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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김성환 논쟁'을 보며
'김진석-김성환 논쟁'을 보며
  • 정세근 충북대 교수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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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철학을 만든다

이 글은 김진석-김성환 교수의 논쟁을 보며, 정세근 교수가 기고해온 글이다. 동양철학자의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김진석 교수와의 대담을 요청하자, 정 교수는 그간의 논쟁에 대한 '독후감'을 보내온 것이다. 글 전문을 게재한다.

정 세 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신문사에서 대담자리가 있다며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들어보니 '만날 수 없는 사이'라든지 '아직 나서기 그렇다'든지 '이제 욕먹기 싫다'든지 하는 비학문적 용어가 학리적 탐구에 앞서 있었다. 정작 동서철학이 만나 짭잘하고 시원한 이야기를 해야 할 이 시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좀 더 발전적으로 개진하고자 종합하는 자세로 이 글을 쓴다. 어차피 기자가 보내온 논쟁문을 읽는 바람에 이미 시간은 빼앗긴 대로 빼앗긴 마당이다.

김진석 교수(인하대)는 동항(同行)의 말처럼 공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는 김상환(서울대), 최진석(서강대) 교수의 글 논평자로 나란히 자리에 오른 적 있고(1999.11.20. 서울대), 그 때 나는 그가 나와 많은 생각을 공유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다못해 쉬는 시간에, "김 교수의 '포월'(匍越)이란 용어는 특허내야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인용 없이 그냥 쓰네요"라며 그의 철학적 창조성을 변호한 적도 있다(물론 오오하마 아키라의 '包越'이라는 용어와 구별하여). 우리의 생각은 해체론이 나오자 노장이 해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공주의'의 혐을 벗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노장과 데리다가 아니라 진정 '개방성의 기원'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것이 인간, 사회, 윤리, 국가, 종족 그리고 수많은 판단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칸트가 나오면 모두 칸트, 하이덱거가 나오면 모두 하이덱거, 이런 식의 접근은 영원한 식민지학을 보장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입장은 오히려 김 교수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나야말로 전공주의는 배격하지만 이른바 전공이라는 것은 동양 그것도 노장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사회비평}에서 김용옥박사에 대해 장문의 논평을 써달라 왔을 때도 우리 학계의 '냉담제일'론을 거역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글도 자칫하면 배신자의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김 교수의 견해를 옹호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을 중체서용(中體西用)과 화용양재(和魂洋才)의 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은 내 철학개론의 첫부분이다. 일본만 하더라도 '중국철학사연구'라 하여 자기와 중국을 철저히 구별하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분류에 감감 무소식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 김성환 교수 의견의 타당성이 있다. 서양학에 치인 동양학, 서구의 보편이란 이름의 폭력, 그에 기생하는 문화권력, 마침내는 "철학의 살집에 끼어든 '동양'이라는 가시를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투정"과 질투, 이런 것들에 휩싸여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동양학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양철학전공자보다 많은 동양철학전공자(한국철학도 포함하여)가 있는 대학이 우리 나라에 있느냐는 말이다. 따라서 동양철학계를 잘못 건드리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울분이 폭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의 철학 교수진 비율을 현행의 '서양철학2/3, 동양철학1/3'도 못되는 수치에서 이를테면 '서양(구미)철학 1/3, 중국 및 일본철학1/3, 한국철학1/3으로 하자'고 할 때 받아들일 학과가 몇이냐 되냐는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 거기다가 '동양담론의 공허함'을 외쳤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진석 교수의 말을 잘 들어보자. 그는 동양이 곧 대안이라는 논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서양중심의 해석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김 교수는 솔직하며 학구적이다. 내가 보기에 김 교수의 문제는 '문제 자체'에 있지, 동서의 구별이나 호교론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같음을 만드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름이 철학을 만든다. 주자와 칸트의 다름, 나아가 공자와 강유위 및 장태염의 다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아퀴나스의 다름 때문에 철학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철학계에서 '다름'은 모독이고 무지이며 오독으로 간주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판이 곧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주는데도, 비판이 상정하고 있는 다름을 참아내지 못한다(졸고, [철학적 비교에서 같음과 다름], 범한철학23). 마치 주자와 다르면 큰일 날 것 같은 조선의 유생과도 같다(과거답안지 때문이라도). 그러나 다름만이 철학의 생명이고 인문학의 활력소이다. 달라야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김진석·김성환 교수의 논쟁이 마치 소모전과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나란히만 갈 뿐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서양철학자가 동양철학자보다 많이 알 수 없거나, 그 거꾸로인 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원칙적으로 '철학하고' 있지, '철학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사의 행위도 강단철학의 주된 과제임을 조금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은 철학하는 것이 아닌가?

철학을 할 때, 전제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치열한 논지의 전개이다. 이를테면, '도가의 자연관이 생태론의 대안이다'라는 명제는 당위적이지만 사실적이지 않고, 또한 '도가의 자연관은 생태론과 무관하다'는 명제는 선언적이지 추론적이지 않다. 동양담론이 요란한 깡통이라면, 서양담론도 또한 조용한 요강일 뿐이다. 이렇듯 '경전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신화가 폐기'되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가 아닌가?

나는 오히려 요즘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많은 담론들이 멋진 수사에만 빠져, 읽을 때는 좋은 데 읽고 나서 남들에게 이야기하려면 금방 까먹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변중심의 시대에서 수사우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마치 주간지를 읽고 버릴 때처럼 텅 빈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애무는 많이 하는 데 진정한 포옹은 온데 간데 없다.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조건 없는 포스트모던적 해체는 학문의 약육강식으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임을 다양한 수사로 주장하는 이왕주 교수(부산대)에게 한 적이 있는데(2001.6.2. 원광대), 그것은 애무가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쾌감을 위해서임을 서로 확인하기도 했다.

김진석 교수는 동양을 잘 모른다. 김성환 교수는 동양을 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알고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지배질서(성·계급·인종·종교에 따른)'(김진석)를 파악하고 '구체성과 실천성이 결여된 추상적 관념성'(김성환)을 실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이데올로기의 과잉이겠는가?

최진덕, 최진석, 김진석과 정호근, 정세근이 어울어졌던 그 날의 발표된 논평문([해체의 해체])의 끝을 옮긴다. "데리다가 서구의 형이상학을 말하듯, 우리는 동양의 철학적 기반을 물어야 한다. 요즈음이 후기 현대일 수 있는 까닭은 오늘이 제2의 현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의 현대'이기 때문이다. 그 현대의 정답으로 노장과 데리다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계보학의 부활이지, 그것이 계보학이었다는 진술이 아니다. 유가전통에 대한 오류의 계보학 뿐만 아니라 도가와 불가전통에 대한 시비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완전한 대안은 없다. 비판의 수행과 그 결과로서 철학만이 있을 뿐이다." 앞의 이야기는 요란한 깡통이라도 좋으니 동양의 역할을 희망하는 것이고, 반면 뒤의 이야기는 그것이 조용한 요강으로 끝나지 않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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