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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출판사를 찾아서 (2) 一潮閣
학술출판사를 찾아서 (2) 一潮閣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6.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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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물게 만들어 당당히 판다”… 사람이 곧 底力

▲한만년 대표의 부고를 알리는 신문기사 
2004년은 우리 학계와 문화계의 어른들이 유난히 많이 돌아가신 해다. 故 이기백 교수와 故 고병익 교수, 일조각의 故 한만년 대표도 약속이나 한 듯 이 해에 서로를 앞세우거나 뒤세웠다. 1967년 ‘한국사신론’을 펴낸 것을 인연으로 근 40년을 서로 의지해온 이기백 교수와 한만년 대표의 각별한 우정 때문에 이 일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살아 생전 ‘一業一生’이라는 칼럼집을 직접 묶어낸 한만년 대표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종이에 먹칠하는 사업”으로 평생을 일관한 강직한 출판인이었다. “야무지게 만들어서 당당하게 팔라”고 누누이 강조한 그는 1973년에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정부의 우량도서 지원사업을 오히려 비판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마치 미스코리아의 선발에 응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며 “도서는 정가가 붙은 상품이며 그 내용과 권위는 항상 정직한 독자가 돈을 내면서 인정해 준다”라고 강조했다. 이런 창업자의 출판정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인터넷서점에서 정가를 그대로 받는 출판사는 국내에서 일조각이 유일하다.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크고 작게 할인해서 팔지만, 일조각은 정가를 고수하고 있다.

출판은 산업이 아니다 … 편집저력 갖춰

1954년 창립해 올해 53주년을 맞은 일조각은 이기백 교수의 저작들을 비롯해,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의 ‘독립협회연구’, 양주동의 ‘고가연구’ 등 역사학과 인문학 분야의 유수한 저서들을 비롯 지금까지 1천여권의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학술지인 ‘어문연구’,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을 발행했고, 지금은 ‘한국사시민강좌’를 발행하고 있다.

창업자가 50년을 끌고 왔기에 한만년이 곧 일조각이었던 만큼 그의 타계 이후 누가 일조각을 이끌고 있으며, 앞으로의 경영방침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에 관해 알만한 사람들은 궁금증이 도지고 있는 참이다. 알려진 것이지만 한 대표의 4남1녀는 모두 교수다. 자식농사도 학술적으로 지은 셈인데, 현재 일조각은 둘째 며느리인 김시연 씨가 대표를 맡아 이끌고 있다. 남편은 한경구 국민대 교수이다.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는 한경구 교수의 동생이다.

▲김시연 일조각 대표 

일조각은 신문로2가 큰 길에서 구세군회관을 끼고 성곡미술관을 향해 거의 다 올라왔을 때 좌측에 위치한다. 그 맞은편에는 일지사와 범한서적이 위치해 있다. 원래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주택가이지만, 나이 많은 출판사들이 모여 있어 조용한 가운데 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일지사와 일조각은 공평동 시절에도 한 블록 건너에 있었는데, 신문로시대도 우연히 같은 곳에서 출발하게 됐다.

“이제 만 4년이 지나서 5년차다. 남편이 지독한 장서가인지라 책값이 아까워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덕분인지 모르겠다. 자회사 ‘이크’에서 몇권 만들어보고 일조각 대표로 옮겼다.”

이 대표는 겸손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직 편집실무에 깊이 관여할 단계는 아니고 “인사관리 같은 경영 부분만 맡아서” 하고 있다. 그래도 들어오는 원고는 꼬박꼬박 읽는다. 원고는 풍족하다. 편집장이 원고에 눌려서 살고 있다는 얘기로 미뤄봐 일조각의 명성은 여전한 듯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한만년 체제와의 연속성이었다. 이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출판은 산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니 운영은 가능하게끔 수익이 나야한다”라고 덧붙인다. 야무지게 만들고 당당하게 팔라는 시아버지 말을 나름으로 번역한 듯했다.

현재 일조각 직원은 19명이다. 50년의 역사에 비하면 지나친 소규모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소수정예가 단단하게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많은 직원들이 바뀌긴 했지만, 입사한 지 10년이 넘는 여러 명의 장기근속 직원들이 허리를 받치고 있다는 게 이 출판사의 가장 큰 저력. 일조각은 모든 기획, 편집, 디자인 실무를 내부에서 해결한다.

요즘 대형출판사일수록 외주를 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內紙 조판의 전문성이 떨어지고 誤字가 속출하는 현실과 대비된다. 박세경 편집장은 “1년에 20~30권 정도만 펴내는데, 좀 늘려서 계획잡은 올해도 30권대 초반을 넘어서진 못할 듯하다”고 말한다. 이 책들이 학술서이고 초판을 대개 1천~1천5백부를 찍는다고 하니, 1년차 책판매량으론 직원 월급도 못줄 형편이다. 물론 이것은 8백종의 움직이는 舊刊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지만 말이다.

