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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무기력했던가 … “國旗에 큰절 했던 사연”
왜 그렇게 무기력했던가 … “國旗에 큰절 했던 사연”
  • 박수진 기자
  • 승인 2006.05.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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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대학

80년, 핏빛으로 물들었던 봄이 어느 덧 26년 전이다. ‘서울의 봄’이 ‘광주사태’로 곧바로 엎어졌던 엄혹했던 그 시절을 ‘대학’과 ‘교수사회’라는 기억의 범위 안에서 되새겨보려 한다. ‘현실 비판’과 ‘학문의 주체성’ 등 본연의 역할을 견지하지 못했던 당시의 대학과, 정부의 지침에 종속되었던 다수 지식인들의 모습을 통해 ‘자본’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질서에 종속된 오늘의 지식인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편집자주

5·18 광주민중항쟁 직후인 1980년 6월부터 1983년 10월까지 약 3년여간 서울대 총장을 지낸 권이혁 서울대 전 총장은 83년 당시 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장 부임 이래 매일 아침 8시 45분이면 간부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단 한 차례도 순수한 교육 문제에 관해 논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인문대가 위험하다. 사회대도 문제라는데…’ 그러다 결국 ‘오늘도 비나 왔으면 좋겠다’며 회의가 끝나곤 했습니다” 당시 교수사회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임영천 교수 ©
1977년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해직됐다가 79년 복직된 이후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다시 해직됐던 임영천 조선대 교수(64세, 국문학)는 “조선대 같은 사립대의 경우 전두환 독재 정권은 물론이고, 폭압적인 총장까지 가세해 장벽이 둘이었다”고 말한다. 박철웅 당시 조선대 총장이 ‘대명회’라는 체육대학 교수들 모임을 이용 학생 및 교수 감시를 일삼고, 수시로 교수들을 구타하는 등 “파쇼 독재 못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싸인 하나 거부못한 지성의 肖像”

1984년 교황의 방한 등으로 5·18 해직 교수들의 복직 분위기가 일면서 전남대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거의 모든 대학의 해직 교수들이 복직되던 때, 유일하게 복직되지 못한 곳이 조선대였다. 임 교수는 “박 총장이 ‘복직 반대’에 서명하게 하는 연판장을 돌렸는데, 여교사 1명을 빼고는 모든 교수·교사들이 ‘복직 반대’에 찬성하는 서명을 했다”며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섭섭한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 그 싸인 하나를 거부하지 못할 정도로 지식인들의 양심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 임 교수를 비롯한 5명은 3년 뒤인 87년에야 복직될 수 있었다. 

80년대 대학은 그 이전보다 훨씬 가혹했다. 74년 긴급조치 4호 선포 이래 79년 10·26까지 6년간 제적된 학생 수가 7백68명이었는데, 80년 5월17일 이후 4년간 제적 학생수는 1천3백63명에 달했다.

최영태 전남대 5·18 연구소 소장은 “당시 대학이 학생 제적 시, 적어도 1심 판결이 난 후에 제적시키는 최소한의 상식적 행동이라도 보였어야 하는데, 구속되면 바로 제적시키거나 구속되기 전부터 제적시키는 등 학생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비판했다.

전남대에서는 81년 9월 29일 학내 집회때 학생들이 작성해 배포한 유인물의 자구 하나하나를 교수들이 일일이 분석해 ‘용공 문서’로 분류하고 “교수세미나에 자료로 제공”한 내부문서도 발견됐다.

최 소장은 “문교부에서 대학으로 하달되는 학생지도지침을 교수들이 나서서 적극 배부하고, 시위 학생들을 A, B, C 등급으로 나누는 활동 등에 교수들이 순응했음을 보여준다”라고 덧붙였다.

▲이광우 교수 ©
이광우 전남대 명예교수는 이런 대학들에 대해 “대학의 존재가치란 현실사회를 비판하고 개혁 대안을 내놓는 것인데 그런 대학은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라고 당시 대학의 체제순응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부 교수들에게는 ‘국가주의’가 내면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0년 당시에는 학생 운동을 한 한 시간강사는 “워낙 엄혹했던 시절이라 교수들의 ‘침묵’이나 ‘소극적 지지’를 지금은 이해한다”면서도 ‘국기하강식’에 관련된 웃지 못할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에 6시에 국기를 내릴때면 누구 할 것 없이,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부동자세로 국기가 있는 쪽을 향해 경례를 했다”며 “어느 날 비꼬는 의미로 친구와 함께 국기에 대고 ‘큰 절’을 했는데 마침 본부 창밖으로 지켜보던 교수가 우리를 불러 ‘너희들은 국가와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라고 일장 훈계를 했다”고 한다. 그는 “왜 교수가 저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에 분노가 일었다고 그 때를 회고한다.

79년 학생운동이 ‘사회 민주화’를 목표로 내걸었다면, 10·26으로 유신시대가 막을 내리자 80년대 학생 운동은 ‘학내 민주화’를 목표로 내건다. 그만큼 안기부원의 대학 상주, 감시, 어용교수 등 학원 자율을 침해하는 요소가 많았던 것.

▲이상신 교수 ©
이상신 고려대 교수(역사학)는 그러나 “학원 자율을 억압했던 가장 큰 요인은 여러 제도적 요인보다 교수 스스로에게 있다”고 교수에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정권이야 역사 속에서 별의별 정권이 다 들어서, 별의별 짓을 다 할 수 있지만, 학문의 장을 지켜야 하는 주체들이 자기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이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그는 “지식인 유화 정책 등을 쓰면서 조금 느슨해졌던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교수들이 묘하게 무기력해져 자생력, 저항력을 잃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대가 엄혹해지자 이 무기력이 지속되면서 대학이 ‘현실 비판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이 교수는 “80년 이후 대학들이 다시금 조직력을 갖추고 정부를 조금이나마 비판하게 된 계기는 그 해 7월 해직됐던 교수들이 84년 다시 복직되던 때를 기점으로 한다”고 말한다. 

한신대, 교수 1백여명 전원 성명서 발표

그럼에도 당시 한신대는 놀라운 ‘운동력’을 보여줬다. 건학이념 자체가 “70년대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를 민주화하자”였던 한신대는 81년부터 김성재 한신대 교수(당시 기획실장) 등이 중심이 되어 진보적 인사들을 적극 교수로 임용했고 81년 5월에는 대대적 학내 집회가 벌어져, 2년 간 신학대학 신입생 모집 정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김성재 교수는 “압력이 없었냐”는 질문에 “정부나 안기부 프락치들의 외압이 있었지만, 당시 모두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정부에서 일종의 ‘포기’ 상태로 적당히 압력을 가하되, 크게 문제삼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상신 교수는 “당시 한신대는 81년 이후, 매 시국 선언마다 교수 1백여명 전원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인상 깊은 민주화 운동의 전력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이런 모습에는 분명 당시 침묵했던 대다수 대학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 있다.
 박수진 기자 namu@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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