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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은 자만보다 진실되다
자학은 자만보다 진실되다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6.05.27 00: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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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과거의 청산과 이해?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되풀이되고 있다. 얼마 전 교수신문에서도 학진지원사업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이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과거를 대면하는 방식이 거듭해서 논해지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입증해주는 반가운 현상이다. 물론 역사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어느 역사가는 정부가 지원하는 과거청산 작업에 정치성이 개입되는 것을 경계하고, 다른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엄밀한 확증과 이에 따른 상징 차원의 조치들을 주장하기도 하며, 또 다른 역사가는 과거 사실의 규명이 과거에 대한 내면적 성찰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청산의 방법에서는 의견이 서로 다른 역사가들이, 과거청산의 목표에서는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상처의 치유와 사회적 화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상처 치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에서 홀로코스트가 표현되는 양상을 분석한 적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이 구분된다. 하나는 홀로코스트라는 절대악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가 견지되는 비극적 양상을 그려내는 영화들이다.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스필버그의 ‘쉰들러의 리스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절대악에 희극적으로 접근하는 영화들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대표적인 경우로, 그 영화에서 아버지는 수용소의 현실을 놀이로 변형시키고, 그렇게 아들을 구한다. 물론 비극이 첨가된다. 아들은 생존하지만 아버지는 죽는다. 지젝은 덧붙인다. 베니니가 일관성을 유지했다면, 다가오는 미군 탱크가 아이를 나치 저격수로 오인하여 사살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지젝이 주목한 것은 그러나 비극과 희극의 피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치 수용소에는 당시 “무젤만(Muselmann)”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를 죽이겠다는 나치의 협박에 직면하여, 딸을 죽도록 하고 아들을 살린 소피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존재이다. 무젤만은 삶의 이유가 남김없이 파괴된, 먹고 마시는 것이 허기와 갈증과 무관하게 그저 맹목적인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아닌 사람, 그야말로 “인간의 零度”이다. 무젤만은 미학화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를 희극으로 표현하면 비극이 되어버리고, 비극으로 표현하면 희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듯 미학화가 실패하는 존재는 인간의 상징질서의 피안에 있는 존재다. 언제나 그렇듯 지젝은 여기에서도 라캉의 “실재(the real)”을 발견한다. 실재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란 과거를 기성의 상징질서에 포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오히려 새로운 상징질서를 구성해내기 위한 초석으로 삼아야 할 그런 어떤 것이다. 실재는 사회적 화해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난 구멍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어두운 과거에 “무젤만”이 득실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교와 적용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과거가 현재에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현재의 기성 가치 속에 통합시키는 작업에 멈추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과거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때 비로소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유와 화해의 통로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치유와 화해는 오히려 과거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그 과정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치유와 화해를 과거청산의 목표로 삼는 순간, 기억의 적절한 정도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엄격한 구분이 문제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과거청산을 새로운 갈등의 원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막말로 그렇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인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라고? 맞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와 연관된다. 자학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학은 자만보다 얼마나 더 진실된가.    

김학이 / 동아대·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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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이 2006-05-30 16:50:03
제 허접한 글에 댓글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과거청산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제 글의 첫 머리에 썼듯이, 저는 과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리의 건강성을 입증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의견 주신 님들 모두가 그 건강함의 일부를 나누어 갖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한심한 건 저겠지요. 서양사를 전공한다는 핑계로, 편리한 포지션을 잡고 있으니까요.
그저 제 의견 역시 전체 논의의 하나로 간주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밝음 2006-05-30 16:17:00
무젤만이란 용어를 써서 어려운 글을 쓰셨군요. 존재 자체가 품은 비극성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이 글을 보니 마치 과거청산이란 역사의 피해자를 단죄하는 '자만'인 듯한 인상이 느껴지는군요.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가해자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용서를 할 수가 있는 것인가요?
용서와 화해란 우리가 우리에 대해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해자가 자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만을 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 세계는 어떠한가요? 그런 경우에 역사청산이란 단죄의 의미가 되어야 하겠죠.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용서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게다가 예로 드신 무젤만의 예는 피해자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데, 이를 어찌하여 가해자에 대한 방어 논리에 사용하신다는 말입니까?

존재 자체가 그러한 비극성임을 인정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모든 역사의 비극은 당연히 존재의 비극성 때문일텐데, 뭐하러 이렇게 삶을 사십니까? 허무주의도 이런 허무주의가 없군요. 역사청산이란 그런 삶의 비극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 사실은 일어날 가능성이 적어지도록 - 하는 작업 아니겠습니까?

민족경륜 2006-05-29 09:42:01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과거청산이 화해와 통합을 위한 것이라는 기만적인 자만의 변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턴가 과거청산의 그 명분을 들이 댈 때마다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이것을 사회적 명분으로 다시 공론화할 수는 없을 지라도, 학제적 논의의 공간 속에서라도 이런 고민을 하고 넘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이성이 살아있는 거라고 그래도 한번은 적어놓고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2006-05-28 23:31:01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인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가해자인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궤변은 이제 지겹습니다. 과거 청산은 치유와 화해의 의미도 있지만, 정의와 심판의 의미도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피해자가 자학하고 가해자가 자만합니다.피해자가 위악을 부리고 가해자는 위선을 떱니다. 자학과 위악 그리고 자만과 위선은 쌍동이와 같은 악입니다.진실이란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요? 학자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자학 때문일까요....

이런 2006-05-28 23:08:28
단순할 것을 복잡하게 만들는 짓은 역겹다. 육이오 전후 자행된민간인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망각되고 있다.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파시즘적 태도가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비하면 일제 청산 문제는 아이들 놀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