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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기어간다는 것
문화비평: 기어간다는 것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6.05.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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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중증 장애인 50여명이 한강 가운데 노들섬까지 기어갔다. 몇 분이면 갈 거리를 기어가는 데 5시간 정도 걸렸는데, 전국장애인 차별철폐연대는 "7천억을 들여 건립한다는 오페라하우스가 사람의 생존권보다 더 대단한지 보러 간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 속도로 세상을 살아왔고, 활동보조인 없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을 여기서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기어서 간 것이다. 나도 수천억을 들여 그 섬에 오페라 하우스 등을 짓는 데 반대한다. 고급공연장은 벌써 충분히 있으며, 몇 년 전부터는 높은 수준의 구립 문예회관도 생겼다. 이제는 생활 구석구석에도 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돈을 쓰는 게 좋겠다.


그러나 그 반대를 넘어, 이 사건은 문화 속의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쪽 극단에는 점점 호화스러움을 과시하는 고급문화가 버티고 있고, 다른 극단에는 일어나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도시에 또 무슨 오페라하우스냐며 항의하는 장애인들이 있다.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요구하는 문화는 ‘걷고 싶은 도시’의 수준이다. 그보다 훨씬 낮은, 아마도 가장 낮은 수준에서 장애인들은 활동할 수 있는 문화적 권리를 요구한다. 그들의 요구는 문화의 최저점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고급문화의 현장을 기어가서 공격한 적은 없었던 듯하다. 장애인들이 사다리를 몸에 칭칭 감고 서울역 지하철 레일 위에서 시위하며 지하철 운행을 막은 일은 있었지만, 그들은 그 때 기본적인 이동권을 요구했을 뿐 고급문화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느린 몸뚱이를 무시하고 건너뛰려는 고급공연장의 건립 자체를 이제 그들은, 입을 비틀고 몸을 비틀며, 반대한다. 더욱이 한강대교 4차선 중 3차선을 차지한 채 기어가며 교통까지 불통되게 만드는 위험도 감수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고급문화뿐 아니라 보통 정도의 문화에도 용감하게 태클을 건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문화사에서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서울시는 결국 활동보조인 제도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1989년에 만들어진 영화 ‘나의 왼발’은 화가가 된 장애인을 보여주었었는데, 그것만 해도 한 개인의 감동적인 일화의 수준에서 그쳤었다. 그런데 최근 중증 장애인들의 문화적 요구, 아니 시위를 일깨우는 사건이 있었는데, 앨리슨 래퍼의 방한이 그것.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인 그는 자신의 몸, 두 다리는 아주 짧고 두 팔은 없는 상태의 몸을 살아있는 현대의 비너스라고 자칭했다. 장애가 있는 자신의 몸을 ‘살아있는 비너스’로 호명하면서, 그는 도전한 것이다. 장애인의 사진이나 몸도 예술로 존재할 수 있다고. 장애인의 몸이 고급문화의 ‘살아있는’ 이미지라고.


여기서 ‘죽은 작품’과 ‘살아있는 작품’ 사이의 교환은 가히 치명적이다. 처음에 팔이 없는 비너스를 보고 래퍼는 기형적인 몸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낀다. 다음에, 장애자의 몸이 사진으로 전시되고 ‘임신한 앨리슨 래퍼’의 조각이 트래팔가 광장에 전시되기 이르렀다. 이 수준까지만 해도 교환은 거의 대등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살아있는’ 비너스가 그의 기표적 우월성을 통해 ‘죽은’ 비너스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런데 ‘살아있는’ 비너스가 다름 아닌 장애자의 몸이라니! 나쁜 아이러닌가. 그렇지도 않다.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이상하게도 역설적으로 팔이 없음으로써 더 아름답고 유혹적인 조각으로 존재했었다. 기형성 덕택에 예술적 유혹을 불러일으켰으니, 예술이 기형적 아이러니에 몸을 기댄 셈이다. 

 
장애인의 몸은 바닥을 긴다. 숨기는 것 하나 없는 낮은 몸은 보는 눈을 아프게 한다. 그와 달리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보통 사람은 벌써 장식과 세련과 속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생산한다. 죄는 결코 아니다. 문명적 발전이 그 욕망을 정당화시켜 주니까. 그러나 그 순간 문화는 이미 ‘저를 숨기지 못하는 몸’과 떨어져 겉돌거나 헛돌거나, 과속한다. 장애의 위험을 벗어난 몸은 문화적 욕망의 위험에 빠졌다고나 할까. 장애 없는 몸, 무릎으로 기지 않는 몸은 자신을 살아있는 작품으로 느끼지만, 이 작품은 또 위험을 무릅쓰면서만 살아있음을 겨우 증명한다.

김진석 / 인하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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