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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 전후 세대 지식인의 '독일 리더십' 논쟁
원로와 전후 세대 지식인의 '독일 리더십' 논쟁
  • 허유성
  • 승인 2022.12.13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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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논쟁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과 ‘숄츠 독트린’

전후 세대 지식인, 독일 사명감 강조…적극적 무기 지원 요구
하버마스는 ‘도덕적으로 분기탱천해 있는’ 젊은 지식인 꾸짖고

언론인들 “하버마스야말로 합리성 앞세운 ‘서구중심주의적 자기확신”
비판가들은 하버마스가 독일-러시아 사이 경제적 이해관계 간과 지적

2022년 12월 사민당이 주도하는 독일의 ‘신호등’ 연정이 출범 1주년을 맞은 가운데, 독일 언론과 지식인들은 올라프 숄츠 총리의 대외정책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화기 지원과 대중 외교가 쟁점이다. 

그간 숄츠는 안보와 대외정책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미·중 대립이 격화되던 지난해 말에 총리직에 오른 후, 불과 2개월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난관에 직면한 것이다.

전쟁 초기 숄츠는 푸틴의 침략을 저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른바 ‘시대전환 연설’(Zeitenwende-Rede)을 통해 기존 안보원칙을 깨고 군비증강과 더불어 분쟁지역인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선언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독일이 1970년대부터 유지해왔던 중립적 평화주의 노선과 러시아와의 애매한 파트너십, 즉 ‘동방 정책’(Ostpolitik)을 폐기했다고 분석했다. 동맹들은 독일이 기존의 소프트파워를 넘어선 지정학적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했다.

지난 2월 27일 슐츠 독일 총리는 연방의회에서 ‘시대전환 연설’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숄츠는 푸틴의 침략을 저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다. 사진=독일 연방정부

“우리는 전환의 순간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세계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 (…) 우리는 이 시대의 도전을 냉철하고 단호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숄츠 독일 총리의 2월 27일 연방의회 ‘시대전환 연설’ 중에서)

그러나 이러한 분석과 기대가 무색하게, 이후 정부의 태도는 모호했다. 지난 4월 독일 보수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가 표현했듯, 정치·군사적 리더십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 앞에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는 듯했다. 우크라이나에 자주대공포 50정을 지원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그마저도 정작 우크라이나군에게 절실했던 레오파르트 전차는 끝내 제공하지 않아 동맹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6월, “독일 총리가 푸틴을 저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비판한 데 이어, 9월 숄츠와의 단독 인터뷰 후 “그에겐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 구체적인 비전이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숄츠는 인터뷰 내내 “우크라이나의 승리”가 아니라 “러시아는 이길 수 없을 것”이란 모호한 표현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숄츠가 기업인들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하자, 연정에 참여 중인 정당들조차 그의 대외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체 숄츠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합리성’과 ‘도덕성’ 사이에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모두 겪은 원로 지식인들은 독일과 유럽이 “전쟁의 일원이 돼선 안 된다”며 무기 지원 철회를 촉구했다. 반대로 전후 세대 지식인들은 독일의 도덕적 사명감을 강조하며 보다 적극적인 무기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연로한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도 한 일간지의 지면을 빌려 논쟁에 가세했다. “도덕적으로 분기탱천해 있는” 젊은 지식인들을 꾸짖고 “신중한” 총리와 정부를 옹호했다.

요컨대, 우크라이나 중화기 지원이 푸틴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딜레마에 직면해 핵전쟁의 리스크를 신중하게 관리하고 있는 현 정부에게 지금 당장 더 많은 살상 무기를 지원하라는 젊은 세대의 주장은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도덕적 협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건설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신중한 목표의 설립은 그러한 희망을 반영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쥐트도이체 차이퉁> 4월 28일 논설 ‘전쟁과 분노’ 중에서)

하버마스는 젤렌스키의 “영웅주의적” 항전에 감명 받아 숄츠 정부에 도덕적 압박을 가하는 젊은 지식인들에게 냉전 시대의 “탈영웅주의적” 경험과 그 교훈을 배울 것을 주문한다. 서방은 냉전을 겪으며 핵무기를 지닌 상대와의 전쟁에선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데탕트와 동방 정책은 핵전쟁과 인류의 공멸이라는 냉전의 공포 속에서 서방이 찾아낸 합리적 해법이었고, 그렇게 서방은 냉전의 서사에서 영웅 대신 평화를 세웠다고 하버마스는 설명한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보기에, 유럽으로의 확전 가능성 없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종결시킬 방안을 모색하는 숄츠의 신중함은 합리적이다. 자주포는 되지만 전차는 안 된다는 난해한 결정과, “우크라이나의 승리” 대신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 말하는 모호함은 이러한 합리성의 반영인 것이다.

