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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노동자, 작업 배제가 최선?…‘태아 산재’는 악순환
임신 노동자, 작업 배제가 최선?…‘태아 산재’는 악순환
  • 김수아
  • 승인 2022.12.09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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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틀어보기_『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 희정 지음 | 오월의 봄

아프게 태어난 ‘태아 산재’는 2세 질환 직업병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사실 자체가 불평등

반도체 사업장의 산업재해 문제는 널리 알려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산업재해와 관련된 대중의 관심과 이해가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산업재해 중에서도 아직까지 ‘문제화’되지 않은 부분을 다룬다. 임신한 여성 노동자의 경험과 2세 질환 직업병으로 나타난 피해의 연결, 여성의 몸과 노동권,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만 여겨지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를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담아낸다.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꾸준히 기록해왔던 기록노동자 희정이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을 위한 단체로 시작하여 전자산업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는 반올림과 함께 만든 책이다. 당시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태어난 아이의 질병이 산업재해 때문이라고 문제화하는 과정, 다수의 ‘유해한’ 노동 현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노동 현실, 임신한 노동자로 현장을 견뎌내고 이겨낸 과정 그리고 출산 이후의 경험, 아프게 태어난 아이와의 일상 등을 보여주면서 태아 산재 즉 2세 질환 직업병 문제를 우리 사회가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여성 노동자의 모성보호라는 법의 허울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현재의 근로기준법상 임신한 노동자의 보호 조항이란 사실 임신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는 노동으로부터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임신한 노동자에게 유해한 환경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 자체가 부재하고 사업주가 육아 휴직자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노동자 간 갈등을 방치하기에, 임신한 것이 죄가 되는 여성 노동자는 임신 사실을 숨기고 유해한 업무를 떠맡게 된다. 이렇게 태아 산재가 발생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목소리를 낸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왜 아픈지,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왜 아픈지를 물을 때 찾지 못했던 답을 이제야 찾아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낮고 임신한 여성 노동자를 탓하는 시선이 더 많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있다. 

산재 신청이라는 법적 과정 역시 지난하다. 요구되는 서류가 많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진짜 ‘피해자’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근거를 만들라고 뒷짐 진 권력은 근거를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평등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전자 산업 노동자’의 범위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한다. 보이는 노동자와 ‘보이지 않는’ 노동자가 있다. 청소 노동자는 유해 물질 누출 사고 이후에 추적 조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눈에 보이지 않게 된 노동자이다. 하청 업체와 파견 업체라는 이름으로 논의에서 배제되는 경우, 자동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노동자의 삶은 ‘여자 일자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구조적 성차별을 경험하고 있고 이를 증거한다.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차별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현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을 부인하는 중이다. 정상인 남성의 몸을 노동자의 조건으로 협소하게 설정하고 여성 노동자를 예외로 보아 배제하려고 하며, 여성 노동자의 권리인 재생산과 관련된 제반 권리 요구를 양해 받아야 할 일, 다른 동료에게 미안한 일로 만드는 문제는 현재 여성 노동자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노동 관련 정책이 악화 일로에 있다. 수많은 투쟁을 통해 줄여왔던 법정 노동 시간이 다시 늘어나려 하고 있고, 산업재해와 관련한 기업의 책임을 묻는 중대재해처벌법 역시 기업에 유리하게 변경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제기한 문제를 다룬 태아산재법이 내년 1월 시행 예정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고용노동부가 시행령으로 산재 인정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이제 막 ‘2세 질환 직업병’에 대해 산재를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을 뿐인데, 그 권리마저도 축소하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끝이 나지 않은 시작’이라고 표현한 그 시작의 순간마저도 침해되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할 ‘문제’를 꾹꾹 눌러 담은 이 책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여성학협동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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