일조각은 역사학, 국어국문학, 의학에서 확실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세 분야 모두 50년대부터 내왔기 때문에 원고 선별하는 실력과 편집의 노하우는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전자화된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젊은 학자들보다 더 전통적인 학문의 관습에 익숙할 정도다. 지난 2002년 일조각에서 정년퇴직한 최재유 前 전무는 49년간 일조각에서 봉직했다. 출판사에서 정년을 맞는 풍경은 일본에서야 흔하지만, 한국에선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10년만 근속하면 엥겔지수가 맞지 않아 다른 데로 옮기거나 출판사를 차려 독립하는 풍토에서는 앞으로도 보기 힘들어질 일이다.

▲일조각 편집부에 놓인 서재엔 지금껏 펴낸 책들의 일부가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요즘 많은 출판사들이 새로운 독자의 취향, 디자인의 유행에 따라 책의 겉표지를 휙 바꿔버리곤 하는데, 이는 그 시리즈나 총서의 오랜 독자에게 예의가 아닌 측면이 있다. 일조각도 시대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지만, 휩쓸리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원칙이 분명하기 때문에 변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도 일조각의 장점이다. 표지야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역사 관련 본격 학술서의 경우 “서점 직원이나 대학원생들이 제목을 못 읽는 일이 자주 생겨 한글로 바꾼 것” 빼고는 기존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35년만에 완간된 이기백 교수의 저작집 화제

가장 내세우고 싶은 力作이 무엇이냐는 愚問에는 “모든 책이 다 중요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래도 책 얘기를 하다보면 특히 기억에 남도록 고생스러웠던 책이나 자부심이 남다른 것이 있는데 옛날 책으로는 ‘定本 時調大典’(심재완 편저, 1985), 요즘 책으로는 ‘한국식물명의 유래’(2006)이다. ‘시조대전’은 당시로서는 총 3천3백35수의 시조에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원문을 싣고, 현철을 달고 그 밑에 출전을 달아 눈에 편안하게 들어오는 고도의 편집기술을 발휘한 역작이고, 한국식물분류학회장을 지낸 이우철 강원대 명예교수가 펴낸 ‘한국식물명의 유래’ 또한 5천종의 식물에 대해 異名과 俗名을 가려 굉장한 공을 들인 명감으로 자부한다.

김 대표는 일조각의 길이 여전히 연구자들의 연구서를 펴내는 것이라고 다짐놓는다. 예전에 비해 인류학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축적된 전문성을 응용해 학술과 대중의 중간단계의 난이도에서 많은 독자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다.

▲이번에 완간된 이기백한국사학논집의 모습 

최근에는 일조각 숙원의 사업이 결실을 보기도 했다. 번역서 ‘한국현대사론’(A.J. 그라즈단제브)을 끝으로 ‘이기백한국사학논집’을 완간하게 된 것. 1971년 ‘민족과 역사’를 시작으로 2대 35년에 걸쳐 총 15권으로 정리된 이 논집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정진해온 한 학자의 생의 전부가 녹아있으며, “학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지 않고 진리탐구를 위한 학문을 해야 한다”는 굳은 심지가 곧곧에 배어있다. 이 대표는 “이기백 선생은 20대 직원들에게까지 말을 놓으시는 법이 없었던 신사셨다”면서 “살아계실 때 자기 원고를 정리하고 돌아가신 몇 안되는 학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조각이 대를 이어 이런 대쪽같은 학술출판의 길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일조각과 인연을 맺은 저자들이나, 학자들을 배출한 한만년 대표의 집안과도 무관할 수는 없는 일. “출판사보다는 집안에서 운영”한다는 월봉저작상은 전년도에 출간된 한국학 관계 도서 가운데 가려뽑아 최종심사를 거쳐 5백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전통학술상으로 최종심에 오른 5권을 심사위원들이 1달 동안 검토해 다시 모여 토론을 해서 수상작을 가리는 꼼꼼하고 공정한 심사방식으로도 명성이 높다.

이 상은 독특한 전통으로도 유명한데, 2회 수상자인 신용하 교수를 시상할 때 딸깍발이 이희승 교수가 메달은 신용하 교수에게 걸어주고 상금은 “더욱 수고가 많은 부인에게 드린다”고 말해 그 이후 아예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 그래서 월봉저작상의 시상식에는 항상 부인이 자리하며, 수상자가 미혼인 경우에는 어머니께 드린다고 한다.

▲편집부 직원들이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신축한 사옥의 디자인이 멋져보인다 

요즘 학술출판이 어렵다고 하지만, 김 대표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은 없다. “10년이 걸릴 지 모르지만,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고 잘 만든 책은 절판시키지 않고 마지막 권까지 팔 수 있다”는 일조각 가족들의 오랜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이 윗선뿐만 아니라, 사무실 전체의 분위기로 무르익어 있는 공간에 머물다 온 경험은 매우 행복한 것이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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