컬럼비아대의 경제사학자 아담 투즈도 영국의 시사주간지 <뉴 스테이츠먼> 논설을 통해 푸틴의 위협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젊은 지식인들의 주장은 틀리지 않지만, 그로써 이 논쟁이 도덕적으로 이미 결론 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컬럼비아대 경제사학자 아담 투즈도 영국의 시사주간지 <뉴 스테이츠먼> 논설을 통해 푸틴의 위협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젊은 지식인들의 주장은 틀리지 않지만, 이 논쟁이 도덕적으로 이미 결론 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미지=<뉴 스테이츠먼>

하버마스의 일갈에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젊은 지식인들이 들고일어났다. 요컨대 정치 행위에 대해 도덕을 논하는 것이 왜 문제냐는 것이다. 특히 합리성을 도덕성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세운 하버마스의 공식이 집중포화를 받았다.

예일대의 동유럽 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독일이 냉철한 합리성의 담지자를 자처하기엔 현 사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너무 크지 않느냐고 따졌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들은 지난 나치의 만행과 지나치게 닮았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지속된 동방 정책은 무분별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통해 푸틴에게 전쟁자금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성에 관한 질문들은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중심적이며, 몇몇 담론의 전사들이 원하는 대로 배제되거나 은닉될 수 없다.” (게오르그 디에츠, <디 차이트> 6월 22일 논설 ‘새로운 잔혹성’ 중에서)

국내외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도덕성 논의를 한낱 치기 어린 사회 구호로 치부하는 하버마스야말로 합리성 개념을 앞세운 “서구중심주의적 자기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반발했다. 독일 언론인 게오르그 디에츠는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대리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도덕성 범주 자체를 논쟁에서 배척하려는 시도는 냉철함이 아니라 “잔혹한 전쟁범죄에 대한 냉담함(Kaltherzigkeit)”의 증거이며 “도덕공포증”(Moralophobie)이라고 반박했다. 

여전한 경제 우선 원칙, 
숄츠 독트린과 독일의 리더십 위기

비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판가들은 하버마스가 독일·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간과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독일의 신중함 이면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러시아와의 경제적 유착관계에 대한 고려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러시아의 경제적 유착은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의 영토를 나눠 갖던 18세기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고, 현대의 동방 정책과 파이프라인은 이 오랜 역사의 산물이다. 에를랑겐대 경제학자 베로니카 그림과 런던정경대 경제사학자 알브레히트 리츨은 이러한 양국의 경제적 결속이 동유럽 식민화 전략에 의존해왔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따른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독일의 이 은밀하고도 착취적인 경제전략의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지식인 논쟁에 많은 지면을 제공해왔던 독일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 역시 자국의 경제적 이권을 지키고 또 확장하는 것이 지난 1년간 독일의 대외정책에서 핵심적 기조였다고 분석한다. 이것이 <디 차이트>가 제시하는 “숄츠 독트린”이다.

숄츠 총리는 글로벌 사우스를 대외정책의 교두보로 여긴다는 면에서 전임자 앙겔라 메르켈과 뚜렷이 구별된다.  사진=독일 연방정부

“숄츠는 스스로를 개척자라고 여긴다.” (페터 다우젠트 & 안나 자우버브라이, <디 차이트> 11월 18일 기사 ‘숄츠는 세계를 정리 중’ 중에서) 

분석에 따르면 숄츠 독트린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평등한 외교 관계 수립, 그를 통한 신냉전 구도 타파 및 다자구도 형성, 그리고 그 안에서 독일과 유럽의 역할 강화를 목표로 한다. 실제로 숄츠는 지난 1년간 무기 지원 문제로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동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총 19개 국가들을 순방했다. 글로벌 사우스를 대외정책의 교두보로 여긴다는 면에서 전임자 앙겔라 메르켈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디 차이트>는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독일 내부의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11월 방중은 그런 숄츠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숄츠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진핑을 만나 중국과의 경제적 ‘디커플링’을 원치 않는다고 못 박았다. 시대전환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국 경제와 지경학적 전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선 메르켈과 다르지 않다. 

사회민주동맹 소속 유럽의회 의원인 라파엘 글룩스만은 일찌감치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에서 독일의 리더십을 끝장냈다”고 말한 바 있다. 숄츠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판적 분석이 맞다면 앞으로도 숄츠는 동방 정책과 메르켈의 계승자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중화기 지원과 대중외교 문제로 인해 밖에서는 유럽에 대한 독일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안에서는 자신에 대한 불신임 가능성까지 대두된 상황에서 숄츠가 이러한 독트린을 고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허유성 객원기자·듀크대 사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후 듀크대 사학과에서 ‘냉전기 독일의 과학기술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독일 포츠담현대사연구소(ZZF)에 방문연구원으로 있다. 동독의 기술관료제적 경영정보시스템과 지식 하부구조에 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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