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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속에 남은 효소
패배 속에 남은 효소
  • 나간채 전남대
  • 승인 2006.05.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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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주에 대한 회고와 그 현재성에 대해

▲나 간채(전남대 교수, 사회학) ©
80년대를 광주에서 살면서 내 눈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항쟁의 피해자들, 특히 유가족과 부상자들, 그리고 기층출신의 구속자들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죽어간 친지와 이웃을 위해, 그리고 좌절된 항쟁을 위해 저항투쟁을 일상화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약하고 성하지 않은 몸으로 생업을 포기한 채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나의 아픔은 이들이 대체로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서민들, 말하자면 힘없고,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하층 사람들이라는 데서 더 컸던 것 같다.


   당시 군사정권은 5.18을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하였고, 항쟁의 진실을 조작하여 은폐하려 하였기 때문에 학살자를 규탄하고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투쟁을 엄격히 탄압했었다. 활동가들에 대한 감시와 미행, 집회에 대한 원천봉쇄, 원격지 격리, 연행과 구속 및 고문 등이 일상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권력은 이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살 집이 없는 사람에게 아파트를 약속하기도 했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시내버스  매표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를 굳게 붙들고 있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현실 앞에 지쳐갔었다. 나는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오래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눈이 젖어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싸움은 쉽게 포기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에게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야비하고 폭력적인 권력을 마주하는 민중들의 이 싸움이 쉽게 포기되지 않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태에서도 계속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무슨 힘이 이들을 물러나지 않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그들이 이 싸움에서 물러설 수 없게 만드는 힘은 항쟁 당시에 죽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갖는 ‘살아남은 자의 빚’이라는 답을 얻었다. ‘......한 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를 뒤로 남긴 채, 먼저 떠난 동지에 대하여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 싸움을 ‘새 날이 올 때까지’ 계속하는 일이라는 정서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 본능적 열정에 기초하여 5.18항쟁은 80년대는 물론 90년대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예를 들면, 살벌하고도 치열했던 1995년의 5.18재판투쟁이 그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하여 5.18항쟁은 먼저 간 동지들과 함께 패배하여 죽었다가 근 20년 후에 다시 살아나서 승리한 것이다. 이는 학살책임자들을 법으로 단죄하였고, 피해자들은 정신적 물적 보상과 민주화유공자로서의 명예를 회복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지적한다. 그 하나는 긴 싸움을 가능하게 했던 항쟁의 원동력에 관한 것이다. 1980년 5월 26일 밤 10시 경에 있었던 투쟁위원회의 마지막 회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회의가 당시 항쟁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내일 새벽 즉, 두 시간 후에 계엄군의 공격작전이 개시되는 데, 우리 투쟁본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관한 회의였다. 면접에 의하면, 그 회의에서 무장해제파와 투쟁파가 분리되어 마침내 무장해제를 주장했던 사람(다수파)들이 물러났고, 투쟁파의 주도하에 전투를 개시하였고,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에 지우기 어려운 약속이 새겨지게 만든 주인공들이 바로 이 전사들이었다. 잠시 후에 다가올 죽음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동지와 시민을 위해 지켜야 할 원칙에 충실했던 패배 즉, 이러한 형식의 패배가, 그람시의 말과 같이, 그 속에 승리를 위한 효소를 내장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20년 후의 승리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민중에 대한 각성이다. 민중이 갖는 절대성과 힘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다. 5.18은 초기상태에서 대학생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항쟁이 진전되고 난 이후에도, 그리고 항쟁이 좌절되고 난 후 5월운동의 저항투쟁에서도 유가족과 부상자 및 기층민중 출신의 구속자들이 저항의 최전선에서 몸으로 싸워왔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힘은 논리 이전의 원초적인 것이어서 어떤 절대성을 내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위대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요즈음 심각해진 평택 미군기지터 문제에서 민중과 군부간의 대립상태가 자칫 왜곡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다. 강경진압과 군법을 적용하겠다는 방침은 과도한 조치이다. 정부는 시간이 좀 더 더 걸리더라도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자세에서 국민이 주체가 되는 대화를 계속해나가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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