관점에서 보면 이데아총서가 가장 잘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