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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기억의 천재 푸네스
[딸깍발이] 기억의 천재 푸네스
  • 교수신문
  • 승인 2001.07.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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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4 16:58:17
박순성 / 편집기획위원·동국대

오래 지속된 삶이나 역사일수록 자기부정의 유혹을 받는다. 저문 강가에서 낡은 기억의 창고를 열고 악몽을 씻어낸 자들은 피안의 세계로 건너간다. 주인 잃은 기억들이 뒤섞여 흐르는 망각의 강은 곡조 없는 슬픈 노래를 부르고, 이제 과거를 지운 영혼은 이승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라 안팎에서 기억의 왜곡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데, 나는 망각의 신화나 읊조리고 있다.

차라리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기록이 더 그럴듯하다. 젊어서부터 거의 보지 못하게 되었던 보르헤스에게 기억은 세상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였으리라. 새장에 갇힌 지식인이 세상을 알고 있다고 믿기 위해 쉬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외우고 또 외우듯이, 보르헤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불면의 밤을 새우면서, 그는 “나의 꿈은 마치 당신들이 깨어 있는 상태와 똑같아요”라는 푸네스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오던 윗마을의 온갖 살림살이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들이 지상에 남긴 갖가지 절규들, 폭우가 끝난 시퍼런 하늘에서 태초의 빛깔과 형태로 어린아이들을 위협하던 구름들, 무수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깃털에서 피어오르던 먼지들, 이런 사소한 것들의 목록을 푸네스는 기억한다.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심지어 그는 천황에게 경배한 자들의 일기장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를, 전쟁에 끌려간 누이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만행의 시작과 끝을, 도심 한복판의 길 위에서 저질러진 살육의 현장을 붉게 물들였던 피가 공기 속으로 튀어나오던 순간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망각의 강을 매일 건너는 자들은 새벽녘의 푸네스가 한 말에서 위로를 받는다.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그들은 지나간 모든 사태를 담은 푸네스의 기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푸네스가 결코 그 기억들을 정의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미 푸네스에게 절망을, “그 작업은 끝이 없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해보았자 쓸모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심어놓았다.

또한 그들은 푸네스가 사고를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이나 법이 만들어낸 범주의 껍질 속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살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몸짓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푸네스의 삶 자체는 결국 끝날 것이다. 그들의 영생불멸 앞에서.

나는 그들이 밤의 관저나 하늘의 궁전에서 하는 작업을 알지 못한다. 아마, 수많은 사실수집가들과 진리탐구자들에게, 언젠가 애크로이드의 플라톤이 한 일을 시키고 있으리라. 이른 아침의 희미한 밝음 속에서 자신들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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