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00:25 (수)
차고 넘치는 위기론 속에서 '대학원' 다시 보기
차고 넘치는 위기론 속에서 '대학원' 다시 보기
  • 이우창
  • 승인 2022.12.27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펴내며_ 이우창 순천향대 연구원
젊은 연구자 8인이 말하는 대학원의 현실

이 책은 인문사회분야 신진연구자가 마주하는 제도와 환경을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대학원과 학계의 생존을 위한 논의의 출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기를 마주보기 위해서는 위기론을 넘어서야 한다.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최초 기획에서부터 지금까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인문대 대학원에 처음 발을 디딘 뒤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의 10여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는 점차 인문사회과학의 위기, 대학원의 위기, 대학의 위기로 눈덩이처럼 커져왔다.

여기에는 기묘한 역설이 있다. 우리 인문사회 연구자들에게 위기론은 차고 넘치도록 풍족하지만, 위기가 정확히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하게 논의하는 언어는 현저히 빈곤하다는 대조적인 현실 말이다.

한쪽은 “얼마 남지 않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향해 전력질주하라”고 속삭이고, 다른 쪽은 “우린 다 망할 거야”라는 멸망의 비가(悲歌)를 합창한다. 방향만 다를 뿐,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는 자세가 없음은 마찬가지다. 그때 알았다. 위기론을 넘어서야 위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위기론 너머의 지점으로 가고자 하는 이는 우선 위기라는 거대하고 흐릿한 무언가를 포착 가능한 대상들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위기는 다음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물음들 및 그 답변들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들은 어떤 지식을 생산하고, 또 생산할 수 있는가? 인문사회과학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요소들, 대표적으로 연구자·대학원생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들의 재생산과정은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학문·지식·언어로서의 인문사회과학들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올 한 해 신진연구자들의 연구와 문제의식을 소개하던 <교수신문> ‘천하제일연구자대회’ 연속기고는 부분적으로나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올해 4월,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신진연구자에게 듣는다' 좌담 내용을 보완한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최근 출간됐다. 사진은 당시 좌담에 참석한 신진연구자들이다.  

신진연구자·대학원생 어려움 제대로 논의해야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속한 신진연구자·대학원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대학원 인권실태 조사보고서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놀랍게도 이 주제는 한국 학술장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다.

위기론이 성행한지 벌써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정작 그 위기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환경에 대한 탐구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대학원·학계에 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은 구체적인 논의주제로 공유되는 대신 대체로 사적인 통로에서의 한탄과 불만으로 소진되고는 한다.

구조와 학계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결여된 상태에서 인문사회분야의 지원은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일시적인 공적 부조에 가깝게 시행된다. 어느새 인문사회분야 대학원생은 별다른 쓸모는 없지만 가난하고 불쌍하니 도와줘야 하는 신분으로 추락한다.

거대담론 대신 연구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이제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책의 출발점이 된 <교수신문> 좌담회를 처음 기획하면서 나는 필자들에게 두 가지 논의방향을 제안했다.

첫째는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그런만큼 지적인 효용이 없는 거대담론 대신 대학원생·연구자들의 삶을 구성하는 세부 요인들, 예컨대 제도, 정책, 거버넌스, 조직문화 등에 주목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실제로 필진들은 모두 대학원·학계의 여러 거버넌스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둘째는 약자, 피해자 정체성에 얽매이지 말고 한 명의 연구자이자 동시에 스스로가 수행하는 제도적인 삶을 성찰하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러 대학원생이 차별과 비합리에 노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러한 피해자로서의 자의식이 우리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의 의미와 연구환경의 문제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냉정한 성찰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커지면 곤란하다.

요컨대 이 책은 인문사회분야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현재와 미래를 실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구체적이어야 실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해진 학술장, 다양하고 섬세한 접근 필요

우리의 논의 방향에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학술장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학술 연구의 의미가 확대된 오늘날, 대학원·학계에서의 삶은 심지어 연구자들 스스로에게조차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다. 비록 한국은 학과 간 장벽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성이 교차하고 연결되면서 생성되는 새로운 지식의 양부터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와 함께 대학원의 교육 연구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들 또한 더욱 다양해졌다. 영어권 학술장을 중심으로 학술 자료의 전자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SNS 등을 통해 타 전공자와 교류할 가능성이 높아진 2010년대 이래 대학원생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이용해야만 하는 경로는 다원화되었다.

대학원 과정에 대한 기대치와 지원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지도교수 및 학과만이 아닌 학교, 학술 단체, 국가 기구, 국내외 학술장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자원 역시 교육 연구 환경의 일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책은 이러한 복잡성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는 주제와 깊이 모두에서 완벽성을 추구한 저작이 아니다. 독자들은 책에서 누락한 주제를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나 짧은 책 한 권이 모든 영역을 다루지 못하는 게 정말로 단점일까?) 기대만큼의 대안이 제시되지 않아서 실망하는 예도 있을 수 있다(각자의 층위에서 실천적인 활동의 경험을 쌓아온 필자들이 명료한 해결방안을 쉽게 꺼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나는 다음의 답변으로 글을 맺고 싶다. 지금 우리 학계가 마주한 난국은 어느 한 두 명의 영웅적인 노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으며, 인문사회 연구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더 다양한, 더 생산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이우창 순천향대 연구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새뮤얼 리처드슨과 초기 여성주의 도덕 언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기를 선택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고등교육 및 연구환경의 개혁을 위해 연구자로서 또 행위자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해왔다. 서울대 대학원총학생회에서 고등교육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학원생 인권·연구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개선 작업에 참여했다. 마찬가지의 문제의식을 담은 책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기획하고 공저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